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레헬과 박재원은 범인들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용의자로 지목된 네 명 중에 진범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공범일 뿐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코루루의 머리 위로 떨어진 첫 번째 피해자 때문에 범인을 추리하는 게 난항이었다.
박재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으로 코루루를 찾았다. 그는 불행한 과거를 가진 코루루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반했다.
세간에 그녀는 매우 성품이 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착한 노력형 인간이었다. 자신이 주연인 뮤지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속으로 힘들어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탓에 코루루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박재원은 그녀가 홀로 울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런 박재원의 앞에 서 있는 레헬은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히어로면서 위험에 빠진 민간인을 구하는 것에 의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박재원이 생각하기에 레헬은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그가 한마디 거들었다.
“야, 차민재… 저 신 선생님이라는 양반도 인질인 거나 마찬가진데, 힘 좀 적극적으로 써보지 그러냐.”
그러자 차민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손가락에 끼워 위아래로 튕겼다.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문방구에서 이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요요였다.
저거 나 초등학생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구해 온 거야.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박재원은 자신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이쪽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차민재의 행동에 눈을 찌푸렸다.
박재원은 껄렁껄렁한 외모와 말투와는 달리 히어로라는 직업에 사명감과 책임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게 재능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탓에 S급 히어로 중에서 가장 빈곤했다.
S급 히어로는 의뢰비가 가장 비싸고 쉽게 움직이지도 않아 고용하기가 쉽지 않은데 박재원은 곤경에 빠진 사람들만 골라 거의 무보수로 일해 주곤 했기 때문이다.
차민재가 요요를 손으로 잡았다가 바닥으로 튕기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뒤지고 싶지 않으면 그에게는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야.”
그래, 이런 놈이었지!
마치 자기 것에 손대려는 천적에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하는 맹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박재원은 속으로 화를 삭이며 한걸음 물러났다.
저 신 선생님인가 뭔가 하는 일반인 앞에선 나긋나긋하고 상냥하게 지켜 주겠다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더니. 자신에게는 말을 걸기만 해도 쥐어 잡을 정도로 살기를 뿌리고 있다.
이놈 싹수가 이렇게 노란 걸 신 선생님도 알아야 할 텐데!
그는 성격 더러운 차민재 놈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 오페라 홀은 자신과 레헬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빌런 녀석들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박재원이 이를 갈며 뒤를 도는 순간, 오페라 관람석 가장 앞쪽 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가자 타이밍 좋게 무대 위로 육중하고 딱딱한 것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쿵! 하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고 떨어진 게 누군가의 시신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혼비백산했다.
익숙한 얼굴의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야당 국회의원 박모철이라는 자였다. 오십 대 중 후반의 남성으로 가족들과 함께 크루즈에 승선했던 그는 승객 중에서 능력자 경호원을 가장 많이 데리고 다니던 자였다.
그가 고용한 경호원들은 모두 A급 히어로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보호를 받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것도 잠시, 곧이어 총소리가 오페라 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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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언은 깜짝 놀라 몸이 잔뜩 굳었다.
총소리에도 놀랐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총알이 빙글빙글 돌며 궤적을 그리고 있어서 더 놀랐다. 총알을 감싼 살얼음이 마치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공기의 수분을 얼려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 낸 코루루가 잔뜩 험악한 표정으로 무대를 노려봤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이 비명으로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기에 다행히 코루루의 능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무대 위에서 재언에게 총을 갈긴 이는 마치 좀비처럼 관절을 이리저리 꺾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침을 질질 흘리는 흉한 모습을 한 그는 아까 무대 위로 떨어진 국회의원 박모철이었다.
일부러 신재언을 향해 총을 겨눈 건 아니고 무차별적인 총격에 운 나쁘게 맞을 뻔했던 것 같았다.
‘럭키 가이’라는 능력이 울겠네! 여기선 우연히 총알이 전부 빗나가야 맞는 거 아니야?!
