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1화 (31/324)

31화

그걸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살인사건이 세 건이나 일어난 크루즈 안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듯 레헬만 쳐다봤다. 그저 S급 히어로인 레헬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묘수를 생각해 내 이런 미친 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레헬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한 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폭발시켜도 되는 거면 제게 맡기시던가요.”

그래, 레헬의 불꽃 능력은 무언가를 파괴하는데 특화되어 사람을 구조하는 일에 쓰기에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레헬은 사람들의 원성과 신재언의 부탁에 주기적으로 크루즈 내부를 돌아다니며 순찰하기로 약속했다.

재언은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을 끌고 순찰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차민재의 뒷모습을 보다가 또다시 코루루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코루루,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레헬에게 뒷덜미가 잡혀 박재원이 끌려가고 혼자 남은 코루루의 옆에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재빠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남성은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얼마나 손을 댔는지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빳빳했다. 피어싱이 귀는 물론 코와 입가에도 주렁주렁 매달린 게 보였다.

패션도 가관이었다. 목에는 검은색의 초커를 손목에는 반짝이는 은구슬이 박힌 밴드를 찼다. 게다가 소매가 찢어진 민소매 검은 조끼에 진한 스모키 화장을 보니 당장이라도 록 음악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유교적 사상에 찌든 한국인 신재언은 이해할 수 없는 패션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한마디 얹을 생각은 없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게 참된 인간의 도리다.

코루루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저 모습이 전부 연기인 걸 아는 재언만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고, 다른 이들은 그녀를 동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냉기와 제안의 마녀라는 거대 빌런인 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시선들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재언은 휴게실 한쪽에 비치된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체이스, 난 괜찮아요. 그것보다 다른 스텝들은…….”

“다들 코루루를 걱정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상큼한 남자의 이름에 놀라기도 전에 그는 코루루와 몇 마디 더 나누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양 볼을 마주 대며 인사를 나누는 둘을 제법 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코루루를 잘 아는 신재언은 그녀가 아주 많이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잔뜩 가녀린 표정으로 힘없이 웃고 있는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체이스와 닿은 뺨을 불쾌하다는 듯 손등으로 닦아 댔다. 다음에 그와 무슨 관계인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

“밤사이 목숨이 붙어 있기를 원한다면 방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굳이 크루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봉사활동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객실에 조용히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화장실이고 물이고 배치된 걸로 견디세요.”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을 해산시키면서 레헬이 한 말이었다. 그는 코루루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이 굉장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히어로는 평화를 위해 싸우고 민간인을 지키는 깨끗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레헬은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돈과 어머니 때문에 히어로 일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길게 얘기하는데 설마 말 안 듣는 빌런보다도 못한 자식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간 지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재언은 빌런보다 못한 놈을 발견했다.

그놈은 레헬이 가지 말라고 했던 아래층 휴게실에서 목을 매단 채 죽어 있었다. 대체 왜 말을 안 들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반나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벌써 네 명의 사람이 살해당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 방에서 나가지 않은 사람,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보안실까지 찾아가 CCTV를 눈이 빠져라 돌려 봤다.

그렇게 망가진 통신시스템을 복구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던 선장과 선원들을 제외하고 가장 의심스러운 네 명이 가까스로 추려졌다.

첫 번째로 의심스러운 사람은 코루루의 전속 의상 디자이너인 서른 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허름한 복장에 피곤해 보이는 퀭한 눈, 얼마나 안 씻었는지 잔뜩 기름진 머리를 한 채로 나타났다.

저런 모습의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코루루의 전속 디자이너인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사실 놀랍게도 그녀는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로 3년 동안 일했던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용의 선상에 오른 그녀, 제임스는 당당하게 큰소리쳤다.

“…뭐요? 물론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피에 젖은 코루루의 모습을 보고 영감이 떠올랐는걸요! 얼른 종이에 옮겨 적어야 하는데 종이와 펜을 깜박하고 무대 대기실에 놓고 와 버렸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코루루뿐만 아니라 이쪽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은 젊은 졸부 남성이었다. 부모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어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케이스였다. 그 탓인지 매우 예민하고 인격에 문제가 많아 진심으로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갔던 그가 한 시간 뒤에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상한 모습이 CCTV 화면으로 전부 확인되었다. 게다가 그를 상시 경호해야 할 능력자 경호원까지 떼어 놓고 홀로 움직였다.

