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객석 불이 꺼지고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코루루가 보였다. 그녀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등장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노래와 아름다움에 취했다. 코루루를 보는 신재언의 동공도 박자에 맞춰 열심히 춤을 췄다.
코루루는 그녀의 파트너 역할인 뮤지컬 배우의 연기가 묻힐 정도로 무대를 장악했다. 남해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크루즈 위에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노래에 맞춰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나비가 무대를 수놓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빛 가루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Je Vous implore de me pardonner.”
코루루가 맡은 역할은 가족을 죽인 여자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들이 주는 시련을 하나씩 풀어 나가며 스토리를 이끄는 주인공이었다.
스토리에는 반전 요소가 하나 있는데, 사실 주인공은 가족과 마을 사람 여섯 명을 죽여 악마를 소환하려 하는 악마 추종자라는 것이었다.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가 겪어 온 과거와 주인공의 과거가 상당히 비슷해서 꽤 화제였었다.
나중에 언론사에서 코루루가 도망쳐 나온 마을로 취재차 찾아갔을 땐,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이 왜 잿더미가 되었는지는 오로지 신재언만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재언은 청초하고 가련한 코루루의 연기와 노래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곧이어 신재언이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벌어졌다. 노래를 부르며 연기 중인 무대 위 코루루의 머리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피를 잔뜩 흘린 어떤 남자의 신체가 뚝 떨어졌다.
코루루의 얼굴과 화려한 의상이 핏물로 엉망이 되었다.
“꺄아악!”
코루루가 비명을 지르며 무대 위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허우적거리며 자신의 위에 떨어진 시신을 치우려 노력했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탓에 거구의 남자를 치워 내지 못했다.
객석도 난데없는 시체의 등장에 난리가 났다.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관객의 얼굴에 핏자국이 튀었다.
“으아악!”
“시체, 시체다! 저 남자 죽었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는 관객들 덕에 무대와 객석이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히어로들이 재빠르게 무대 위로 올라가 코루루를 먼저 보호했다.
그중에 가장 빠르게 움직인 건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그는 코루루를 깔아뭉갠 남자의 시체를 치우고 자신의 뒤로 숨겼다.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변한 코루루가 비틀거리며 박재원의 뒤로 숨었다. 잔뜩 겁먹어 하얗게 질린 얼굴에 공포심이 어렸다.
신재언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있는 차민재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결국 ‘그녀’가 사고를 쳤으니 히어로들의 감시를 피할 순 없을 거다.
그녀는 이런 스릴을 즐겼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고 희열을 느끼며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재언 씨, 괜찮아요?”
차민재가 살짝 놀랐는지 재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살인사건보다 수작질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게 딱히 코루루에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다른 의미로 하얗게 질린 신재언의 얼굴을 갑자기 나타난 시체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긴, 이런 크루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것도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 위로 그 시체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아수라장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각자 경호원으로 데려온 능력자들이 상황을 수습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무대 위의 코루루는 에스트리아 박재원의 뒤에 숨어 피가 튄 자신의 얼굴과 옷을 더듬거렸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코루루에게 무언가 말을 걸었다. 아마도 괜찮으냐고 물어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떤 악질 팬이 코루루를 괴롭히기 위해 크루즈에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만약 신재언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그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가엾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신재언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짓는 코루루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흥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가련한 표정으로 돌아가 정신을 잃은 척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신재언은 눈치챌 수 있었다.
시체를 수습하고 사람들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방으로 돌아갔다.
죽은 남자는 마흔네 살의 남성이자 이번 크루즈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은 팀장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썩 좋은 건 아닌지 승무원들을 비롯한 프로젝트 팀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사에 임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죽은 건데 너무 떨떠름해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만약 자신을 괴롭히는 김 대리가 살해당한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했다가 바로 납득했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아무튼 죽은 사람은 뮤지컬이 시작되기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으로 브리핑을 하며 선박 내부를 돌아다녔다는 목격담이 있었다. 그 말은 코루루의 무대 시작 전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소리다.
“기대하던 뮤지컬이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슬퍼요. 재언 씨도 한잔할래요?”
차민재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재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이러면 징그러울 법도 한데 그의 얼굴이 개연성인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민재가 술잔에 술을 따르는 걸 보며 룸에 있는 보드카나 와인이 워낙 고가의 것이라는 걸 알다 보니 이 한잔은 얼마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했다.
술잔을 부딪쳐 술을 한 모금 마시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
“레헬, 레헬 안에 있습니까?”
차민재가 눈을 찌푸리며 껴안고 있던 신재언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크루즈 선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꽤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차민재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건이 또 일어나서……! 살인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이번엔 두 명이나 죽었어요!”
‘…설마? 그녀가 이렇게까지 무대포라고? 그럴 리 없는데?’
이마를 쓰다듬는 신재언의 얼굴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피해자들은 코루루의 의상실에서 죽어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첫 번째 피해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피를 잔뜩 흘린 채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들은 둘 다 크루즈 회사에서 고용한 승무원으로 나이는 서른 살 안팎이었다. 바다 위에서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경호원을 곁에 딱 붙여 놓거나 히어로들에게 온갖 성질을 부렸다.
특히 S급 히어로들이 불평의 타깃이었다. 승객 중에서 꽤 젊은 축에 속하는 남자가 히어로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S급 히어로가 두 명이나 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다니 무능한 것에 정도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손가락은 에스테리아 박재원을 향했다. 저 남자도 레헬의 성질머리를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박재원 뒤에 꼭 붙어 숨어 있는 코루루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쓴 에세이에는 불행했던 과거 때문에 남자들이 소리 지르며 위협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고 적혀 있었다.
코루루가 안절부절못하며 더욱 움츠러들자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눈을 찌푸렸다.
“모든 범죄가 예측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빌런이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무례하게 손가락질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말투는 꽤 정중하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백은 장난이 아니었다. 젊은 재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진상 단골 멘트를 뿌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성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리를 이탈하면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 응해야 할 수도 있고요.”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는 박재원의 말에 젊은 재벌의 얼굴이 볼만해졌다. 신재언은 굳이 나서지 않고 조용히 공기처럼 얌전히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남자 때문에 불가능했다.
레헬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재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레헬이 지금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고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레헬 한 명이 세계 히어로 협회에 등록된 히어로들을 모아 놓은 것보다도 강했다.
게다가 그의 능력 중 하나인 예언으로 미래에 일어난 살인사건까지 막아 주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재언의 어깨에 기대고만 있자 시선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윽고 코루루가 신재언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 빛냈다가 레헬을 보고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녀의 반응을 신재언은 최대한 모른 척하려 애썼다.
“저기, 레헬… 이제 슬슬 크루즈에 잠입한 빌런을 잡아 주게나. 사람들도 다 겁에 질려서…….”
머리도 없고 살이 쪄서 뱃살이 두둑한 중년 남자가 얼굴의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요정처럼 눈만 깜박이던 레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어떻게요?”
“…….”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여기 있는 사람을 전부 불태워 죽일 수도 없고… 나중에 경찰이 범인을 찾아내면 그때 천천히 불에 구워 죽이도록 하지요.”
분명 말투는 나긋나긋하기 짝이 없는데 내용은 상당히 신랄했다. 하긴, 그의 말대로 레헬은 과격파 빌런을 상대하는 데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발동되는 게 아니라서 예지 능력이 발동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신재언이 봤을 때 레헬은 이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재언은 직감적으로 지금 그의 기분이 매우 언짢다는 걸 알았다. 기대하던 뮤지컬도 제대로 못 보고 신재언과의 하룻밤 데이트까지 망쳤단 사실에 몹시 화가 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