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재언 씨, 무슨 말 했어요?”
“…아뇨.”
빌런을 처리하는 그의 눈동자 안에는 희열과 재미로 가득했었다.
빌런이 나쁜 짓을 하거나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는 것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듯했다. 그저,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게 재밌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도 그랬지. 엔레이드맨을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놀았던 그날, 그는 정말 즐거워 보였었다. 계속해서 재미없는 벌레들만 죽이다가 처음으로 꿈틀거리는 적수를 만나 신난 듯했다.
진심으로 죽을 뻔한 엔레이드맨을 가까스로 빼냈을 때, 그는 우아하고 깨끗한 정장의 옷자락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가 만약 빌런이었다면 세상이 불타고 나라가 망하고…….
차민재의 부모가 올바른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에게 항상 정의롭게 살라고 이야기했다던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배우였다.
어쨌든 부모 말을 잘 듣고 성장한 차민재는 히어로가 되어 합법적으로 빌런들을 죽이고 다녔다. 그야말로 120% 직장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역시 무섭다. 말하는 건 그만두자.’
지금이야 관심 있다며 상냥한 척 접근하지만, 자신이 다크 카오스인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서 무서웠다.
“저, 저 빌런은 왜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서 저런 짓을 한 걸까요.”
하필 그 순간, 그 자리에 레드-헬-파이어가 꼬시는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겠지.
끔찍해서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빌런의 허무한 죽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재언의 물음에 차민재가 바깥을 힐끔 쳐다보더니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어머니의 명령이었다고 하던데요. 다크 카오스 때문에 요즘 개나 소나 부모를 자처하는 놈들이 늘고 있어요. 같잖은 놈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재언 씨와 오랜만에 즐기는 데이트를 망칠까 봐 열 받아서 그냥 죽여 버렸어요.”
‘아… 네…….’
재언은 차민재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너무 좋았지만, 마음은 한걸음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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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이틀을 다 비워 두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차민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에서 내린 신재언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뮤지컬을 보러 정장을 입고 오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격조 있는 뮤지컬이구나 싶어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편하게 입을 옷도 준비하라고 할 땐 혹시 근처의 호텔에서 묵을 생각인가 살짝 긴장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차민재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거대 크루즈를 쳐다보던 재언이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뮤지컬이 크루즈 위에서 열립니까?”
“네, 하루 동안 부산을 거쳐 남해를 돌아다니는 크루즈 위에서 뮤지컬이 열립니다. 제법 근사하지 않나요?”
뮤지컬이나 음악회, 연극을 좋아하는 차민재는 꼬박꼬박 재언을 데리고 다녔다. 신재언 또한 격식 있는 자리를 싫어하지 않아서 기분 좋게 끌려다니긴 했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뮤지컬은 신재언에게 난생처음이었다.
거대 크루즈 앞으로 고급 외제 차 몇 대가 도착하는 걸 보면 평범한 직장인은 구하기도 힘든 자리일 게 분명했다.
그제야 재언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으로 티켓 가격을 검색해 보고 헉-, 하는 소리를 절로 냈다. 신재언의 두 달 치 월급이 티켓 하나 값이랑 맞먹었다.
재언이 티켓 가격에 놀라든 말든 차민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잡고 크루즈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이것 참 기분이 묘했다.
그뿐만 아니라 차민재는 크루즈에 오르는 고객 중에서도 VIP에 속하는지 두 사람의 뒤를 승무원 한 명이 따라붙어 직접 안내를 시작했다.
으리으리한 크루즈는 엘리베이터도 남달랐다. 도금인지 진짜인지는 구별할 순 없지만 반짝이는 금빛으로 눈이 부셨다.
게다가 배 한 쪽에는 바닷속을 구경하면서 수영할 수 있는 수영장,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레스토랑도 딸려 있었다. 뮤지컬이 열리는 선실은 육지에 있는 화려한 극장들과 비교하기 아쉬울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하고 웅장했다.
크기에 비해 좌석 수가 적은 편이지만 그만큼 넓고 편의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신재언과 차민재가 안내받은 VIP석은 벽 한쪽이 유리로 되어 뮤지컬 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룸이었다.
재언은 코루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 연신 감탄하고 있을 때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곳이 정말로 평범한 크루즈였다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 텐데, 여기는 ‘코루루’ 주연의 뮤지컬이 열리는 선박이었다.
불안함을 꾹 누르며 크루즈 시설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하룻밤을 묵게 될 방에 도착한 재언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고급 호텔 그 자체였다.
‘이래서 돈이 좋은 거구나… 내 월급의 몇 달 치가 지금 이 하룻밤에 나가는 거야? 뭐… 세계에서 제일가는 히어로니까, 이 정도는 껌으로 번다는 거겠지. 누구는 하루하루 야근하며 먹고사는 직장인인데. 죽어라 히어로 할만하네.’
