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띠롱-.
그때, 회사 메신저로 개인 채팅이 올라왔다. 누군가 하니 요즘 부쩍 친하게 지내는 남무혁 씨였다. 그는 여전히 아이돌 color’s의 극성팬이었다.
거기다 며칠 전에는 color’s가 완전체로 컴백해 그의 자리에 있는 MD와 포스터가 더욱 늘었다. 게다가 희귀 포토 카드를 교환하기 위해 저번 주말에는 직접 대구까지 내려갔다 왔다는 걸 들었을 땐 이 사람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하지만 성격도 좋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나름 사내에서 발이 넓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재언도 저번에 그가 다니는 헬스장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헬스 트레이너가 PT해 주듯 굉장히 꼼꼼하고 세심하게 잘 알려 주어서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덕분인지 남 사원은 성별에 상관없이 인기가 많았다.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0] 재언 씨, 그 얘기 들으셨어요?
[신재언/홍보1팀] [오후 16:41] 무슨 얘기요?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3] 이번 프로젝트 답사팀이 탄 버스가 산길을 오르다가 아래로 전복되었대요.]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4] 그래서 본부장님부터 센터장님까지 부랴부랴 달려오신 거고요…….]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4] 아마 빌런들 소행이 아닐까 싶어요.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5] 멀쩡히 잘 가던 버스가 갑자기 외진 산속 길을 달리면서 커브를 틀다가 뭐에 튕겨 나가듯 아래로 굴러 떨었다고 해요]
[남무혁/기획2팀] [오후 16:46] 구급대원이랑 히어로들이 와서 상황수습 중이라고 하는데 하필 김 대리님하고 원 사원이 실종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재언은 깜짝 놀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검색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건이라 기사를 찾기가 힘들었지만, 조금 전에 올라온 속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산길을 오르던 XX회사 버스가 산 비탈길 아래로 추락. 김OO(38세/남)와 원OO(29세/남)가 실종되어 수색 중인 가운데 폭우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CCTV 영상도 함께 첨부되어 있기에 그것도 재생해 보니 확실히 회사 버스가 맞았다. 2차선 산길을 올라가고 있던 버스가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산 비탈길 아래로 전복된 버스는 곧 CCTV 화면에서 사라졌다.
사고 난 것에 비해 다행히 사망자는 없고 18명 중 16명이 다친 채 무사히 구조되었지만 두 명이 실종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모두가 실종자를 김 대리와 원 사원으로 추정했다. 대머리 진상남 김 대리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지만 스물아홉의 원 사원이 걱정이었다.
어느새 사내에 소문이 쫙 퍼졌는지 사람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퇴근할 때까지 수군거렸다. 게다가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누려는지 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거나 술 약속을 잡았다.
남무혁은 아이돌 아니면 운동뿐인 단순한 남자였기에 약속에 끼지 않고 퇴근 준비를 하면서 신재언에게 가볍게 물었다.
“재언 씨는 어디 안 들르고 집으로 가십니까?”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저는 운동하면서 color’s 신곡을 들을 생각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둘은 1층에서 내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무혁 씨.”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온 재언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가린다고 선글라스를 껴도 그에게서 풍기는 잘생긴 아우라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차민재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재언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크루즈 일 이후로 오랜만에 보네요.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여기 앞에 연어 전문 횟집이 있는데 회사 동료가 여기 연어가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점심 특선으로 싸게 먹어도 맛이 괜찮았다고. 룸이 있는 것 같은데 일반인에게는 내어 주지 않고 유명인에게만 내어 주는 듯해요. 연예인들이 많이 가는 맛집인가 봐요. 민재 씨도 유명하니까 방을 내어 주지 않을까요.”
