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창밖을 쳐다보는 신재언의 한쪽 손에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바깥에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
최근 야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을 느꼈고, 밤에 자는 동안에는 현관문을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현관 앞에 누군가가 있는 듯한 느낌에 며칠째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잤다.
근데 또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하면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보이지 않게 숨어 버렸다. 아직 피해를 본 게 아니라 아리송했다.
저놈들이 평범한 직장인인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잘 알 수 없어서 일단 모르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생활했다.
그렇게 낯선 자들에게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은 지 일주일 후, 재언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겨우 잠이 들었다가 중간에 깨고 말았다.
“위대하신 아버지, 이 자들이 감히 아버지의 집에 침입하여 위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우매한 자들이 많을까요. 위대하신 아버지께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잡아서 피부를 벗겨 죽여 버려요. 형님, 누님들! 위대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이자들을 쉽게 풀어 주어선 안 됩니다.”
중후한 목소리의 체어맨,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귀신들의 성녀, 이번에 새로 자식이 된 젊고 어린 목소리의 버드맨이 신재언의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뿐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두 명이 구속되어 무릎 꿇고 있었다.
너희는 대체 누구야……?
수상한 복면을 쓰고 한 손에는 권총, 다른 한 손에는 수상한 액체가 묻은 손수건을 든 남자들이었다. 딱 봐도 사람을 납치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보여 주는 중이었다.
설마 이 좁은 집에 이런 거대 빌런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막힌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소리치고 있었다.
팔 대신 달린 날개깃을 단단하게 만들어 칼처럼 쓰는 버드맨이 팔을 들어 올렸다. 재언은 자신의 집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에 벌떡 일어나 팔을 휘저었다.
“잠깐… 잠깐만! 이게 무슨 일이야? 일어나자마자 대체 이게 무슨…….”
얼떨결에 잠에서 깬 신재언은 어떻게든 제정신을 챙기려 애썼다. 피곤한 육체가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지금 상황에 머릿속이 멍하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버드맨이 헤실헤실 웃으며 재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자들이 창문 유리를 깨고 들어와 감히 아버지를 납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버드맨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는지 괴한들의 얼굴을 냅다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어억!”
“악!”
신체 어딘가가 부러지는 소리에 등골이 송연했다. 재언이 빠르게 팔을 휘저어 폭력을 멈추게 했다. 그래도 나름 재언의 말이라면 잘 듣는 모양인지 곧바로 얌전해졌다.
원래는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다. 또래 친구들에게 심하게 괴롭힘 받는 중에도 증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던 착한 소년이었는데, 지금은 증오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재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드맨은 베란다로 나가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며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마약왕처럼 능력을 각성시킨 걸 후회하지 않길 빌어야지 뭐…….’
재언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주변을 살폈다.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놓인 상황이 조금 무서웠다.
집 안을 둘러보니 정말로 베란다 창문이 깨져서 잠금장치가 풀려 있었다. 저번의 귀신소동 때 깨지는 바람에 돈 들여서 교체했는데, 또 돈이 나가게 생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생돈을 나가게 만드는지 너무나도 억울해서 괴한들에게 다가가 조금 거칠게 복면을 벗겼다. 그런데 드러난 얼굴은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들이었다.
이런 놈들이 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려고 잠입해서 납치하려고 드는지 잘 모르겠다.
빌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괴한들의 모습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하던 재언은 일단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데려가 놈들의 목적을 알아보기로 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간 신재언은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는 괴한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있는 빌런들을 보고 놀란 걸 보면 자식들에게 볼일이 있어서 침입한 건 아니겠고, 정말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침입한 것 같았다.
자신은 대외적으로 별로 나올 것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일 텐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재언은 문득 저번 주에 있었던 사고 같은 일이 떠올랐다. 골목에서 부딪친 총 든 남자, 그가 떨어트린 마약…….
‘마약!’
그제야 재언은 자신이 어떤 일에 연루되었는지 깨달았다. 그 수상해 보이는 가루약 때문일 가능성이 아무리 봐도 99.9%였다.
체어맨과 버드맨이 그들을 고문하러 지하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재언이 고민에 빠진 사이 둘은 손발이 짝짝 맞아 어느새 괴한들에게 원하는 진술을 모두 들은 상태였다.
