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며칠 후에 모든 일을 알례리가 해결하긴 했다. 다만 해결한답시고 무슨 짓을 했는지 한국 정치계부터 대기업 임원들까지 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여 마약 폭로전이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연예인 중에 억울하게 그들에 의해 누명이 씌워졌다는 증거까지 나와 한동안 언론이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중에 color’s의 옐리가 거기에 속해 있었다.
그간 마음고생으로 남무혁 씨의 쪼그라들었던 근육이 단번에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엔 다시 color’s의 MD로 넘쳐나고 포스터도 돌아왔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모델 이상현 역시 재조사 끝에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게 밝혀져 동정 여론이 생겼다. 마약을 먹긴 했지만 그것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하였다는 점이 인정돼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대중의 여론을 파악한 회사는 그에게 소송을 거는 게 더 손해라는 점을 계산해서 그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하지 않았고 그가 억대의 빚을 지는 일 또한 없어지게 되었다.
막 모델로서 주가가 오르고 있는 청년인 데다 이번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지금보다 훨씬 잘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알례리가 정교하게 만들어 낸 증거로 무죄를 받아 낸 것이지만 말이다.
웬일로 그가 이번엔 조용히 넘어가는가 싶으면서도 엔레이드맨이 옆에 있으니 허튼짓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또다시 쳇바퀴 돌리듯 일상을 보내던 신재언에게 다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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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까?
신재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늘따라 저 반짝이는 대머리도, 와이셔츠를 터트릴 듯 볼록 튀어나온 배도, 말하면서 연신 땀을 훔치는 행동까지 전부 짜증이 났다.
서른여덟이나 먹고 아직도 대리인 것도 모자라 며칠 전에 본 선 자리에서도 대차게 까였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이제 보니 그 분풀이를 부하직원한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풀이를 받고 있는 재언은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최대한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정말 생각 같아선 콘크리트에 파묻어서 바다에 빠트려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느냐 참느냐에 따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이번 컨펌 자료는 내가 가져갈 테니 그렇게 알아.”
저 망할 대머리가!
그건 신재언이 3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발품 팔아 직접 공들여 만든 자료였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할 만큼 고생한 자료를 김 대리가 날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무능한 김 대리가 저렇게 훌륭한 자료를 작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내에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였다.
진짜 죽여 버려야 하나……?
그래도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한 재언은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할지 이미 머릿속으로 구상 중이었다. 바로 김 대리의 오피스텔에 몰래 들어가 가지고 나오면 된다.
멍청한 김 대리는 본인이 가져간 자료 내용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금방 잊고 말 것이다. 그렇게 쉽게 잊을 거면서 일부러 남의 고생을 낚아채려는 못된 대머리였다.
매일 김 대리 살해 망상에 시달리는 재언은 가까스로 마음의 평정심을 찾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김 대리가 자신을 갈군 횟수는 총 열두 번이고 전부 본인이 잘못 결재해서 올린 보고서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가닥 나 있는 머리를 전부 태워 버리고 외딴 섬에 버려 둔 다음 불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만약에 이 이후로 몇 번 더 지랄해 댄다면 참지 못하고 폭발할 수도 있었다. 엔레이드맨을 불러내서 가둬 놓고 불을 지르라고 명령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도 김 대리는 살아남았다. 바로 타 부서 정 부장의 등장 때문이었다. 김 대리와 입사 동기인 정 부장은 능력과 성격이 김 대리와 천지 차이였다.
“홍보팀 아직 이거 완성 못 했어? 하아… 김대리이~ 왜 이렇게 일이 더디고 느려? 응? 그러니까 계속 대리인 거야. 하이고 이 친구야…….”
+사이다 1
+사이다 1
+사이다 1
신재언은 가슴이 뻥 뚫리는 말만 해 주는 정 부장을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홍보1팀에서 넘겨주는 자료로 기획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김 대리가 어제부터 일을 지지부진하게 해 주는 바람에 일의 진행이 조금씩 늦어져 정 부장이 직접 재촉하러 나온 것이다.
