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2화 (32/324)

32화

이번에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능력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갑판을 돌아다니며 살피더니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동안 사람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고 이 자리에 있는 건 차민재와 신재언 그리고 용의자로 지목된 네 명과 갑판을 살펴보고 온 히어로 세 명이었다.

“선장님 말이 맞았습니다. 돌아보는데 자기장 같은 전기 막이 크루즈 전체를 막고 있어요. 그 때문에 배가 완전히 고장 난 겁니다. 게다가 자기장이 파동을 흩트려 놔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어요.”

이러다가는 크루즈가 허가도 없이 다른 나라의 영해를 침범하게 생겼다. 능력자가 있는 선박이기에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범인을 잡아 고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모두가 고민에 빠져 잠깐 정적이 흐르던 중 용의자로 지목됐던 젊은 재벌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여기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면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지 확실하게 말해! 너희는 히어로들이잖아!”

히어로 세 명 중 대표로 나선 남자는 히어로 협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B급 히어로였다. 그가 젊은 재벌의 무례한 언행에 잠시 울컥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대한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만큼 커다란 자기장을 유지해야 할 정도면 범인도 체력소모가 많이 됐을 겁니다. 빌런을 찾아 저지하면 크루즈를 둘러싼 자기장도 사라질 테니 제어시스템도 복구될 것이 분명하고요.”

“그 범인이 누군데. 체력소모가 많이 됐다고? 그러면 피곤해 보이는 저 여자밖에 없겠군. 저 여자가 여기서 가장 그런 면상이잖아.”

“뭐라고요? 당신 말 다 했어? 따지고 보면 댁 얼굴도 그렇게 썩 펴 있진 않거든?”

제임스의 반박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확실히 젊은 재벌의 말대로 쌀쌀한 바닷바람을 쐬는 바람에 코끝이 빨개진 그녀의 낯빛은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가장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전날 밤까지 잠도 못 자고 코루루의 의상을 제작했다고 하니 안색만으로 그녀를 범인으로 몰고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밤에 나와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조금 무섭구나. 앞은 컴컴하고 아래에서는 물소리가 찰랑거리니… 여기서 괴물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진짜 무서울 것 같은데.

재언은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실없이 웃었다. 사실 코루루가 걱정되는 것만 제외하면 난리가 난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이 아주 느긋하고 태연했다.

그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크루즈에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 그가 하지 말라는 짓만 안 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데, 부자들의 머릿속은 역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문득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담요를 걸쳐 주는 민재에게 살짝 웃어 주고 말을 걸었다.

“민재 씨, 범인이 누구 같아요? 정말 저들 중에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차민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추리를 못 해요, 재언 씨. 그래서 누가 범인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다만 확실한 건, 재언 씨는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와, 진짜 멋있다.

사이코패스여도 역시 히어로는 히어로였다. 눈부신 미남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하는 소리에 재언은 반쯤 마음이 넘어갔다.

차민재의 얼굴에 홀린 신재언이 해롱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떤 능력자인지 이렇게 커다란 크루즈를 조종할 수 있고, S급 히어로의 눈을 피해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는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 없는 악독한 놈이었다. 내일이면 안전하게 육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 코루루가 울먹이며 싸우는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끼리 의심하고 분열하는 걸 빌런을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지금, 싸우는 것보단 힘을 합쳐 피해자가 더 나오는 걸 막아 봐요.”

“코루루씨…….”

제임스와 젊은 재벌이 머쓱한 표정으로 떨어졌다. 둘 다 코루루의 말에 감명받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코루루가 울먹이는 표정을 거두고 힘없이 미소 지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가녀려 보였다.

겁에 질린 상황에서도 용기 내 싸우는 사람들을 중재시킨 훌륭한 사람을 코루루가 연기하고 있던 그때, 선실을 순찰하고 돌아온 에스트리아 박재원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이쪽도 연락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아무래도 이 능력자, 쉽게 볼 놈은 아닌 것 같다. ‘다크 카오스’의 ‘일곱 자식’들과 맞먹는 능력자가 분명해.”

박재원의 추리가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다크 카오스’의 ‘일곱 자식’ 중 한 명이 듣고 있다는 게 큰 문제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녀리고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코루루가 섬뜩할 만큼 눈을 번뜩이며 박재원을 노려봤다.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라는 자부심과 자기애가 강한 그녀는 감히 자신들을 두고 다른 빌런과 비교하는 누군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신재언은 그런 코루루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티 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스트리아 박재원만 있다면 코루루 혼자 상대해도 별걱정은 안 하겠지만, 레헬이 더해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에게 자식들 여덟 명이 전부 덤벼도 이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언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을까. 매섭게 변했던 코루루의 표정이 다시 나긋나긋하고 청초하게 바뀌었다.

