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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35화 (35/324)

35화

재빠르게 몸을 숙여 중심을 잡아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넘어져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위층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신재언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코루루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버지께서 나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올라가서 확인할 테니 아버지께서는 느긋하게 구경하시며 제 활약을 지켜봐 주세요.”

“뭐? 잠깐, 코루루, 녀석들이 원하는 게 아무리 봐도 너 같은데…….”

범인들이 정말 이 거대한 크루즈를 무대 삼아 뮤지컬 내용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마지막에는 여주인공이 필요할 것이다. 아까 그 두 녀석이 말한 내용으로 보아 여주인공은 당연히 코루루일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노려질 것이 분명했다.

재언은 이 거대한 크루즈를 자기장으로 감싼 능력자가 그녀보다 강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었다.

‘…엔레이드맨을 부를까? 아니, 레헬이 그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러면…….’

신재언이 고민하는 사이 코루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올라가 버렸다. 일단 급한 대로 재언은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냈다.

오랜만에 푹 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눈알이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지금 코루루가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 그녀가 위험하면 마약왕을 불러와.”

여섯 번째 자식인 마약왕은 솔직히 말하자면 신재언이 자식 중에 능력을 각성시킨 것을 가장 후회하는 놈이었다. 코루루와 마찬가지로 건실한 사업가로서 대외적인 직업을 가진 그는 사실 이탈리아 마피아 보스 마약왕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해 코루루와는 성격이 상극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지위와 권력은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조각난 장난감이 눈알을 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허공에 둥실 떠올라 사라졌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자신보다 다른 자식들이 나서서 돕는 게 일이 빠르게 해결되곤 했다.

그때 누군가가 신재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강한 힘으로 끌어 안겨져 등 뒤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재언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방을 밀어내기 위해 팔을 들었다가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에 힘을 뺐다.

“재언 씨, 괜찮습니까? 걱정했잖아요. 대체 이런 곳에 왜 오신 겁니까? 위험하게…….”

레헬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엄청나게 놀랐네!

재언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는 사이 차민재는 걱정했다는 말이 진짜였던 듯 꼭 끌어안은 팔을 한참 동안 놔주지 않았다.

늘 여유롭고 나긋나긋한 얼굴을 하던 그가 잔뜩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묘한 죄책감에 휩싸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코루루가 향한 곳에 레헬이 없다는 뜻이니 다행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신재언은 일단 지금은 차민재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로 했다.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온 그를 떨쳐 놓을 수도 없고, 일단 그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대충 사건의 내막도 알아냈겠다 코루루가 올라갔으니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결론지어질 것이다. 자신은 뒤에서 걱정하는 척 구경이나 하면 된다.

“아까 폭발음은 뭐였죠?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박재원이 범인을 추려 냈습니다. 코루루가 사라진 걸 알고 모습을 드러낸 테러범들과 교전 중에 있습니다.”

하긴 신재언과 코루루가 눈치챈 걸 베테랑 히어로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들도 이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겠지.

어디까지 눈치챘는진 모르겠지만 히어로들이 나섰으니 더욱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민재가 재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크루즈 4층에 위치한 휴게실로, 두 명의 히어로가 이미 안쪽에서 쉬고 있었다. 폭신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순간 갑자기 바깥이 조용해졌다.

바로 그때, 얌전히 앉아 있는 신재언의 손바닥으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었다. 그녀가 코루루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눈알을 자신의 오른쪽 눈에 집어넣었다. 조각난 장난감의 능력이었다. 이렇게 보면 멀미가 심해서 평소에는 바닥을 스크린 삼아 봐 왔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 별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조각난 장난감의 시야가 드러났다. 재언의 명령을 받아 크루즈 내부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갑판 위에서 에스트리아 박재원과 남자 세 명이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왼쪽 어깨에 빛의 날개가 펼쳐지고 오른쪽 눈가에 날개 같은 것을 가면처럼 쓰고 있는 박재원의 모습이 참으로 화려했다.

‘전에 TV에서 에스트리아라는 세계는 날개를 사용해 마법을 부리는 곳이라고 하더니. 딱 그런 느낌이네.’

