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인간의 질투란 끝이 없어서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상현과 알고 지내는 형과 누나는 상현의 성공에도 축하해 주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현을 무시하고 왕따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안면을 싹 바꾸고 축하주나 마시자고, 그동안 샘이 나서 그랬다며 사과를 해 왔다.
이상현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과 술자리를 가졌고, 그곳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형과 누나가 아는 사람이라며 소개해 준 그녀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그들 말대로 여자가 지인들과 제법 친근해 보여 이상현은 경계를 금방 풀었다. 팔다리가 길고 키도 크고 예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외국 모델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외모였다.
재미있게 놀다가 이상현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술자리에 지인들은 없고 그 여자만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걸 이상현에게 마시라며 건네줬다.
순진한 이상현은 맥주잔을 받아 한 번에 절반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마침 술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이상현은 꼼짝없이 마약에 연루되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이거 참… 뭐라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
일반인이라면 믿기 힘든 이야기에 재언은 기가 막혀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가 저렇게까지 경계하며 맥주를 입에 대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꼴이 났는데 평생 술 같은 건 입에 댈 엄두가 안 날 것이다.
이상현은 설명을 끝내고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눈물만 뚝뚝 흘렸다. 정적이 흐르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신재언은 생각에 잠겼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현행범으로 잡힌 이상 방법이 없었다. 처음이니 집행유예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책정된 손해배상금 소송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로 계약해지 당한 모델을 다시 쓰고 싶은 기업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의 커리어는 이미 망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재언은 그가 망하면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개떡 같은 회사생활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신재언의 입사 동기 최윤정은 야무지고 논리적으로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라 신재언이 대머리 김 대리에게 시달리고 있으면 은근슬쩍 빼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입사하고 일 년 정도 됐을 때 재언이 발주를 잘못 넣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큰 금액도 아니었고 사소한 물품을 잘못 보고 실수한 것이었다.
다른 상사였다면 간단히 주의만 주면 될 일을 김 대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잘 걸렸다는 듯이 온갖 소리를 내뱉는 김 대리를 엔레이드맨을 불러와 죽여 버릴까 재언이 고민하던 때, 최윤정이 나섰다.
“김 대리님. 이 일은 충분히 수습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방금 클라이언트에 전화해서 해결했으니 신 사원과 함께 직접 사과하러 가도 될까요?”
재빠르게 일을 해결한 그녀가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 유연하게 재언을 빼내 주었다. 그녀는 연신 고맙다면서 허리를 숙이는 재언의 등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동기인데 도우면서 살아야지. 이제 우리 둘밖에 없잖아.”
재언은 윤정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때 그녀가 아니었다면 욱한 마음에 김 대리를 죽이고 회사까지 무너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휴직을 앞둔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퇴근하는 길에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었다.
“일단, 그 여자, 이름이 뭡니까? 어느 나라 사람이었어요?”
“이름은 에블린 워, 이탈리아 사람이었어요.”
‘이탈리아란 말이지…….’
조금 불안해졌다. 신재언은 이마를 감싸 쥐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탈리아에 마약이라고 전부 마약왕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일단은 확실해질 때까지 연락하는 건 보류하자.’
“연락처는요?”
“몰라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대로 경찰이 와서…….”
그때만 생각하면 저절로 우울해지는지 상현은 고개만 푹 숙였다. 그와 이야기를 더 나누면서 신재언은 그가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재언 또한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했고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왔다. 그렇기에 이상현이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노력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앞의 좋은 기회를 두고 마약을 할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봐요, 상현 씨.”
마음속으로 삽질을 하는 상현의 관심을 돌리고자 재언이 손가락을 굽혀 테이블에 노크했다. 그리고 이상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복수하고 싶어요?”
“…복수요?”
이상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복수보단 그저 제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엉…….”
“뭐… 좋아요.”
재언이 턱을 괴고 싱긋 웃었다. 각성하기엔 한참 모자란 증오였다.
그래도 버드맨의 경우를 생각하면 언제 증오가 치솟을지 모르는 일이니 지켜봐야 했다. 그저 가족과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게 목표인 순수한 청년이 증오로 물들어 빌런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재언은 나중에 또 연락할 테니 전화 오면 꼭 잘 받고, 절대로 허튼 생각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를 받으면…….”
“당분간 조사는 동결될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희망을 품고 있어 보세요.”
