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0화 (30/324)

30화

레헬의 대답에 씨근덕거리며 구석에 앉아 있던 아까의 젊은 재벌이 벌떡 일어나 중얼거렸다.

“히어로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협회는 세금이 아니라 의뢰비로 운영되는데 나보고 공짜로 일을 하라는 거야? 내가 저 자식인 줄 알아?”

레헬이 코웃음을 치면서 박재원에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은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얼굴을 붉히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던지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과거사가 에세이로 공개되었을 땐 신문에 날 정도로 떠들썩하게 울어 댔고 공식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뮤지컬 티켓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결국, 무보수로 의뢰비 없이 코루루의 경호를 자원했으니 할 말이 없을 만했다.

레헬의 말에 사람들은 불만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에게 덤비진 않았다.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레헬을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마 레헬이 원한다면 크루즈 자체를 없애 버리고 완벽 범죄를 꾸미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히어로가 무슨 민간인을 죽이겠냐고 하지만 레헬의 잔인한 성정은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았다.

실제로 레헬이 히어로에 적합한지에 관한 문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가 빌런이 된다면 세계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 건드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헬은 얼굴이 잘생겼으니까…….’

레헬은 건들지 못하고 저절로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에 신재언은 눈을 내리깔고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이동할 때는 몇 명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은 해 놨지만, 워낙 인원도 많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많아서 하나둘씩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떴고 어떤 사람은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쉬겠다며 떠났다. 다들 능력자 경호원을 한 명 이상씩 두고 있었기에 제대로 경계만 한다면 걱정할 일이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게 쉽지는 않을걸…….

잠시 생각하던 신재언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차민재에게 말을 건넸다.

“민재 씨.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저도 같이 가요.”

“됐어요. 사람들도 많고. 여차하면 이걸 누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깨에 달린 버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그에게 웃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이 버튼은 레헬이 선물해 준 것으로 위급한 상황일 때 누르면 레헬이 눈앞에서 소환되는 신기한 장치였다.

히어로 협회에서 발명했다고 하는 이 장치는 일회용임에도 억이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위험할 때를 대비해 부자들은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신재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레헬이 공짜로 준 거였다.

민재를 떼어 내고 화장실로 직행한 재언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왜 여기 계신 거죠?”

“…너,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박재원의 뒤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던 모습은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코루루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이내 신재언의 품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안겼다. 자신에게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하는 말에 재언은 머리가 더 아파졌다.

“사고 따윈 치지 않았어요. 저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영광스러운 다섯 번째 자식이니까요!”

“여기에 레헬이 타게 될 줄 몰랐어? 그럼 저 시체들은 대체 뭐야?”

“물론 알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더 짜릿해요.”

세간에는 참혹한 과거를 가진 비극의 여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녀는 요즘 친구들 말을 빌리자면 ‘관종’이었다.

무대 위에서 자신에게 시체가 떨어지게 만든 것도 전부 그녀가 꾸며 냈을 게 분명했다. 오로지 주목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 무대 위 시체는 제가 꾸며 놓은 게 맞아요. 그자는 저를 위해 무대 위에 올라서서 목숨을 끊었으니까요. 저를 더 아름답게 밝혀 주기 위해 죽고 싶어 한 거라고요.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코루루가 아니랍니다.”

코루루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였지만 재언은 저게 연기일 수도 있다는 의심 또한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레헬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연기를 매우 잘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형제 중에서 가장 말도 안 듣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의심에 한몫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재언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진 않는단 점이다. 물론 굳이 말하지 않거나 숨기는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못된 성향은 아직도 고치질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인 척 내숭을 떨지만 사실 그녀는 다크 카오스의 다섯 번째 자식, 거대 빌런 중 가장 악독하다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였다. 평생을 도와주는 이 없이 매 맞고 착취당하다가 마녀로 몰려 산 채로 화형당할 뻔한 것을 신재언이 구해 주었다.

재언에 의해 능력이 발현된 그녀는 가장 먼저 피가 이어진 자신의 남동생을 얼려 버렸다. 남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매 맞는 그녀를 외면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일로 그녀를 마녀로 몰아 사람들에게 배척받게 했다. 그 일로 그녀는 얼굴의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맞았고 뜨거운 쇠꼬챙이로 고문받았다.

남동생을 죽인 다음, 그녀는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얼려 버린 뒤 불에 태웠다.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황홀하게 웃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이후로도 능력 자체는 빙계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사람을 얼린 뒤에 불붙여 태워 죽이는 걸 즐겼다.

당시 막내였던 체어맨이 동생이 생긴 기쁨에 첫 번째로 나서서 그녀를 맞이하며 안아 주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가지는 가족 간의 진정한 유대감에 흠뻑 취했다.

그동안 억압받았던 것을 해소하려는 듯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그녀를 재언은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네가 아니라고?”

“후훗, 누군가가 감히 저 코루루의 무대를 기회 삼아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은데, 감히 아름다운 무대를 망치다니… 그자는 백번 죽어도 모자라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더 큰일이었다. 진짜 살인마가 크루즈에 함께 타고 있으며 이미 무고한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이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조심해. 알겠어? 여긴 S급 히어로가 두 명이나 있어.”

“알아요. 레드-헬-파이어는 엔레이드맨 오빠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는 저를 지켜봐 주세요.”

왜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걸까.

그냥 체어맨을 시켜서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가둬 놓고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크루즈에서 유명인인 코루루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건 그녀가 수상하다는 걸 대놓고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몸을 사리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코루루와 헤어진 신재언이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을 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소란스러워진 사람들을 쳐다보며 차민재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시끄럽죠?”

차민재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통신 장치가 끊어졌고 능력 제한 장치가 걸려 있어요.”

“능력 제한 장치요?”

‘레헬 소환 돌☆’같은 걸 만들어 내는 히어로 협회는 그만큼이나 이상한 것들을 발명해 냈는데, 그중 하나가 능력 제한 장치라는 것이었다.

그걸 능력자가 있는 장소에 설치해 작동시키면 일시적으로 주변의 능력자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기능이었다.

일시적인 데다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실용성이 없어서 레헬 소환 돌보다도 잘 안 팔리는 물건이라고 했다.

차민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들어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화르륵 하고 갑자기 나타난 그의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넘실거렸다.

‘능력이 제한된 게 아닌데?’

민재는 자신의 얼굴과 불꽃을 번갈아 보며 의아해하는 표정의 재언을 향해 미소 지어 주며 대답했다.

“텔레포트 능력이 제한됐어요. 그러니까… 이 크루즈 안에 전부 고립되었다는 소리예요.”

“…다른 능력자들은 능력을 쓸 수 있고요? 그러면 왜 우리를 이곳에 고립시킨 걸까요?”

레헬이 아무리 능력을 제한당해도 그보다 강한 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심기를 굳이 건드리려 하는 살인자들의 행동이 의아했다.

하지만 차민재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 옆을 탁탁 쳤다. 일어서서 올려다보게 하지 말고 앉으라는 뜻 같았다.

자리에 앉으며 자신과 시간 차로 휴게실에 들어온 코루루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에스트리아 박재원의 뒤에 딱 붙어 숨어 있었다. 아무래도 냉기와 제안의 마녀는 이번 희생양을 S급 히어로로 삼은 모양이었다.

‘저러다 사고 치진 않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민재와 눈을 마주하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차민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재언의 어색한 미소에 화답하여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은 믿지만, 그의 성격이나 능력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능력을 사용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너무 얌전했다. 그렇다고 그를 재촉할 수도 없었다. 수틀린다고 어떤 재해를 일으킬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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