“뭐? 물을 안 가져와서 가지러 갔을 뿐이야. 목이 말랐다고! CCTV에 나와 있잖아. 레스토랑 주방으로 들어가지?”

원래는 카페를 포함해 24시간 운영되어야 하는 레스토랑이었지만 직원들도 다 같이 직원 휴게실에 모여 있어야 하기에 일시적으로 폐쇄한 상태였다.

남자의 말에 다 같이 CCTV 화면을 돌려 보니 그가 주방에서 생수 두 병을 가지고 나오는 게 보였다.

세 번째 용의자는 코루루가 데려온 스텝 중 한 명으로 바로 체이스라는 피어싱을 한 남자였다.

입을 꾹 다문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코루루를 힐끔 쳐다보고는 파르르 떨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녀가 불러서 식당에 간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코루루에게 향했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린 코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체이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시는 거예요? 저를 그곳으로 부른 건 당신이잖아요.”

그렇다. 식당에서, 그것도 하필 CCTV의 사각지대로 향하는 체이스의 곁에 있는 사람이 코루루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녀가 마지막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체이스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전남편도 그런 사람이라더니, 취향이 참 독특해요.”

“이런 상황에서 남자와 단둘이라니, 얼마나 음탕한지!”

긴급상황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코루루는 체이스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의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신재언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화내도 좋으니까 폭발하지만 마! 여긴 S급 히어로가 둘이나 있다고. 그중에 한 명인 레헬만으로도 아주 힘드니까, 제발.’

그녀가 폭발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기에 신재언이 한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아직 정확하지 않은 일로 그녀를 모함하지 마세요. 코루루가 거짓말을 했다고 밝혀진 것도 아니니까.”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립니까?”

“그러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신재언이 중간에 끼어들어 자신의 말에 반박하자 체이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씩씩거렸다.

코루루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물기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참을 수 없었는지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흑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자에스트리아 박재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체이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설령 그녀가 당신을 부른 게 진짜라고 해도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건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의도한 것 아닙니까? 그곳에서 코루루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말해 주시죠.”

코루루의 열렬한 팬인 박재원은 아까부터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의 열정적인 팬심은 박수받아야 마땅하지만 히어로인 그가 빌런인 그녀를 두둔하는 광경에 재언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레헬이 끼고도는 신재언과 S급 히어로 박재원이 코루루를 편들며 중재에 나서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이 용의자 네 명 중에서 가장 행동반경이 불확실하고 알리바이도 없는 사람은 코루루의 전속 디자이너인 제임스였다.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공범의 존재 확률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쳤다.

“일단 저 여자를 방에 가둡시다!”

“뭐? 누구 마음대로 날 가둬. 어디서 싸구려 영화라도 보고 온 거야?”

사람들의 말에 제임스가 소리치며 저항했다. 어느새 보안실 여기저기서 싸우고 고함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수라장이 된 그곳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던 재언은 벽을 더듬거리며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그를 부축하며 민재가 말을 걸었다.

“재언 씨, 괜찮아요?”

“아… 예. 그냥 뮤지컬 보러 왔다가 이게 무슨 난장판인지 모르겠어요. 뜬금없이 살인사건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레헬이 바로 옆에 있는데 사람을 죽인 빌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대담한 건지, 멍청한지 잘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혼란한 사람들에게 프랑스계 한국인 선장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건넸다.

“제어 프로그램이 완전히 망가져서 배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동으로 전환해도 키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통신이 전혀 안 됩니다. 선박은 지금 남해를 벗어나 해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중입니다. 내일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구조신호를 보내도 먹통이고… 꼭 누군가가 자기장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선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승객들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뒤쪽에 있는 선원들의 표정까지 어두운 것을 보니 일이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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