재언은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손으로 이마만 짚었다.
역시 괴한들은 신재언이 예상한 대로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남자를 찾는 놈들이었다. 그 남자는 마약 공급의 중간 브로커이자 언더 보스였는데, 조직을 배신하고 마약을 빼돌려 한국으로 도망쳐 왔단다.
당연히 조직에서는 배신자를 찾기 위해 괴한들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사이 배신자는 서울 어느 골목길에서 재언과 마주쳤고 재언을 죽이려 총을 들었다가 되레 죽었다.
배신자를 턱밑까지 쫓아 왔던 이들은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그를 발견했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수색해도 마약은 없었고 상황을 보스에게 알렸다.
보스는 그깟 푼돈 같은 마약은 필요 없지만, 조직의 배신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며 그 시체라도 가지고 오라 했다.
그러자 이 두 놈은 배신자가 빼돌린 마약에 욕심이 생겼다. 보스는 푼돈이라고 했지만, 1g당 가격이 꽤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것만 찾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재언이 마약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으니 주변에서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곧바로 그들은 CCTV를 해킹해 단 한 번이라도 골목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조사했고 일주일간의 추격 끝에 가장 유력한 이를 추려냈다. 그게 바로 신재언이었다.
사건의 정황을 들은 재언은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CCTV고 증거고 조각난 장난감이 손봐서 흔적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훼손된 CCTV를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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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알례리는 유명한 이탈리아 사업가였다. 나이는 서른다섯으로,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매력적인 외모의 남자였다.
마피아를 조부로 둔 그는 자수성가하여 훌륭한 사업가로 유명했지만, 실상은 마피아 조직을 물려받아 지금도 악랄하게 활동 중이었다. 제법 커진 사업 규모에 돈세탁도 쉬워서 그에게는 세상에 무서울 게 전혀 없었다.
“벌레 한 마리가 여기저기 물을 흐리고 있다던데, 아직도 못 잡은 건가?”
알례리는 자신의 부하가 무능력한 것을 매우 싫어했다. 과거에 형제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더욱 심해져 이용 가치 없는 부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렸다.
그의 부하들은 보스를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며 두려워하면서도 경외했다. 자신을 엿 먹인 배신자 때문에 알례리의 기분은 급격하게 하강했다.
게다가 배신자가 죽어 버렸고 얼간이 같은 민간인이 마약을 빼돌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알례리는 이 쓸모없는 새끼들을 다 갈아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에 이를 벅벅 갈았다. 그런데 그 민간인을 찾았다는 소식을 끝으로, 한국으로 간 부하들의 송신이 끊겼다.
누군지 걸리기만 하면 그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부하들은 마약왕 알례리에게 밉보인 그 민간인을 마음속으로 동정했다. 부하들을 모두 물리고 사무실로 들어온 알례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알례리의 사무실은 누구도 쉽게 출입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자식들조차 이곳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멋대로 침입한다면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알례리의 사무실에 멋대로 들어온 인물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알례리는 자신 이외의 사람이 소파에 앉거나 물건을 만지도록 두고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알례리는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발등에 이마까지 댔다.
“위대하신 우리 아버지,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이렇게 허름한 곳에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아버지이…….”
얌전히 눈을 내리깐 것으로도 모자라 펑펑 울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평소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뒤로 넘어갈 만한 태도였다.
소파에 앉은 사람은 체어맨을 이용해 이탈리아까지 온 재언이었고, 알례리는 빌런명 마약왕으로서 그의 여섯 번째 자식이었다.
신재언은 있는 대로 과장되게 행동하는 알례리의 반응에 벌써 머리가 아팠다.
여덟 명의 자식들이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강하지만, 알례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다.
하지만 그는 늘 이렇게 과장되게 행동하다가 자신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코루루보다 더 골치 아픈 놈이었다.
재언은 품 안에서 이전에 주운 마약과 주사기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신재언이 무슨 짓을 해도 알례리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향해 있었다.
“이게 뭔지 보여?”
“오… 이건… 마약입니다. 아버지, 위대하신 당신의 육체에 이런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걸 팔고 관리하는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