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8화 (38/324)

38화

알례리에게는 그저 사무실일 뿐이었지만 재언은 이곳이 조금 무서웠다. 사방에 총은 물론 이상하게 생긴 해머와 검이 벽마다 장식되어 있었다. 대체 해머 끝에 달린 가시는 용도가 무엇인 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례리는 자식 중에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이로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도 그가 돈으로 지은 별장이었다.

그리고 신재언이 괜히 각성시켰다고 후회하는 유일한 자식이기도 했다. 그 또한 처음 만났을 땐 이러지 않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례리의 가문은 대대로 마피아 보스를 계승하는 전통적인 마피아 가문이었고, 그는 그곳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 사이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자식들에게 떳떳할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마피아 같은 범법행위로 버는 돈이 아니라 당당하게 벌어 가족을 부양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가문을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운 방향으로 굴러가는 듯했던 사업이 어느 날부터 마치 누군가가 방해하는 듯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막대한 빚만 남은 채 사업을 접게 되었다.

그는 도저히 생계를 이뤄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금전이 궁핍해지자 결국 자진해서 뛰쳐나온 가문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가족을 버린 그를 가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슬하의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알례리는 온갖 잡일과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모자랄 것 없이 자라 왔던 그가 난생처음 겪은 실패와 추락은 사람을 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풍족하고 행복하게 지내 왔고, 얼마나 많은 기회가 주어졌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결국, 알례리는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 브로커가 되어 빈민촌에 팔아넘기는 걸로 돈을 벌었다. 꽤 수입이 짭짤했기에 아내와 자식들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생활할 수 있었다.

매일 탁한 오트밀에 호밀빵 한 조각으로 버티는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자식과 아내를 보며 버텨 냈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조금씩 행복을 찾는 중이었다. 이렇게라도 살아가고 싶었다.

누군가가 알례리의 집을 은밀하게 폭로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지 모른다. 마약 브로커라는 직업에 만족하면서 나중에 자식들이라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달라고 무릎을 꿇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빗소리 사이에 총소리가 섞여 사라졌다. 알례리와 가족들이 사는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저택이었는데 그곳에서 돌연 총격전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오, 제발. 제발 가족들만은 살려 주세요, 안 돼!”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진 아내와 가슴에 총을 맞은 둘째 아들을 감싸 안고 알례리가 비명을 토해 냈다. 사방에 피가 흩뿌려져 있음에도 아직 저 짐승들은 총을 들고 또 다른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알례리의 비통에 찬 절규와 비명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다행인가? 아니, 알례리는 차라리 가족들과 함께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저놈들에게 복수하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마피아 가문의 일원이 아닌 알례리는 너무나도 약하고 보잘것없었다. 겨우 노숙자 신세를 면하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었다.

‘악마라도 좋으니 내게 힘을 줘. 당신이 무엇이라도 다 줄 테니 내 가족의 복수를 하게 해 줘!’

알례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그 순간, 정말로 하늘이 그의 기도에 부응했는지 눈앞에 신이 나타났다. 신이라기엔 아주 젊은,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검은색 우산을 들고 주변의 분위기에 전혀 녹아들지 못하는,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젊은 청년은 우산을 쓴 채 한숨을 크게 쉬더니 위협적으로 자신을 겨누는 남자들을 힐끗 쳐다봤다. 알례리와 눈을 한번 마주하고 그의 품 안에서 싸늘하게 죽어 버린 아내와 아들을 보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청년의 곁에 열여섯 살 정도 된 어린 소년이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청년은 비에 전혀 젖지 않았다. 아무리 우산을 쓰고 있어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조금이라도 물방울이 튀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비가 피해 가기라도 하는지 아주 멀쩡했다.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

열여섯 살이나 되는 소년을 자식으로 둘만큼 나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은 청년이 눈동자를 한참 굴리더니 알례리에게 말을 걸었다.

“복수하게 도와줄까요?”

“인간이… 아닌가?”

“저기요. 저 인간 맞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돌아다닐 뿐이지. 어떻게 해드릴까요? 이대로 그냥 죽을래요, 아니면 내 손을 잡고 힘을 얻을래요?”

“…그러면 넌 악마인가?”

“…….”

젊은 청년이 얼이 빠진 얼굴로 알례리를 쳐다봤다.

‘악마라니……. 내 대사가 또 틀에 박힌 악당이 할 법한 대사였나?’

크게 충격받은 듯 젊은 청년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가 아무리 자신은 빌런과 연관이 없고 악당도 아니라고 우겼지만, 그의 자식들이 봤을 때 그는 이미 충분히 훌륭한 악당이었다.