평소에 김 대리는 후임인 신재언에게 일거리를 몰아주며 급한 불을 꺼 왔는데, 하필 어제 재언이 연차를 써 쉬는 날이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김 대리에게 엿을 먹인 재언은 하루 동안 사수에게 연차 보고도 하지 않았다고 여섯 번이나 갈굼당했다. 그리고 너 때문에 바빠졌고 급한 일을 못 했다면서 또 여섯 번을 갈굼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 일을 본인이 못 해서 끝내지 못 한 게 왜 연차 내고 쉬다 온 자신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월초에 연차를 쓰겠다고 김 대리에게 보고도 했었다.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 거면서 난리 블루스를 춰 대는 통에 박 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만하라고 짜증 낼 정도였다.
덕분에 사방에서 동정 어린 시선들이 와 박혔다. 그나마 다가와 위로해 줄 입사 동기는 출산과 육아휴직으로 이번 주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벌써 보고 싶네요, 윤정 씨…….’
타 부서의 팀원이 와서 말해도 될 일을 정 부장이 일부러 찾아오는 덴 이유가 있었다.
동기인 김 대리를 갈구기 위해서였다. 열등감과 피해망상으로 똘똘 뭉친 김 대리는 정 부장과 같은 사원일 때도 잘난 동기를 그렇게 괴롭혔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동기가 해낸 성과를 어떻게든 가로채려 하고 상사에게 비비적거렸다. 그런데도 저 위치밖에 못 간 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무능력한 남자였다.
풀이 죽은 김 대리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사이다를 마신 재언은 신이 나서 오후 업무를 빠르게 해치웠다. 물론 김 대리는 자신이 운 좋게 살아남은 줄도 모르고 정 부장을 저주하면서 퇴근했다.
‘저놈 저거 언젠간 한번 크게 당해 봐야 좀 조용해질 텐데…….’
김 대리의 매끈한 정수리를 쳐다보며 재언은 혀를 쯧쯧 찼다.
그 후 김 대리의 명줄이 다시 일주일 정도 늘어났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아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됐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나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재언의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다. 내일은 김 대리가 없는 회사를 즐겁게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잔뜩 신이 난 재언은 퇴근하는 길에 매운 만두를 포장해 와 맥주와 함께 먹으며 차민재와 가볍게 통화를 했다.
- 재언 씨는 늘 바쁘신 거 같아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지만,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 그래도 내일 만나니 제가 참아드리겠습니다.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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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일어나 보니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재언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좀비처럼 화장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항상 입는 출근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여전히 하늘에서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써 봤자 정류장까지 가는 데 홀딱 젖을 것 같아서 차를 끌고 출근했다.
비 맞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린 출근길을 오랜만에 겪고 회사에 도착해 업무 준비를 끝내자 업무 시작 시각 15분 전이었다.
9시부터 회의실에서 브리핑할 것이 있으니 모두 모이라는 박 팀장의 말을 듣고 하품을 하며 노트와 펜을 챙겨 들어갔다.
다음 프로젝트 런칭을 위해 답사를 나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회의실에 착석했다. 역시나 빠진 사람 중에는 김 대리가 끼어 있었다.
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원래 수요일 아침이 일주일 중에 가장 힘든 날이라고 하더니, 김 대리가 없으니 오히려 몸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김 대리가 넘기는 업무가 없으니 여유롭게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휴게실에 가서 비가 내리는 바깥을 구경하기도 하고 커피도 뽑아 먹고 편의점에 내려가서 간식거리도 사 올 수 있었다. 평소에는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과자가 당겼다.
김 대리는 신재언이 군것질을 하는 걸 두고 보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펼치며 지껄이는 바람에 본인의 나온 배나 신경 쓰지 더러워서 안 먹고 만다는 생각에 사무실에서는 웬만하면 군것질을 삼갔다.
곧 승진 시기이니 인사고과만 잘 반영되면 승진 기회가 곧 있을 것이다. 같은 직급의 대리를 달고 김 대리를 비웃어 줄 상상을 하면서 기분 좋은 얼굴로 하루를 끝내려 했다.
그래, 신재언은 일주일 내내 기분이 좋을 예정이었다. 누군가의 청천벽력같은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박 팀장은 점심을 먹은 뒤부터 급격히 안색이 나빠지더니 옆 부서의 부장님과 센터장, 본부장까지 내려와 회의실 안에서 저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언은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걸까 궁금해하며 입 안에 과자를 밀어 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업무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