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6화 (36/324)

36화

피곤해… 죽을 것 같아.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어.

이제 막 출근했는데 이렇게까지 피곤할 일인가?

딱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니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어야 쉬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루루의 뮤지컬을 보려다 이상한 테러에 휘말려 주말을 통으로 날려 먹은 바람에 월요일 아침이 죽을 맛이었다.

출근하고 한참을 책상 위에 엎드려 있으니 자신의 위대한 동기 최윤정이 곁으로 다가왔다. 다음 달부터 출산휴가를 받을 예정인 그녀의 배가 저번보다 더 커진 느낌이었다.

그녀가 재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약을 꺼냈다.

“비타민 좀 먹을래, 재언 씨? 몰골이 말이 아닌데… 우리 나이를 생각해서 달렸어야지.”

“그러게요… 그렇지만 이건 정말 불가항력이었어요…….”

진심으로 재언은 조용히 살고 싶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챙겨 준 건 고마운 일이라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마친 재언은 비타민 약 하나를 입에 물고 삼켰다. 건강을 챙긴답시고 영양제를 바리바리 챙겨 먹긴 했다.

하지만 사실 퇴사하는 게 가장 건강에 가장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월요일이 와 버렸어요.”

그때,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잔을 한 손에 든 옆 부서의 남 사원이 가까이 다가와 인사했다.

남무혁이라는 이름의 그는 신재언과 자리가 가까워 자주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신재언에게 삼 대 몇을 칠 수 있냐고 대뜸 목적어 없이 물어오는 등 제법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들어 보니 그는 평일은 물론이요 주말까지 헬스장에서 지내는 운동광이었다. 키는 신재언보다 조금 작아도 몸이 아주 단단하고 두꺼웠다.

그리고 유명한 아이돌의 팬이라고 사내에 자자했는데, 어찌나 사랑이 지독한지 그의 책상에 해당 아이돌의 사진과 MD로 가득했다. 신규 앨범이 나오는 날에는 CD를 회사에 돌리기도 했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CD를 70장 정도 살 수 있겠어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굉장히 지극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무혁 씨…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월요일이라 힘이 없다기엔 정도가 심한데.”

갸웃거리며 던진 윤정의 질문에 재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남무혁은 운동과 아이돌만 있으면 아무리 힘든 월요일이어도 상쾌한 얼굴로 출근하는 남자였다. 지금껏 그를 봐온 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기운이 없는 건 운동을 못 하는 상황이라거나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유는 후자 쪽이었다.

“옐리가 마약 복용 의혹으로 조사 중이래요.”

옐리는 그가 좋아하는 color’s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가장 인기가 많은 비주얼 담당을 맡고 있었다. 신재언도 그들이 출연한 예능프로그램 몇 개를 본 적이 있었는데, 다들 상큼하고 발랄하고 귀여워서 인상적이었다.

이제 막 인지도가 올라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신인일 텐데 마약 사건에 휘말리다니.

신재언이 커피를 홀짝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럴 애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요? 아니… 아직 소속사 공식 입장도 안 떴으니까 희망을 가져야겠죠……. 그때까지는 응원하고 싶어요. 제발 오해이길…….”

“뭐… 나중에 제가 위로주 한 잔 살게요, 무혁 씨.”

업무시간이 다 되어서야 무혁이 풀 죽은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중얼거리며 그녀 또한 자리로 돌아갔다.

“요즘 마약 사건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우리나라가 마약 유통이 쉬워졌나 봐요. 어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고 보니 출근하는 길에 들은 뉴스에서도 마약 유통의 심각성에 관해 토론했었던 것 같았다. 대한민국이 마약 청정지역이라고 했던 소리는 이제 다 옛말이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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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결국 재언은 타 부서인 남무혁을 위해 술자리를 가져야 했다.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소속사의 공식 입장과 멤버 옐리의 사과문이 떴기 때문이었다.

옐리의 사과문에는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며, 자숙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남무혁은 술을 마시는 내내 굉장히 슬퍼하며 눈물을 질질 흘렸다. 그를 위로하느라 술도 제대로 못 마신 재언은 술값을 내고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봐 남 사원, 차 가지고 왔습니까? 정신 좀 차려 봐요.”

“으, 으어어… 이게 누구야! 우리 회사 얼굴 신재언 씨가 아닌그아아……. 우리이… 부서까지… 잘생긴 신 씨라고 소오무운이 났다구우…….”

“남 사원. 주소 이거 맞아요?”

