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당신들이 누명 씌운 그 이상현 씨한테 약 먹인 여자… 에블린 워라고 했나? 그 여자 연락처가 어떻게 돼?”
“모, 모, 모릅니다. 으으, 아아악! 진짜 몰라요. 진짜입니다! 살려 주세요!”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소변을 지렸다. 재언은 다 큰 성인 남성이 가운만 입은 채 오줌을 줄줄 흘리는 걸 정면으로 목격하고 눈을 문질렀다.
그들은 정말 아는 게 없었는지 체어맨이 한 걸음씩 다가가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그녀는 브로커에요. 그래서 알았어요! 우리도 그녀를 만나려면 클럽까지 가야 한다고요……. 허어엉…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허으윽…….”
뻔뻔한 사람들이군.
신재언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호텔 전화를 이용해 경찰을 불렀다.
마약에 취해 있는 사람과 바닥에 나뒹구는 마약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들이 있으니 현행범으로 붙잡히게 될 것이다. 이상현에게 했던 걸 똑같이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신재언은 호텔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체어맨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어쨌든 그들이 행한 업보만큼 되돌려 준 셈이니 이제 신재언이 해야 할 일은 에블린이라는 브로커를 찾는 것이었다.
이상현에게 받은 인상착의에 의하면 에블린은 금발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고 키는 177cm 정도, 입술 왼쪽 아래에 점이 있고, 눈매가 제법 사나웠다고 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며 한국에 오래 살았는지 한국어에 능통했다. 외국인 발음 특유의 습관이 있긴 하지만 알아듣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는 정도였다.
그리고 방금 만나고 왔던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약 브로커들이 표적을 물색하는 장소는 클럽이나 클럽 뒤쪽에 있는 술집인 것 같았다.
나타나는 것은 주기적이지 않고 접근하는 방식도 가지각색이었다.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접근하는 때도 있고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아서 잡담을 떨기도 했다.
이상현이 만났던 젊은 여성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스무 살 정도 된 어린 청년이나 마흔 살이 넘는 중년 여성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상대를 찾으려면 일단 클럽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신재언은 서른이 넘어가도록 클럽을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럽은커녕 번화가도 없는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에 상경해선 공부만 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취직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취직해서는 회사 생활에 굴려지다 보니 그런 유흥을 즐길 기회가 전혀 없었다.
‘클럽에 혼자 가도 되는 거야? 아니면 친구들이랑 가야 하나? 그런데 어쩌지. 난 같이 갈 사람이 없는데?’
혼자 클럽에 가기는 용기가 나지 않아 에블린이 자주 등장한다는 술집에 먼저 가 보기로 했다. 바(Bar) 형식의 술집에는 혼자 온 사람도 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분위기 있는 술집에서 술을 홀짝이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고 할 만했다. 그렇게 하릴없이 술만 홀짝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만약 오늘도 나타나지 않으면 내일 또 와야 하는데…….
주말에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 월요일이 더 고단했다. 하지만 신재언은 ‘럭키 가이’로서 인정받아 능력자가 된 사람이었다.
“혼자예요?”
어떤 여성이 신재언의 곁으로 다가와 어색한 발음으로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상현이 설명했던 것과는 머리카락 색이 달랐지만, 인상착의가 매우 흡사했다. 입술 왼쪽 아래에 점이 있었고, 웃는 표정임에도 눈매가 날카로웠다. 이목구비가 진한 미인이었다.
이 사람이 에블린 워구나!
흥분되는 속마음을 간신히 가린 재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 상대가 바람 맞췄거든요. ”
그의 대답에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재언을 농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고양이 앞에 쥐가 된 느낌이었다.
“당신 잘생겼네요. 이름이 뭐예요?”
“감사합니다… 신재언입니다. 당신은요?”
“레미제인이에요.”
‘레미제인같은 소리하네.’
잠시 울컥했던 재언은 에블린 워라는 이름도 거짓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술을 마시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니 생각보다 꽤 유쾌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사람이 한 청년의 인생을 그렇게 망치고 마약 같은 걸 파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봐요, 재언 씨. 저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저랑 좋은 거 안 할래요?”
“좋은 거요?”
‘왔구나.’
신재언은 바짝 긴장한 채 흥미로운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강제적으로 이끄는 걸 거부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호텔까지 함께 와 버렸다.
호텔 침대에 앉아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린 재언이 실험실의 쥐처럼 파르르 떨었다.
좋은 거라더니, 이런 거였어?
하지만 다행히 에블린은 신재언을 당장 침대에 밀어뜨려 덮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뒀다. 딱 봐도 수상하고 익숙한 하얀 가루와 인슐린 주사기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약을 보면 무서워하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이것도 정량을 넘기면 중독이지. 우리가 하는 건 조금 즐기는 것밖에 안 돼요.”
“하지만 그건… 마약 아닙니까?”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냥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보조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자고요.”
솔직히 마약 가루와 인슐린 주사기로 어떻게 마약을 주입하나 궁금했는데 그녀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다.
