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잠시 고민하던 재언은 일단 코루루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아무도 없는 크루즈 내부로 들어가 복도를 걷는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쫓았다.
“아버지의 곁에 언제나 다른 형제자매들이 있어서 독차지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저 코루루를 믿고 일을 맡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위대하신 아버지께서도 제가 가장 사랑스러우시지요?”
‘힘들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신재언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색한 미소 그 자체였지만 콩깍지가 씐 코루루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였다.
사실 그녀는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터라 의외로 가장 말을 안 듣는 자식이었다. 물론 코루루가 한 일들은 모두 위대하신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게 오랜만이라며 양손을 꼭 모아 잡고 눈물을 가득 매단 채 활짝 웃었다. 감정이 복받쳐 오른단 사실을 증명하듯이 그녀의 주변에 얼음 결정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재언은 그녀를 데리고 아무 방이나 문이 열리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재언에게 정신이 팔린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수라장인 상황에서 저렇게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코루루와 자신, 그리고 S급 히어로들을 제외하고 그놈들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저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한 명? 아니 발소리는 한 명이 아닌데… 두 명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집중했다. 그런 재언을 따라 코루루 역시 문에 귀를 가져다 대며 신이 난 듯 중얼거렸다.
“후후, 아버지 이거 참 재미있네요. 마치 첩보 영화라도 찍는 기분이에요.”
“쉿.”
어느 순간 발소리가 끊겼다. 확인할 겸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 열어 내다본 신재언이 깜짝 놀라 그대로 멈췄다. 바로 놈들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도 못 한 광경에 놀랐지만 다행히 괴한 두 명은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시 닫는다고 움직이면 들킬 것만 같아 재언은 문을 열어 둔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계획대로군. 멍청한 히어로 놈들. 우리 손에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흐흐흐… 레드-헬-파이어라는 놈도 별것 아니군!”
“소리를 낮춰. 언제 일이 틀어질지 몰라… 아직 방심하긴 일러……. 그 괴물 같은 놈이 언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라고.”
‘어라, 이 목소리는…….’
두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바람에 얼굴을 확인하는 게 힘들었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면 두 사람 중 하나는 바로 재수 없는 젊은 재벌이었다.
이놈이 공범이었구나!
예상하지 못했던 범인의 정체에 숙이고 있던 상체가 휘청거렸다. 자세를 바로잡으려 힘을 줘 봤지만 실수로 발을 잘못 디디고 말았다.
어이쿠, 할 새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고 넘어질 뻔했다. 문고리를 잡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나쁜 놈들 앞에서 꼴사납게 뒹굴 뻔했다.
어째서 자신의 능력인 ‘럭키 가이’는 이럴 때만 제대로 발동되지 않아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열린 문의 문고리를 잡고 있으니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든 신재언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둘의 얼굴을 관찰했다. 한 명은 예상한 대로 젊은 재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제법 눈에 익은 무대 스텝이었다.
“뭐냐……! 이 자식.”
“헉, 코, 코루루……!”
둘 중에 젊은 재벌이 먼저 코루루를 보고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신재언을 매섭게 노려보던 무대 스텝도 그녀를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도 어정쩡한 자세로 문고리를 잡고 있던 신재언은 슬며시 숙인 허리를 펴고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묘하게 돌아가는걸……. 나한텐 그렇게 살벌한 표정만 짓던 녀석들이 코루루를 보자마자 안색을 바꿨어. 마치 코루루의 열정 팬같이 보인단 말이야.’
그들은 신재언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코루루에게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직 당신이 나올 차례가 아닙니다. 당신은 가장 마지막에, 우리의 죄를 사하고 가장 아름다울 때 나타나야 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눈이 간 거 같은데? 눈탱이가 아주 많이 돌아 버렸다고……!’
그들은 재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젊은 재벌이 품 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재언에게 휘둘렀다.
나이프를 능숙하게 다루는 자세는 아니어도 그는 복부를 정확하게 노리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신재언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이 그대로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손이 왜 갑자기 유리처럼 금이 가 부서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하다. 사람을 얼리는 건 코루루가 가장 잘하는 짓이었다.
