27화
출근하는 신재언에게 인사를 건네던 최윤정은 커피를 뽑다 말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상큼한 얼굴로 회사의 눈요깃거리이자 과즙 신재언으로 불리는 사람의 얼굴에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시려던 커피를 그의 손에 들려 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재언 씨,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요…….”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받으며 카페인을 충전했다. 한숨도 못 잔 데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바람에 재언의 심신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재언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윤정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그냥 잠을 설쳐서 그래요. 한숨도 못 잤거든요…….”
“어쩌다가?”
“하하하.”
힘없이 웃은 재언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어쩌다가 그랬냐고 물어도 꼬마 귀신과 생령 때문에 거대 빌런들과 함께 여기저기 쏘다니며 저승사자와 만났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난리를 치고 바로 회사에 출근하는 바람에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된 재언은 업무를 일찍 시작하고 싶지는 않아서 휴게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아침 뉴스에서는 신재언이 궁금했던 주제가 나오고 있었다.
- 오늘 아침 청담동 근처 저택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 모씨(20)가 두 다리를 다쳐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소방당국은 이번 화재에…….
“어머, 저기 집값 장난 아닌 곳 아니야? 어쩌다가 불이 났대? 젊은데 안타깝네.”
저 이 모씨(20)라는 사람은 평생 두 다리를 쓰지 못할 것이다. 사실 두 다리뿐만 아니라 아예 운전대를 잡지 못하겠지만, 뉴스에서 거기까지 다루지는 않았다.
윤정은 회사 앞에서 사고를 낸 뺑소니범에게 삼대가 재수 없었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퍼부었으면서 막상 뉴스에 나온 사고 피해자들이 뺑소니범인 줄도 모르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신재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뭐, 그게 인과겠죠?”
윤정은 재언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가까워지는 업무 시간에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따른다. 인과응보였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다시 평소처럼 바쁜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뮤지컬배우 ‘코루루’ 5월 28일 한국에 상륙.]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우수에 잠긴 눈빛, 살짝 벌어진 입술.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지만, 사진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으음…….”
“그래서 이번 5월 29일에 시간 비워 주세요, 재언 씨. 오랜만에 데이트나 해요.”
“아… 음… 그쵸… 오랜만이긴 한데…….”
신재언이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서 차민재가 예쁘게 웃으며 뮤지컬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S급 히어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그는 바쁘지도 않은지 항상 이런 티켓을 준비하곤 했다. 그가 골라 온 연극, 뮤지컬, 전시회들은 하나같이 훌륭해서 신재언의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함께 가자고 제안한 뮤지컬을 확인한 신재언은 우물쭈물하며 곤란한 듯 웃었다. 그러자 차민재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바뀌었다.
“혹시 그때 바쁜 일이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다행이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바쁜 일이 있으면… 재언 씨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그놈을 죽일 생각이었거든요.”
‘하하하.’
예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정말 가관이었다. 하지만 저절로 후광이 나는 얼굴 때문에 아무리 살벌하게 말해도 위험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했다.
차민재의 웃음소리에 맞춰 함께 웃던 신재언의 표정이 정말 곤란한 제안을 받은 사람처럼 난처해졌다.
‘그래…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레헬이 같이 가는데 섣부른 짓은 못 할 거고 별일 없겠지. 아니, 못 일으킬 거야.’
결국, 신재언은 고개를 끄덕여 차민재의 데이트 신청을 수락했다. 사실 웃을 때 천사처럼 순하고 예쁘고, 그윽하게 쳐다볼 때 고혹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차민재의 얼굴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레드 헬 파이어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근처의 꽃집으로 달려가 장미꽃 99송이를 사서 프러포즈를 했을지도 모른다.
차민재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추파를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와 사귀기에는 자신의 주변이 너무나도 위험했다.
레헬이 이를 갈고 쫓는 빌런 일곱 명 전부가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이었다. 최근에 능력을 각성한 버드맨은 아직 레헬에게 밉보이지 않았기에 제외였다.