남무혁의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우리 예엘리이이가… 마약을 할 리 없는데 진짜 이상하다. 허어엉. 크흥… 이거 다 모함이에요……. 세상 사람들… 이거 모함이에요. 크헝.”

무거워 죽겠네! 헛소리해 대는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고!

하필 안주로 치킨을 골라서 몸에서는 기름 냄새까지 풍겨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일 출근은 어쩌려고 이렇게 마신 거야? 좋아하는 아이돌 때문에 정신 나간 건 알겠지만, 이쪽에 피해 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재언은 씩씩거리며 택시를 골라잡아 겨우 남 사원을 태워 보냈다.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해 준답시고 택시비도 미리 결제해 주었다.

근육 덩어리인 사람을 어깨에 둘러업고 걷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다. 한숨을 푹 쉰 재언은 집에 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아, 이런… 핸드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핸드폰이 어디에도 없었다. 깜박 잊고 술집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큰길만 보고 왔던지라 어디였는지 술집 위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난감했다.

결국, 술집을 찾아 길을 헤매다 골목을 잘못 들었는지 인적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곳으로 들어와 버렸다. 번화가에 사람이 많았던 술집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었다.

뭐라도 튀어나올 분위기라 재언은 겁에 질린 채 얼른 온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옆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서 뛰어나온 사람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다.

소리 낼 틈도 없이 뒤로 나자빠진 재언은 자신의 엉덩이를 받치는 손목에 다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 부딪친 남자의 목을 졸라 죽였다.

“조각난 장난감! 아무리 화가 난다고 이런 일로 사람을 죽여서야…….”

신재언이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식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말을 잘 듣는 이가 조각난 장난감이었다. 그녀는 허튼짓하는 법이 없었고 신재언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자식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천히 다가가 시체를 살피니 한 손에 권총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민국에 권총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신재언은 시체가 된 남자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부딪혔다고 죽이려고 했던 쪽은 상대방이 먼저였던 것이다.

역시 조각난 장난감이 섣불리 움직일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총을 쏘려고 했던 것일까 싶어서 시체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방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주워서 살펴보니 종이에 싸인 하얀색 가루와 인슐린 주사기였다.

딱 봐도 수상하다고 티를 내는 물건이라니…….

게다가 저도 모르게 물건들을 맨손으로 주워서 살펴봤다. 신재언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떨결에 물건들을 종이가방 안에 챙겨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조각난 장난감이 손써서 시체는 잘 치워 주겠지만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을 주운 것 같은 기분이 흠씬 들었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테이블 위에 종이가방을 올려 두고 욕실로 직행했다.

샤워도 하고 심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 내고자 화장실 청소까지 깨끗하게 하고 나와서 또 부지런히 집 안 정리를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온 그는 종이가방을 앞에 두고 침대 위에 앉았다.

딱 봐도 마약이고 어딜 봐도 수상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막장인 상황에 재언은 혀를 차며 머리를 굴려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단, 가장 간단한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다.

하지만 신고해 버리면 골목길에 있‘었’던 시체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면 마약보다도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 방법도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뻔했다.

바로 그의 자식 중에 마약에 일가견이 있는 마약왕에게 부탁하는 일이었다. 웬만해서는 이 선택을 하고 싶지 않기에 일단 이 물건을 숨겨야 할 듯했다.

재언은 체어맨을 불러 문을 열어달라고 한 뒤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자식들이 발견하면 엄청나게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별장에 있는 ‘위대하신 아버지의 방’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그나마 여긴 다른 녀석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해서 조금은 안심이었다.

재언은 방을 돌아보다 침대 밑에 마약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테이프로 붙여서 숨겼다. 부끄러운 물건을 부모님 몰래 숨기는 학생이 된 것 같아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그래도 한숨 돌렸다.

꼼꼼하게 잘 숨겼는지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이번에도 출근은 망했다.’

훌쩍이며 새벽에 잠들었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출근한 신재언에게 남무혁이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

“어제는 추태를 부려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하하, 민망하네요… 택시비까지 계산하셨던데 이것…….”

“아닙니다. 어제는 제가 위로해드린다고 부른 거였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재언은 그가 건네는 돈 봉투를 물렸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자리로 돌아가는 남무혁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제 있었던 사고를 떠올렸다. 그 덕분에 남무혁이 했던 짓은 진상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힘들어 보였지만 남무혁의 자리에 있는 아이돌 MD나 포스터가 조금 줄어 있었다.

이 정도면 회사 동료로서 할 수 있는 도리는 끝났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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