그녀는 가방에서 일회용 생리식염수를 꺼내 컵에 붓고 그 안에 마약 가루를 풀었다. 신기하게도 마약 가루가 물에 넣기만 해도 바로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주사기를 넣어 마약을 든 액체를 쭉 채웠다.
아무리 봐도 그냥 조금 즐기는 정도의 양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일단 그녀를 피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아무도 없는 호텔로 자진해서 와 주어 고마워하는 게 좋을지 맹렬히 고민했다.
“잠깐만요. 일단 그거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오, 제게 위협을 가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냥 즐길 뿐인 건데 왜 그렇게 경계하시는 거죠? 게다가 저를 건들면 좋은 꼴은 못 볼 거예요. 제 뒤에는 아주아주 무서운 분이 계신답니다.”
에블린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주사기를 든 채 천천히 다가왔다. 일단 애들을 불러서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작스럽게 호텔 중앙에 문이 생기며 누군가가 튀어나오더니 에블린의 목을 낚아챘다.
커다란 키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남자는 마약왕 알례리였다.
‘얘가 왜 갑자기 여기서 나와?’
재언이 황당한 표정으로 침대에 엉거주춤 앉았다. 에블린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매우 놀랐지만, 곧 능력자임을 깨닫고 맹렬하게 반항했다.
정확히 급소를 노려 에블린을 기절시킨 알례리가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재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적절하게 와 줘서 살긴 했지만…….”
신재언이 떨떠름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례리는 재언이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 뒤 주삿바늘을 제거해 품 안에 넣으며 에블린을 내려다봤다.
기절한 그녀는 바닥에서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죽었나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죽은 건 아니었다.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마약… 이게 바로 이전에 제가 말한 정체불명의 ‘좀비 마약’입니다. 아버지께서 맞으셨으면 어떻게 하면 됐을지…….”
‘좀비 마약이라니!’
그런 위험한 마약을 그녀가 어떻게, 왜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기절한 그녀에게서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알례리가 이곳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알례리의 능력은 손에 닿는 사물의 능력을 간파하고 훼손할 수 있었다. 그건 사물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에도 적용이 가능했다. 한술 더 떠 그의 능력은 기생도 가능했다.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기생시켜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부하들이 훼손된 CCTV를 확인해 신재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의 능력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이라면, 사람이나 사물에 손이 직접 닿아야 능력이 발동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능력은 전투보단 정보를 수집하거나 암살에 능했다.
그는 에블린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그가 눈을 뜨고 손을 떼자 에블린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녀가 가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약의 출처는 밝혀낼 수 있었어요. 그자를 족치면 아버지께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약은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불안한데. 가져가게 놔둬도 되나?’
자신을 향한 충성과 숭배는 거짓이 아니라 해도 그와 별개로 마약왕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직 사고 친 것도 아니고 직접 도와주러 오기까지 했는데 안 된다고 딱 잡아떼는 것도 미안했다.
잠시 고민하던 신재언이 엔레이드맨을 불렀다.
“좋아. 하지만 널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당분간 엔레이드맨과 함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버지, 언제 제 별장에 놀러 와 주시겠습니까? 제 아들이 아버지를 무척 보고 싶어 한답니다. 그 애는 벌써 위대하신 아버지의 부하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가문의 유구한 영광임을, 드디어 깨달은 겁니다.”
알례리가 빙긋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자식이 깨달음을 얻고 신재언의 부하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게 퍽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으으… 기분 나빠…….’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알례리의 모습은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그의 자식 로메오 지오반니 벤라는 꽤 귀여웠다. 처음 만났을 때가 열두 살이었으니 지금은 열네 살 정도겠다.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니는 게 귀여웠지.
그 애를 만나러 한 번 들르는 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마약왕이 큰 잘못을 한 이후로 그쪽으로는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으니, 2년 동안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던 셈이다.
이곳에서의 볼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마약왕은 에블린을 챙겨서 돌아가려고 했다. 재언은 그녀가 없으면 이상현을 무죄를 입증할 수 없었기에 알례리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안심하라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그 일에 대한 수습도 제가 하겠습니다. 속죄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손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약왕의 곁에 엔레이드맨이 따르니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손으로 직접 만져야 능력을 쓸 수 있는 마약왕의 능력은 커다란 돔(dome)을 만들어 세계를 분리하는 엔레이드맨의 능력과 아주 상극이었다.
엔레이드맨은 자신의 몸과 세계를 분리하는 무형의 막을 항상 감싸고 다녔기 때문에 마약왕은 그의 몸에 손댈 수가 없었던 탓이다.
에블린을 붙잡는다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재언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세간의 건실한 사업가에 돈이 많은 부자인 그였으니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재언보다는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돈이 많으면 장땡이었다.
그리고 경찰청장도 신재언이 이상현의 마약 사건을 신경 쓴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사건을 조금 더 자세하게 조사할 것이다. 이 정도면 무고한 청년 한 명 정도는 살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