재언이 고개를 돌려보니 코루루의 주변으로 새하얀 얼음 결정들이 나풀거렸다. 그녀의 허벅지부터 가슴, 쇄골, 왼쪽 뺨까지 푸른색의 얼음 결정들이 피부에서 드러나 문신처럼 나타났다.
그녀가 능력을 쓸 때마다 보이는 주문 같은 문신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가진 특징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눈치챈 시점에는 이미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때였다. 고혹적인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간 코루루가 손가락을 갖다 대자 빨간빛을 띠는 얼음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변했다.
언제 봐도 참으로 무서운 능력이었다.
“위대하신 아버지, 그 더러운 놈들이 아버지의 옷자락 한 올이라도 건든 건 아니겠죠?”
코루루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펄펄 뛰었다. 반면에 재언은 사람이 눈앞에서 얼음이 되었다가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해 버리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려 잠시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정신 차린 그는 발밑에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 들었다. 손잡이 부분에 해골 모양이 각인된 이상한 나이프였다.
“이게 뭐야? 이걸로 사람들을 죽인 건가?”
나이프 날을 만지작거리다가 실수로 검지 끝이 살짝 베이고 말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따가운 감각에 손가락을 확인하니 한 줄로 예리하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써는 나이프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날카로웠다. 손가락을 문질러 피를 닦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이프를 살피는 코루루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신재언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이리저리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뮤지컬 소품이잖아요?”
“뮤지컬 소품?”
그 말은 저들은 이번 뮤지컬의 소품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워낙 크루즈 안에 쟁쟁하고 저명한 사람이 많았기에 당연히 살인자들이 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저지른 게 아닌가 싶어 계속 그런 쪽으로만 생각했었다.
“네 뜻은… 지금 여기에 침입한 괴한들이 크루즈 전체를 무대 삼아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지?”
“네, 맞아요. 아버지, 이곳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의 내용을 기억하시나요?”
공연이 중단되긴 했지만, 대충은 기억했다.
어느 마을에 한 여자가 있었다. 신을 모시는 신관인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그래도 그녀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신을 모셨고, 사람들에게 상냥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악마가 밤마다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는 그녀에게 여섯 명의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고 속삭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목을 베는 것을 시작으로 제물을 바쳤다. 그 뒤에는 어머니와 남동생의 심장을 차례로 찔러 죽였다.
그리곤 이웃집으로 찾아가 이웃 주민의 복부를 찌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그의 아내를 뒤에서 찔렀다.
마지막에는 지나가는 한 노파의 목을 베었다. 이제 악마가 깨어나야 했지만 사실 마지막에 죽은 노파는 그녀가 모시던 신이라 제물이 될 수 없었다.
신은 그녀의 처지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쏟았고 한때 자신이 총애하던 신도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녀는 평생 죗값을 치르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녀는 신에게 감사했다. 그대로 지옥문에 빠져 악마에게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의 용서에도 여자는 결국 또다시 죄를 범하고 말았다. 자신의 목을 잘라 직접 마지막 제물이 되어 의식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악마가 깔깔거리며 아름다웠던 두 영혼을 가지고 지옥으로 돌아간다.
여기까지가 뮤지컬의 전체 내용이었다. 코루루는 여기에서 여자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했다.
“잠깐… 그러면 지금까지 몇 명이 죽었지?”
“저를 위해 죽은 남자까지 다섯 명이요.”
그것도 한통속으로 친다면 말이지…….
피해자들의 상처를 자세히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마지막에 오페라 홀에서 발견된 사람이 등을 찔렸는지의 여부는 알 수 있었다.
이마에 씨앗 같은 게 박혀 있던 박모철 의원은 등에 상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는 소리였다.
‘복잡하네… 도대체 사건 몇 개가 얽혀 있는 거야?’
아주 골치가 아픈 사건에 휘말린 듯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재언이 이마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위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크루즈가 크게 휘청이며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