속으로 투덜거리는 재언의 뒤에 딱 달라붙은 차민재가 그를 끌어안았다. 재언은 소름이 돋는 걸 간신히 숨기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름답고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차민재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재언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바보 같은 신재언은 이때다 싶게 미끼를 문 생선처럼 열심히 파닥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저항하려 해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무장해제 되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몸과 자신을 꽉 안고 놔주지 않는 팔뚝을 잔뜩 즐겼다.
“재언 씨, 마음에 들어요?”
“네, 너무 좋아요…….”
“매일같이 바쁜 재언 씨 꾀어내려 무리 좀 해 봤어요.”
“와…….”
평범한 직장인인 신재언은 그의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가련한 얼굴로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힘 좀 썼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이미 반쯤은 그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안 돼… 이 남자는 빌런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악독한 히어로야. 딱 친분을 쌓을 정도까지만 허락해…….’
‘근데 빌런을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난 빌런이잖아.’
‘내가 왜 빌런이지? 난 빌런이 아니야!’
마음속에서 자아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언은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차민재의 입술을 받아들인 뒤 떨어졌다.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키스해도 되는 건가? 이 정도는 썸 탈 때 다 하나?
서른한 살의 신재언은 모태 솔로도 아닌데 진도에 대해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전부 차민재가 무섭고 잘생기고 예쁜 탓이었다.
신재언이 차민재의 빛나는 얼굴을 가까이에서 눈이 멀 정도로 쳐다보다가 겨우 떨어진 뒤에야 둘은 짐을 풀었다.
크루즈는 그러고도 한 시간이 지난 뒤에 출항했다. 신재언은 식당으로 가는 동안 차민재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는 거장들을 힐끔거렸다.
저 사람은 유명한 GH그룹의 이사 내외고, 저쪽은 대형 로펌 회장이었다. 저쪽은 검찰 차장……. 아무튼 너무나도 유명해서 기사나 뉴스에 한 번쯤은 이름을 올렸을 법한 거물들이 알은체하며 차민재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게다가 크루즈 곳곳에 A급 히어로는 물론 S급 히어로들도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레드-헬-파이어의 동료들이었기에 가끔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걸어왔다.
“레헬. 누구는 여기서 죽도록 일하고 있는데 누구는 놀러 와 있네. 옆에는 누구야? 네 사이드 킥이 말해 줬던 신 선생님인가?”
껄렁껄렁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인물이 차민재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저런 불량배를 데려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그의 히어로명이 ‘에스트리아’인 것은 그가 놀랍게도 차원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차원 이동한 곳의 힘을 가져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신경 꺼. 죽고 싶지 않으면.”
차민재가 예쁜 꽃처럼 웃으며 박재원에게 속삭였다. 죽인다면 정말 죽일 수 있는 레드 헬 파이어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에스트리아 박재원은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히어로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도 나름대로 히어로 협회 이인자인 굉장한 사람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엔레이드맨만큼이나 강했다. 그의 왼쪽 팔에 끼워져 있는 팸플릿으로 보아 세계적인 뮤지컬배우 코루루의 팬인 듯했다.
“저놈도 웃겨요. 여기 티켓을 못 구해서 의뢰비도 받지 않겠다며 자원해서 경호로 온 거예요. 배 아파서 저 지랄 떠는 거니까 가볍게 무시합시다, 재언 씨.”
“딱히 신경 쓰지 않아요. 저도 민재 씨 아니었으면 이런 곳엔 와 보지도 못하는걸요.”
그저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코루루의 왕팬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연, 세계로 뻗어가는 핫한 뮤지컬 배우였다.
찜찜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재언이 차민재와 뮤지컬 VIP석으로 들어갔다. 각 룸의 복도마다 히어로는 물론 거물급 사람들이 고용한 능력자들이 있어 아주 든든했다.
거기다가 크루즈에는 레드 헬 파이어가 있다. 어떤 미친 빌런이 난동을 부릴 수 있을까.
‘그렇겠지…….’
신재언은 본집에 있는 침대보다 감촉이 수백 배는 좋은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녀는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문제인데… 제발 사고 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이번엔 말을 좀 들어 먹겠지! 정말 걱정이다.’
신재언이 다리를 달달 떨든 말든 공연은 정시에 시작되었다.
이 크루즈에서 공연은 총 세 번 진행된다. 저녁인 지금 한 번, 한밤중에 오페라 룸에서 한 번, 내일 점심에 뮤지컬로 한 번이니 크루즈에 탄 승객이라면 총 세 번의 코루루 공연을 볼 수 있던 셈이었다.
과연, 코루루의 광신도들이 왜 전 재산을 내걸고 크루즈 티켓을 사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