재언은 박재원에게서 눈을 떼고 그와 대치 중인 테러범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세 명 중에 복면을 쓴 한 명만 멀쩡하게 서 있었고 양옆에 서 있는 둘은 박모철이 그랬던 것처럼 팔다리의 관절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도 아몬드 모양의 씨앗이 박혀 있었다.

저자가 뭔지 모를 씨앗 같은 것을 이용해 시체를 조종하는 모양이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제대로 얼굴을 볼 수는 없었고, 체격이 제법 건장하다는 것 말고는 특징적인 게 없었다.

잘 싸우는 그들을 두고 조각난 장난감은 여동생인 코루루를 찾기 위해 이동했다. 이윽고 갑판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가에 있는 코루루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는 누군가와 대치 중이었다.

“왜 계속 나를 무시하는 거야, 코루루! 나는 널 사랑하는 남자고 당신은 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플로라이잖아!”

그는 코루루의 밑에서 일하는 스텝, 체이스라는 남자였다.

“뭐라는 거야? 오타쿠 같은 놈이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어. 안 그래도 내가 널 유혹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서 짜증 나는데.”

코루루가 빈정거리며 체이스의 말을 비웃었다. 재언이 생각했을 때도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코루루를 범인으로 몰리게 만들질 않나, 그녀가 자기를 유혹했다는 망상을 하질 않나, 정말 몹쓸 남자였다.

갑자기 남자의 몸에서 파지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이제 보니 저 피어싱을 주렁주렁 단 말라비틀어진 남자가 크루즈 전체를 자기장으로 감싼 전기 인간이었다. 진한 화장으로 피곤한 인상을 숨겨 왔던 것이다.

“이제 제물은 다 모였어, 코루루. 네 목이 잘리면 우린 악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할 수 있어. 너도 좋지? 너도… 날 사랑하잖아. 눈이 마주치면 웃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줬잖아…….”

‘이래서 스토커들이란…….’

재언이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저렇게 찌질하고 망상에 빠져 사는 사람이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체이스는 대외적으로 아무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인 코루루가 자신의 능력을 보고 겁을 먹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온몸에 서서히 나타나는 문신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때, 고개 숙인 채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재언의 곁에 차민재가 다가왔다. 이 뒤가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레헬을 앞에 두고 조각난 장난감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레헬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눈알을 꺼내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민재 씨? 무슨 일 있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어디 아픈가 해서요.”

“아… 그냥, 속이 조금 울렁거리고 멀미가 나네요. 상황이 좀… 그러잖아요? 하하…….”

어색하게 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민재와 함께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다른 히어로 두 명은 다른 승객들을 살펴보러 가고, 신재언과 차민재는 위쪽의 상황을 보고 오기로 했다.

신재언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능력자였지만, 레드-헬-파이어가 히어로 두 사람 이상 몫을 할 정도로 강하니 무서울 건 없었다.

어느새 갑판 위에는 박재원이 세 구의 시체들을 나란히 눕혀 놓은 채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마에 박혀 있는 아몬드 모양의 씨앗 때문에 제법 고전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언은 코루루를 찾으러 식당가로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불이 활활 타오르는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체이스는 코루루가 즐겨 쓰는 잔혹한 방법으로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루즈를 감싸고 있던 자기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체이스 그자가 이 거대한 크루즈를 자신의 능력으로 가둔 것이다.

‘이상하네. 정말로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자기장이 사라지자마자 선장과 선원들이 가장 가까운 항구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나중에 조사로 알게 된 것이지만, 주동자는 체이스이며 그와 채팅으로 만난 남자 네 명이 공범이었다. 체이스를 포함해 네 명은 죽었고, 공범인 남자 중 한 명을 잡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박재원과 대치하던 복면 쓴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를 잡는 것은 이제 히어로들의 일이라 재언이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건에 휘말린 것 자체가 재언은 매우 피곤했다.

코루루는 체이스와의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체력소모가 상당했는지 한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잠만 잤다. 세간에서는 그녀의 스토커들이 크루즈의 비극을 불러일으켰다고 신나서 떠들어 댔다.

재언은 이번 사건이 그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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