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일이 해결되긴 했지만 찝찝한 기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찝찝함을 자세히 알아볼 겨를도 없이 신재언의 일상이 폭탄 맞은 것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신인 아이돌 멤버 옐리가 적발된 것을 시작으로 마약 때문에 연예계가 떠들썩해졌다. 외국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모델들이 대거 마약에 연루되어 경찰서가 북새통을 이룰 정도였다.
그와 관련해 회사가 바빠진 이유는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의복의 모델이 마약으로 걸려들어 가계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작가 초빙부터 기획, 홍보, 촬영까지 전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해당 모델은 이제 막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신인이라 그가 이런 중요한 시기에 도대체 왜 마약에 손을 댔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대의 자금이 오간 큰 계약이었기에 종일 회사가 떠들썩했다.
프로젝트의 기획을 맡은 최윤정이 돈가스를 입에 문 채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그놈도 진짜 미친놈 아니야?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마약을 해서 잡혀가다니! 기가 막혀서 나 참!”
“뭐… 두 배나 되는 계약해지 손해배상금을 낼만큼 돈이 남아도나 보죠……. 우리는 또 난리 나겠지만.”
“지금이라도 잘못 알려진 거라고 기사가 나왔으면 좋겠어. 비행기 표도 이미 다 예매해 놨는데…….”
이번 일이 윤정의 올해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이제 그녀는 다음 달이면 출산휴가로 회사에 일 년 동안 없을 예정이었다. 긴 휴직 기간을 가지고 돌아오면 다시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언은 이번 프로젝트에 책임자로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보조처럼 이것저것 도와주었기에 이번 일이 무산된 게 진심으로 아쉬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의 활력을 되찾아 줄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에 회의실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뒷모습이 제법 늘씬하니 보기가 좋았는데 우는 중인지 어깨가 들썩거렸다.
‘저 등짝… 어디서 많이 봤는데…….’
신재언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저… 누구십니까? 여기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어? 이상현 씨?”
놀랍게도 그는 이번 마약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계약 해지가 예정된 모델 이상현이었다. 그는 195cm나 되는 큰 키에 늘씬한 몸, 속쌍꺼풀이 있는 날카로운 눈이 모여 매력적인 분위기를 내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후줄근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울어 대서 퉁퉁 부은 눈이 썩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어깨가 들썩거렸다.
“…저기, 왜 이런 곳에서 울고 계십니까?”
“제가… 허엉… 안 했어요. 전… 흐헙, 마약, 안 했어요. 정말 억울해서 찾아왔어요.”
지금 보니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이상현이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TV를 보자마자 이쪽으로 달려온 듯했다.
신재언은 슬그머니 주변을 살폈다. 회의실은 통유리라 안쪽이 훤히 보인다. 실제로 이상현을 발견한 게 그 덕분이었다.
마약 때문에 사내 직원들 입에 온종일 오르내리는 그가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더 나쁜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울고 있는 그를 데리고 재언은 휴게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어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그를 의자에 앉힌 다음 냉수를 따라 주며 물었다.
“이봐요, 상현 씨. 무슨 소리예요, 대체? 마약을 한 적 없다니…….”
잘못한 게 있으면서 무조건 발뺌하는 스타일인가.
재언의 미심쩍은 시선을 읽었는지 이상현이 손수건을 움켜잡았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손수건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정말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끅끅거렸다.
“저도 지금 제가 흑,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고 있다고요. 제가 왜 흐윽… 끅. 이런 중요한 때에 마약 같은 걸 하겠어요. 전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 미치겠어요. 허어엉… 진짜 마약 안 했어요. 제가 미쳤다고 그런 거에 손대서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뻥 차 버리겠냐고요.”
“하지만… 증거가 발견됐다고 하던데요. 뉴스에서도 그렇게 보도하고 있고…….”
“다 거짓말이에요. 절 음해하려는 모함이라고요! 그 여자, 그 여자 때문이에요. 허어엉… 진짜 억울해요…….”
하긴, 그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억울해 미쳐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도 청구할 손해배상금액이 못해도 십억 가까이 될 것 같은데, 이십 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인데 조금 안타까웠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왜 마약을 했냐고 묻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그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연기라기에는 너무나도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안타까운 마음이 슬쩍 올라온 신재언이 눈동자를 굴려 그를 살폈다.
‘…증오는 없네. 이 상황이 그냥 엄청 억울하고 슬플 뿐이구나. 음… ‘그녀’라는 단어를 말할 땐 일시적이지만 증오가 보였어. 흐음…….’
신재언은 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푹 숙인 이상현의 손등을 톡톡 쳤다.
“이봐요, 상현 씨. 일단 지금은 업무시간이니 집에 가서 쉬고 있으세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저하고 술이라도 한 잔하면서 얘기 좀 나눠요.”
“…허엉. 당신, 끕… 당신도 날 음해하려고? 그 여자도 나한테 술 한 잔하자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밖에 없어… 내 술에 약을 탄 건!”
재언은 흥분해서 횡설수설하는 이상현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건물 밖으로 배웅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 맞는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신재언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역시 이럴 때 가장 도움 되는 건 조각난 장난감뿐이었다.
“조각난 장난감, 얘기는 들었지? 그를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해 와. 만약 그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한 거라면, 우리 회사 동기를 위해서 도와줘야지.”
신재언의 손바닥 위에서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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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리로 돌아온 신재언은 가장 급한 클라이언트 계약 건의 진행을 끝낸 뒤, 진상 대머리 김 대리가 맡아 놓은 작업도 모두 끝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오후 여섯 시였다.
그런데도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김 대리를 사회에서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했다.
겨우 막대한 양의 업무를 끝낸 신재언은 손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들어온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온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현은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온 뒤 공중화장실로 들어가 또다시 삼십 분가량을 울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던 건지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치다가 겨우 진정하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은 그의 모습에 택시기사가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 거 잘생긴 총각, 애인이랑 헤어졌슈? 세상에 여자가 반이야. 그렇게 울지 말어.
- 허어엉… 허어어엉…….
울지 말라면 더 울고 싶고 달래 주면 더 속상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택시 안에서 이상현은 어느 때보다도 자지러질 듯이 울었다.
택시에서 내려 그가 향한 집은 꽤 낡은 건물의 원룸이었다. 벽에 자신이 모델로 나온 포스터들과 선배 모델들의 사진으로 가득한 집이었다.
바닥 한 구석에는 라면 그릇이 나뒹굴었다. 그는 커다란 키에 맞지 않은 좁은 침대에 털썩하고 앉더니 또다시 멍하니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의 발치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띠링 하고 울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고 액정이 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약 사건을 확인하고 던져 버린 듯했다.
휴대전화 화면을 보니 그의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의 프로필 사진과 대화 내용을 보아하니 다들 농촌에 살면서 이상현을 뒷바라지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좋은 계약을 땄다는 소식을 알렸는지 가족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가족들은 아직 마약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한 듯했다.
‘이런, 진짜 불쌍한걸? 반나절 내내 저 모양인 걸 보면, 정말 억울한 사건이 맞나 보군.’
몰랐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사정을 알아 버린 이상 신재언은 이 불쌍한 청년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몇 번 고민하다가 결국 이상현에게서 받아 낸 전화번호로 통화를 걸었다.
- 네, 이상현입니다…….
다행히 그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다 갈라지고 잔뜩 어두운 게 이대로 계속 혼자 두면 상을 치를지도 몰랐다.
“아까 회사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지금 OO로터리 쪽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상현 씨 사정을 좀 듣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