재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휘청거리며 서 있는 좀비, 박모철을 예의 주시했다. 아몬드 모양의 무언가가 씨앗처럼 이마에 박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을 까뒤집고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상태에서 비틀비틀 걷는 자세가 심상치 않았다. 복부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것이 아무리 봐도 산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꺄아악! 괴물이야!”
“도망쳐!”
해괴망측한 시신의 모습에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입구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히어로들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막아 봤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을 말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들은 괴물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길 원하지 않았고 만류하는 히어로들을 밀치고 홀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입구가 혼란에 빠졌다.
신재언은 그 사람들보다는 침착한 태도로 무대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좀비를 살폈다. 분명히 죽었을 게 분명한데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움직이다니,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뛰어다니는 것도 백번 천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언은 아까 날라왔던 총알이 더 무서웠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오금이 바짝 저릴 정도로.
“다들 안으로 들어가세요! 뿔뿔이 흩어지면 더 위험합니다! 그게 범인들이 바라는 일이라고요!”
“비켜! 저런 괴물 따위하고는 한시도 같이 있을 수 없어!”
아무리 히어로들이 말려도 공황 상태가 된 사람들을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박재원은 공포의 원인을 쓰러트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했는지 높은 오페라 홀의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크게 도약해 허공에서 화극(火戟)을 소환했다.
끝에 날개가 달려 화려하게 생긴 창을 한 손으로 잡은 그가 팔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빛의 결정이 쏟아졌다. 저것이 박재원이 차원 이동했던 ‘에스트리아’라는 판타지 세계에서 가져온 신무기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존중하고 싶었는지 매섭고 날카로운 공격에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싸움의 쌍시옷도 잘 모르는 일반인도 박재원이 좀비의 이마에 있는 무언가를 노린다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재언의 생각에도 저 씨앗처럼 생긴 것이 시체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궤적을 그리는 그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빛이지만 흩뿌려지는 빛의 결정들이 실로 연결된 것처럼 보여 눈을 사로잡았다.
저래서 그가 공격하는 영상들이 인기가 많은 듯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신재언조차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만큼 훌륭한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박재원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좀비가 무차별적으로 쏴 대는 총을 두 동강 낸 뒤 이마에 달린 것을 산산조각 냈다. 좀비의 머리통이 터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힘 조절을 해 가면서 공격한 덕에 깔끔하게 그것만 부서졌다.
이윽고 박모철의 신체가 기괴하게 꺾인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육신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부패 진행 상태가 상당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에 죽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시체까지 이용하는 테러범들의 목적이 무엇일지 아직도 감이 안 잡혔다.
묘하게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찜찜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재언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두들겼다. 뒤를 돌아보니 코루루였다.
“아버지, 지금이 기회에요. 저 눈엣가시 같은 레헬을 따돌리고 밖으로 나갑시다.”
“하지만…….”
재언이 살짝 머뭇거렸다. 자신이 사라지면 분명 레헬이 마구잡이로 능력을 사용하며 찾으러 다닐 게 눈에 선했다.
크루즈 안에서 엄청난 열기를 자랑하는 그의 불꽃 능력이 사용되면 힘없는 비능력자들이 다칠 수가 있었다.
그가 능력을 사용해 일을 망친다면 커다란 이슈가 될 건 자명했다. 그리고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게 밝혀지면 평범한 자신의 일상은 영원히 안녕이었다.
나중에 정신없어서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사과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레헬의 곁에만 붙어 있으면 코루루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코루루는 악명 높은 거대 빌런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 뮤지컬 배우였다. 세간의 이목과 집중을 병적으로 좋아하다 보니 천재 뮤지컬 배우로서 성공한 자신에게 흠뻑 취해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런 그녀를 혼자 남겨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게 걱정이었다. 재언은 그녀가 빌런 짓을 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조금 더 오래 하기를 바랐기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