택시 타는 곳까지 상현을 배웅한 재언은 혼자 남게 되자마자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경찰청장 또한 그의 부하였다. 부하라고 대놓고 말하고 다니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따지자면 부하가 맞긴 했다. 경찰청장은 조각난 장난감과 혈연관계이자 친부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방법은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사건이 정확해질 때까지만 동결해달라는 거니까. 절대로 무조건 무죄가 나오게 떼쓰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괜히 미안해진 재언이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냈다.
“미안해, 조각난 장난감. 널 빌미로 네 아버지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자 눈알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데굴데굴 굴렀다. 경찰청장의 딸인 조각난 장난감은 그녀의 아버지가 형사였을 때 잡아넣었던 살인마가 탈옥해 찾아와 산 채로 토막 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정신적으로 무너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재언이 그녀의 능력을 각성시켜 살려 낸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슨 부탁이든 목숨을 걸고 들어준다고 했으니. 미안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청년 한 명, 골로 보내는 것보단 나으니까.’
재언은 데굴데굴 손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눈알을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째 또다시 이상한 일에 휘말린 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청장과 전화를 끝낸 신재언은 일단 이상현이 제대로 집을 찾아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그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잘 가고 있냐고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전화를 두고 나왔는지 물어보았을 때 어색하게 웃던 그의 표정은 정말 그대로 놔뒀으면 상 하나 치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블린 워라고 했지? 그런 외국인을 대한민국에서 연고도 없이 찾아야 하지만, 찾는 방법이 따로 있지.”
일단 이상현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계획을 세운 형과 누나라는 인간을 만나면 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만나 주지 않을 게 뻔하니 이쪽 방식대로 만나러 가야겠지.
그쪽에서 먼저 치사하게 젊은 청년의 인생을 망가뜨리려고 했으니 인과응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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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낄낄거리면서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자식도 이제 끝이야. 마약으로 보냈으니 그렇게 자랑했던 계약도 해지되었을 게 뻔해. 어린놈의 자식이 건방지게…….”
“좀 미안하긴 하네.”
두 사람은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 종이 한 장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붙어 있었다. 제법 즐거운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아 방해하기 조금 미안했다.
매우 나른하고 위험한 분위기의 두 사람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 봉투와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야경이 괜찮은 호텔에서 술판을 벌인 듯했다.
‘그래, 이런 짓을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없지.’
두 사람 다 눈엣가시 같던 놈을 치워 버린 덕분에 세상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약간의 죄책감이라도 가졌기를 바랐지만, 그마저도 약 기운 때문에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아주 더럽게 치사한 인간들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언은 체어맨이 열어 준 문을 통해 그곳으로 건너갔다.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두 사람은 헛것을 봤다는 얼굴로 눈을 비볐다.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호텔의 벽에서 튀어나온 신재언은 언젠가 옥상에서 버드맨과 만났을 때 썼던 피에로 가면을 얼굴에 쓴 채였다.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너무한 사람들이네. 한 사람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려 놓고 여기서 술판이나 벌이고 있다니… 그리고 이 하얀 가루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재언이 바닥과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하얀색 봉투를 집어 올렸다. 마약의 종류가 여러 가지겠지만, 이 봉지의 질감이나 인슐린 주사기, 그리고 마약의 색깔까지 굉장히 익숙했다.
‘진짜 마약을 즐기는 놈들이 여기 있었네!’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걸 내려다보며 신재언은 눈을 가렸다.
“둘 다 왜 옷도 안 입고 저러고 있는지……. 체어맨!”
“위대하신 아버지께 저런 추한 꼴을 보이다니, 죽음으로 사죄해야 마땅합니다.”
불투명한 면사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체어맨은 분명 잇몸이 전부 보이도록 활짝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재언은 가운을 두 사람에게 하나씩 던져 주며 질문했다.
“당신들, 이상현이라고 알죠?”
“뭐으야… 뭐, 뭐야 이 새끼. 어떻게 여기, 어? 꿈인가?”
약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발음도 새고 사리 분별이 안되는 듯했다.
재언이 한숨을 쉬면서 체어맨에게 손짓했다. 뭐, 사실 이런 이유로 체어맨을 데리고 온 거였지만, 그 장면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재언은 뒤로 돌아 서 있었다.
잠시 끔찍한 비명이 흐른 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시 그들에게 질문했다.
“이상현이라고 알아요, 몰라요?”
“아, 아, 압니다… 알아요!”
‘…놀랍군. 체어맨의 고문이 마약을 이겼다.’
겉으로는 어디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이는데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체어맨이 양팔로 자기 자신을 감싸며 웃어 대자 공포에 질려 입술을 달달 떨어 댔다. 역시 잔인하기로는 TOP 5 안에 드는 빌런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