자신의 근처엔 왜 이렇게 겉과 속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밖에 없을까. 새삼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어쨌든 급한 불을 껐다는 생각에 그는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그것도 잠시,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났다. 용의자인 네 사람을 히어로들이 쉴 틈 없이 감시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해자는 코루루와 합을 맞춰 무대에 오른 뮤지컬 배우로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무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멋대로 이탈하지 말라는 부탁을 어째서 듣지 않았던 건지 정말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스텝들과 다른 뮤지컬 배우들은 그녀가 매우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이라 멋대로 방에서 나와 돌아다닐 리 없다고 울면서 증언했다.

이 일을 조사하던 레헬을 비롯한 히어로들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범인은 한 명이 아니야. 그때 알리바이가 없는 유일한 사람 네 명을 모아 놨던 건데 그들은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어. 공범이 몇이나 되는진 모르니까 승객 전원을 의심해야 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승객들이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순찰 범위도 쓸데없이 넓어져. 딱 범인들이 원하는 대로라고……. 이번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게 강제로 모아 놔야 해.”

“말을 들을까요? 제 좋을 대로만 살아온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지. 벌써 다섯 명이나 죽었어.”

말을 이으면서도 박재원의 걱정이 담긴 눈빛은 코루루에게만 고정되었다. 같은 동료가 죽었다는 충격에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가는 상황에 히어로들은 강경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차민재와 함께 방으로 돌아온 신재언은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격식 있는 뮤지컬을 관람하겠답시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더니 너무나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갑판에서 바다의 짠 기가 남아 있는 바람을 계속 맞았더니 온몸이 찝찝했다.

재언이 화장실에서 잘 때 입으려고 챙겨 두었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검은 카디건에 검은색 운동복 바지를 편하게 갖춰 입은 차민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복장을 편하게 입어도 눈이 부실까, 의문이었다.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민재는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웃었다.

“좀처럼 일이 안 풀리네요. 좋자고 온 곳인데…….”

“네… 어쩔 수 없죠, 뭐. 하하하… 다만 사건이 끝나지 않아서 월요일에 정상 출근하지 못하면 수당이 좀 많이 깎이는데… 그러면 카드값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회사는 사원이 아무리 빌런들의 테러에 휘말려도 무급휴가로 처리하는 데다 수당을 엄청나게 깎았다. 외국계 회사라더니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여기저기에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한 탓에 카드 요금이 많이 나올 예정인데 큰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사건이 해결되면 좋으련만…….

레헬을 두고 다른 히어로에게 부탁하기도 애매하고 하필 코루루가 용의자 중 한 명이어서 감시받고 있는 통에 그녀에게 따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히어로들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를 생각이지만 재언은 기회가 생기면 조각난 장난감을 꺼낼 작정이었다.

옷을 갈아입었으니 간단한 짐을 챙겨 차민재를 따라 오페라 홀로 향했다. 크루즈 관람객과 선원을 포함해 약 오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한 곳에 있기에는 이곳이 가장 크고 넓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홀에 난민처럼 자신들을 욱여넣은 것에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방에 혼자 있다가 빌런들에게 죽는 것보단 지금이 훨씬 나을 텐데도 말이다.

재언은 모여 있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 않아 레헬을 비롯한 히어로들이 무대 뒤편에서 저들끼리 상의하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와 에스트리아 박재원, A급 히어로 세 명, B급과 C급 히어로가 각각 다섯 명이었다. 모아 놓고 보니 인원이 상당했다.

게다가 저명하신 승객들이 경호원으로 데려온 능력자까지 합치면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수가 비등비등했다.

이 와중에 오페라 홀 위에는 커다란 눈이 박혀 있는 동그랗게 생긴 석상이 둥둥 떠다녔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의 능력으로 승객들 사이에 숨어 수상한 짓을 하려는 자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때 혼자 떨어져 앉아 있는 신재언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코루루였다.

무대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새하얀 원피스로 갈아입은 코루루는 재언의 옆에 바짝 붙어 애교부리듯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려놨다.

눈엣가시 같은 레헬이 신재언의 곁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가온 것이다.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 대체 저런 포악한 남자의 무엇이 좋아서 함께 있는 건가요? 게다가 저 남자는 엔레이드맨 오빠를 그렇게 만든 자식인데…….”

진심으로 이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입이 열한 개 정도 될 때쯤에 슬쩍 ‘얼굴이 예쁘잖아.’하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코루루는 신재언이 레드-헬-파이어와 핑크빛 기류를 날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언이 아무 말도 없자 그녀의 두 눈이 뾰족하게 변해 갔다.

재언은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어로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나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자.”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대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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