그렇게 알례리는 신재언의 손을 잡았고 가족을 잃은 증오로 능력을 각성했다. 그에게 신재언은 지옥에서 자신을 유혹하러 온 악마이기도, 하늘에서 구원하러 내려온 신이기도 했다.

알례리의 사업을 망치고 그걸로도 모자라 마약을 구매하는 빈민촌 사람들에게 그의 주소를 뿌린 건 첫째 형인 레비아노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알례리는 형제들을 죽이고 가문을 모조리 먹어 치운 뒤 반항하는 놈들을 자비 없이 전부 죽여 버렸다.

거기까지는 집안싸움이기도 하고 본인이 해야 할 복수에 해당하기에 재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알례리가 마약사업에 손을 댔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뭐, 아무리 후회해도 무엇 하나, 자신이 선택한 사업인데…….

이대로 죽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옆에서 단단히 감시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골목에서 어떤 남자와 부딪쳤는데 이걸 떨어트리더군. 조각난 장난감이 아니었다면 이놈 총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어.”

“역시 셋째 누님이십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런 고초를 겪으셨다니.”

알례리의 상심한 표정에는 마치 본인 손으로 배신자를 처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이 자식아! 네가 보낸 부하들도 나한테 이상한 약을 타서 납치하려고 했거든!’

보면 볼수록 무서운 남자였다. 만약 신재언이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정말로 길 가던 일반인이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알례리가 재언의 앞에선 온갖 내숭을 다 떨면서 벌벌 떨지만,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낸 적도 있었다. 그를 잡는다고 미국의 특수부대가 투입됐다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애먼 도시 사람들과 말단 조직원들이 죽었다.

그동안 마약왕은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마약왕의 활동지역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유럽 쪽이었기에 이렇게 한국에서 그의 영향을 확인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라고 해 봤자 반성하는 척만 하는 녀석인데 내 입만 아프지. 일단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귀찮게 구는 일은 없을 거야. 계속 붙들고 늘어지면 오히려 반감을 사서 아주 귀찮아질 수도 있고.’

반감이라고 해 봤자 신재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는 건 아니지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골머리를 썩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멀쩡했던 외국의 마을 하나가 마약쟁이 소굴이 되었기에 버럭 화를 냈더니 사죄한답시고 브로커들의 손목을 잘라 바친 놈이었다.

‘깨끗한 검은 상자에 담긴 손목들을 보고 기절할 뻔했지.’

기겁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재언의 표정을 보면서 하는 말도 가관이었다.

“저와 아버지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놈들인데 손목 두 개로 싸게 쳐 준 겁니다.”

“이번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겨 그쪽으로는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나의 아버지여.”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아버지라고 불리고 싶지 않거든.’

그보다도 마약왕이 말한 ‘골치 아픈 일’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이탈리아 블랙 마켓을 장악한 마약왕은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다. 많은 외국 정부가 많은 희생을 내서라도 잡고 싶어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입으로 곤란한 일이라고 하는데,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골치 아픈 일?”

원래는 조직의 상부 외에는 알면 안 되는 극비인 일이지만 위대하신 아버지께 말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알례리에게는 제아무리 대단한 일도 아버지의 앞이라면 길가는 돌보다도 못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유럽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마약왕이 넙죽 엎드리며 대답했다.

“정체불명의 약이 관리하는 시장과 클럽에 유통되었습니다. 중독성이 강해 끊을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는데, 장기간 복용하면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게 됩니다. 중요한 건, 약을 먹다가 죽으면 시체에서 씨앗 같은 게 이마에서 자라는데, 그것이 시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듯합니다. 시체가 좀비같이 움직인다고 해서 좀비 마약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알례리의 말을 듣던 신재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말한 것들이 코루루의 뮤지컬이 열렸던 크루즈 안에서 목격했던 시체와 매우 유사했다.

알례리가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좀비 마약의 출처를 밝혀내는 덴 성공했지만, 뒷배가 누구인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도망간 배신자의 처리를 알베르트에게 맡겼는데, 그가 완벽하게 해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시길…….”

“그렇게 화가 난 건 아니야. 그러면 이번 일은 해결된 거라고 알고 있을게. 다시 내가 휘말리는 일이 없었으면 해.”

“네. 위대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넙죽 엎드려서 재차 절을 한 알례리가 품 안에서 검은색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그는 틈날 때마다 검은 십자가에 입을 맞추곤 했다. 그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신재언이 헐레벌떡 체어맨의 문으로 들어갈 때까지 마약왕의 고개는 절대로 들지 않았다.

재언이 모습을 감추고 문까지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알례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미약한 분노와 짜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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