혹시라도 나중에 정체를 알게 되어도 죽지 않을 만큼의 친분을 쌓으려는 계획적인 인간인 재언은 자신의 손을 잡아채는 차민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재언 씨,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일 년 정도가 지났어요.”
“그러게요… 시간 참 빨라요.”
슬그머니 손을 빼려고 해도 전혀 빠지지 않았다. 차민재가 싱긋 웃으며 붉고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그는 눈도, 코도 예쁜데 그중에서 웃는 입술이 가장 눈에 띄었다.
“나랑 내기할래요? 재언 씨가 한 달 뒤에 나랑 사귈지 안 사귈지.”
“…내기요? 양심 어디 갔어요, 민재 씨?”
세계에서 유일한 복수 능력자인 레드 헬파이어의 능력 중 하나가 ‘예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신재언도 그의 능력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민망한 주제로 넘어가려는 차민재의 말에 재언이 머쓱하게 웃으며 일부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 반응을 모를 리 없는 차민재가 귀여워서 봐준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날카롭게 반응한 자신이 우스워지게 차민재의 미소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또 홀려서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끼를 부리듯 눈까지 찡긋거렸다.
‘아, 진짜 대박 예쁘네…….’
자신을 유혹하는 미소를 짓는 차민재를 따라 헤실헤실 웃기만 하다 화장실로 대피한 신재언은 몰려오는 자괴감에 잠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세간에서는 레헬이 괴짜에다가 빌런과 다를 바 없이 냉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끼가 많고 자신의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여우였다.
일단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세면대에서 손을 닦으며 웅얼웅얼 궁색한 변명을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화장실에는 신재언 혼자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얼굴은 진짜로 취향인걸… 게다가 내 앞에선 착하게 내숭까지 떨잖아. 그게 정말 매력적인 거라고…….”
사실 그보다는 더 위험하고 신경 쓰는 일이 하나 있었다.
“…‘코루루’가 온단 말이지?”
뮤지컬 배우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중인 그녀는 아프리카 남쪽에 위치한 작은 원주민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은 남존여비가 매우 심한 문화가 있는 곳으로 여자는 무조건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밖을 나갈 땐 꼭 남성과 함께여야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터지면 여성을 마녀로 몰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다.
시대착오적이고 반인륜적인 풍습이었지만 워낙 폐쇄된 마을인지라 경찰이나 공직자나 모두 한통속이기에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코루루’는 그런 험한 곳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자신의 일화를 노래로 승화시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은 전설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어 어딜 가든 돈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미국의 한 외신은 그녀를 가련한 여신이라며 추앙했고 또 어딘가에선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와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많은 원주민 여성들의 실태를 알리는 전사로 표현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주 대단한 스타였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한국과 미국에 집을 얻었다는 소식마저도 크게 이슈가 될 정도였다.
이번에 열리는 한국 공연의 티켓팅은 웃돈을 줘도 얻기가 힘들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아주 살벌했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오니 차민재가 카페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했다면 매우 껄렁해 보였을 자세가 화보로 둔갑하였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했다.
신재언이 그의 앞에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지 않을까…….
레헬이 사이코패스라는 기사를 신물 나게 보긴 했지만… 상냥하고 친절한 그는 얼떨결에 자신이 빌런들의 아버지 다크 카오스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넘어가 주지 않을까.
재언은 그의 얼굴에 홀려 정신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카페의 옆쪽 건물에서 복면을 쓴 남자가 손가락을 세우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능력자인지 그가 손가락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이 피를 쏟았다.
“어엇?”
신재언이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남자의 발밑에서 작은 불길이 타올랐다.
“어? 민재 씨?”
신재언은 저 불꽃이 레헬의 능력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이따금 차민재가 그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곤 했었으니까.
카페 안에 있어서 바깥소리가 크게 들리진 않지만, 빌런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발밑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불은 점차 빌런의 종아리로 올라갔다가 머리끝까지 홀라당 태워 버렸다.
“…….”
차민재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빌런을 처리한 뒤 재언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신재언은 그의 모습에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어느새 바깥에는 타 버린 재를 수거하러 오는 히어로 협회 사람들이 모였고 빌런에 의해 다친 시민들을 태우는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