재언의 말대로 가게에는 오픈된 홀이 있고 독립적인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다만 레헬에게 A4 크기의 종이에 사인해 주셔야 안내해드리겠다고 하는 주인의 말에 신재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사인 같은 걸 해 주지 않는 유명인으로 유명했다. 재언이 미안해하면서 연어 말고 다른 걸 먹으러 가자고 그의 팔꿈치를 이끌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괜찮다고 웃으며 순순히 사인을 해 주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희한하죠? 빌런이 회사 버스 차량을 노리고 공격하다니……. 제가 싫어하는 사수가 거기에 휘말렸는데 업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혀 걱정이 안 돼요.”
“저도 들었어요. 그곳에 광안의 성녀가 투입되었거든요.”
“광안의 성녀가요?”
“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S급 힐러인 광안의 성녀는 과거에 귀신들의 성녀와 크게 싸운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녀 때문에 한동안 침대에서 자리보전해야 했던 귀신들의 성녀는 지금도 그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갈았다.
“S급 히어로가 투입될 정도라면 상황이 꽤 긴박하다는 거네요.”
“맞아요. 그런데 실종자 2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어서 테러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게요. 더 궁금해지게…….”
그러다 나온 연어 요리에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어로 협회에서도 어떤 빌런의 소행인지 전혀 모른단 뜻이었다. 그 이후로 대화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 술을 한 잔씩 하면서 맛있게 먹고 가게를 나왔다. 아까까지 쏟아지던 비가 다행히 지금은 그쳐 있었다.
“회사 동료가 그러는데 여기 루프탑이 분위기랑 경치가 좋다고…….”
2차로 칵테일을 한 잔씩 즐기기 위해 차민재를 데려간 곳은 예쁘게 꾸며진 루프탑 칵테일 바였다.
“회사 동료가…….”
신이 나서 한참 말을 이어가던 재언은 민재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뭐야? 저 인자한 미소는?
레드-헬-파이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상대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재언 씨는 회사 동료 얘기만 하네요. 회사 때문에 만나기도 힘든데…….”
“아…….”
입을 잘못 놀려서 하마터면 회사가 없어질 뻔했다.
그래도 헤어질 즈음엔 기분이 좋은 상태로 데이트를 끝내 안심했다.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뒤늦게 생각난 사실에 술기운이 모두 날아갔다.
그 망할 김 대리가 사라지기 직전에 뭘 했지?
그래! 바로 이 신재언이 3주 동안 개고생해서 모은 스크랩 자료와 리스트를 모아 놓은 파일철을 홀라당 가져가 버렸다.
그걸 다시 만드느니 퇴사하고 회사를 파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여기저기 발품 팔아 만든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인사고과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소중한 자료로 김 대리의 손에 있기엔 아까웠다.
나중에 김 대리 몰래 가져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단 다급하게 체어맨을 불러냈다.
“체어맨. 이번에도 그, 김 대리 집이랑 연결해 줘.”
갑작스러운 신재언의 부름에 나타난 체어맨은 얼굴에 면사포를 쓰지 않은 채였다. 즐거운 고문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쪽도 나름 급했다.
하지만 전혀 불만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체어맨은 그저 공손히 재언에게 인사를 올린 뒤 얼른 문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체어맨이 연결해 준 문을 통해 김 대리의 집으로 들어간 신재언은 절망적인 기분을 맛봤다.
‘이 개자식… 들고 갔어!’
들고 갔다기보단 가방에서 꺼내는 걸 깜박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지만 그렇기에 정말 큰 일이었다.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의 주인이 빌런에게 공격받아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백업도 안 한 자료를 가져가니까 벌을 받지, 망할 대머리! 으으!”
재언이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아득바득 갈자 체어맨이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그를 위로했다.
“오, 이런… 위대하신 아버지. 그 배 나온 대머리가 아버지께 굉장히 커다란 실례를 저질렀나 보군요. 제게 맡겨 주신다면 두 번 다 신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릴 테니까.’
아무리 김 대리의 집을 뒤져도 자료를 찾을 수 없었던 재언은 일단 체어맨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밤새 고민에 빠졌다.
사실 김 대리가 ‘럭키 가이’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지금도 신재언이 살려서 데려와야 하는 기가 막힌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우울할 수가…….
재언은 김 대리에게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