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44화 (44/324)

44화

직장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주말뿐이다. 그리고 신재언은 직장인이다.

꿀 같은 주말을 대머리 따위를 찾는 데 써야 한다는 소리였다. 재언은 체어맨을 이용해 김 대리가 실종된 절벽 근처로 도착한 뒤 엔레이드맨을 불렀다.

재언의 명령으로 마약왕을 감시하고 있던 엔레이드맨이 금세 그의 앞에 나타났다. 낯빛이 저번에 봤을 때보다 좋아진 게 마약왕을 감시하면서 제법 좋은 대접을 받는 모양이었다.

이제 막 열여섯 정도 돼 보이는 작은 체구의 소년 모습인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육체의 시간까지도 세계와 단절시켜서 몇 년이 지나도 어린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엔레이드맨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신재언이 모종의 사건으로 ‘증오를 각성시키는 능력’을 손에 얻은 뒤 처음으로 능력을 각성시켜 준 사람이 엔레이드맨이었다.

지금이야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표정이 기본이지만, 예전의 그는 매우 우울하고 기죽은 얼굴로 돌아다녔다.

대한민국의 남쪽 아래에 위치한 섬, 위지도라는 이름의 섬인데 대학 친구 한 명의 고향이라 다 같이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섬에서 만난 엔레이드맨은 차림새도, 모습도 이상한 소년이었다.

@

“마! 주혀니, 얼른 와서 안 고치나!”

“에. 예. 네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자 멀뚱히 서 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갔다.

입은 옷이 너무나도 후줄근하고 며칠 안 감은 듯한 기름진 더벅머리에 얼굴과 몸에 흉터와 멍이 가득했다. 얼마나 안 씻었는지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까지 진동했다.

‘주혀니’라고 불린 소년은 쉬지도 않고 일했다. 마치 이 섬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는 느낌이었다.

불편한 마음에 재언이 소년을 부르려고 하면 이 섬이 고향이라는 친구가 이상하게 눈치를 주고 소년도 그를 피해 다녔다.

잔뜩 주눅 들고 겁에 질린 얼굴로 새벽같이 누구보다 빠르게 일어나 밭을 갈았다. 저녁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당 청소, 빨래, 개 먹이 주기 같은 일을 하고 두 주먹도 안되는 밥을 맨손으로 받아 갔다. 그것도 차갑게 식거나 쉬어 버린 것을.

대체 잠은 어디서 자는지 궁금해서 밤중에 나가 몰래 훔쳐보니 섬에서 가장 큰 집의 정자 아래에 기어들어 가서 자고 있었다.

아동학대 아니야 이거?!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주혀니’라는 소년은 육지에서 세 살에 납치되어 섬의 노예로서 끌려왔다.

재언은 어떻게든 소년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미 섬 노예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역사가 있는 섬 주민들에게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섬노를 관리했다.

어쩌다 한 번씩 순찰 오는 해경이나 섬에 상주하는 경찰들도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재언이 혼자 힘으로 소년을 도와주려니 감시가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혀니’라는 소년은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나,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고… 이런 데서 살기 싫어요…….”

‘허엉…’ 하고 구슬프게 우는 소년을 껴안고 재언이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반드시 빼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섬은 어린 소년에게 독하고 매정했다. 재언과 어울리며 희망을 키운 어린 소년은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이곳에서 진정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재언 또한 섬에서 나가는 날 소년을 빼낼 작정으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반인인 재언이 섬 주민들의 감시망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만에 하나라도 섬 노예가 탈출에 성공해 이 일을 공론화하면 얼마나 귀찮은 일이 일어날지 잘 알았다.

그래서 소년이 재언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소년을 잡아 높은 절벽 아래로 밀어서 떨어트렸다. 발버둥 치며 살려 달라고 비는 소년의 팔다리를 비틀고 부러트린 뒤 바위로 가득한 절벽으로 말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자 재언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소년을 찾다가 만난 친구는 괜한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말했고 이전까지만 해도 상냥했던 섬 주민들도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여기서 더 헤집고 다닌다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결국, 소년을 찾으러 산속까지 들어온 재언의 눈에 갑자기 새까만 아우라 같은 것이 보였다. 그건 하늘 높이 솟아오를 정도로 거대한 증오였다.

재언의 또 다른 능력,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이 소년을 찾아낸 것이다.

신재언이 발견한 소년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피거품을 뱉으며 몇 번이고 입을 뻐끔거리는 소년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리도 비참하게 노예로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신재언이 용납할 수 없었다. 빠르게 달려가 소년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다크 카오스’의 첫 번째 자식 ‘엔레이드맨’이 탄생했다.

능력을 각성한 엔레이드맨은 가장 먼저 섬에 사는 주민 75명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대 악의 탄생으로 이름을 널리 알려졌다.

엔레이드맨은 그 이후로 수소문 끝에 가족을 찾았지만,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 그의 부모는 어느새 딸을 한 명 낳고 행복하게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빌런이 된 자신이 찾아간다면 잘 살고 있는 가정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기에 엔레이드맨은 부모에게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 떠나왔다.

그의 딱한 사정에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아버지를 자처했다. 그 때문에 다른 자식들도 재언을 아버지라 불렀다.

그리고 훗날 마약왕에게 부탁해 지어진, 자식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이 생겼다.

@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군.

비 오는 산속의 광경에 그날을 떠올린 재언은 엔레이드맨이 아닌 다른 자식을 부를 걸 하고 후회하며 그의 안색을 슬그머니 살폈다. 다행히 그의 얼굴에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가장 먼저 버스가 발견된 곳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혹시라도 김 대리가 떨어트린 가방이 있는지 확인했다. 항상 칠칠치 못하게 물건들을 흘리고 다니는 망할 대머리가 이럴 때는 그러지도 않았다.

재언은 미리 보내 놓았던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자신을 향해 폴폴 날아오는 걸 발견했다. 손을 내밀자 손바닥에 눈알이 안착했다.

“어땠어? 김 대리나 원 사원을 찾았어?”

조각난 장난감에게 두 사람의 사진을 보여 주며 시체라도 발견하면 얘기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특히나 김 대리가 가지고 다니는 에X메스 서류 가방을 찾으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조각난 장난감은 눈만 깜박여 찾은 게 없다고 의사표시를 했다.

재언은 자료를 찾는 걸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고생해 가며 준비한 자료를 코앞에 두고 놓칠 순 없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사회악인 김 대리가 애초에 자료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황금 같은 주말에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망하는 재언의 표정을 본 조각난 장난감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허공으로 떠올라 그를 이끌었다. 역시 무언가 실마리를 찾은 게 분명했다.

조각난 장난감이 도착한 곳은 버스 잔해가 널브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흙길이었다. 흙길에는 선명하게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었고, 그 옆으로 무언가를 끌고 간 듯 바퀴 자국이 보였다. 육안으로는 쉽게 찾기 힘든 흔적이었지만 이 정도는 조각난 장난감에겐 쉬운 일이었다.

아마도 수레 같은 것에 무언가를 실어서 옮긴 듯했다. 설마 진짜로 둘을 끌고 가기 위해 버스를 뒤집은 것인가 싶어서 얼떨떨해졌다.

장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머리 빠진 서른여덟 살 아저씨가 무슨 가치가 있어서 납치한 거지? 아, 실종자가 한 명 더 있었지.

‘김 대리가 아니라 원 사원이 목표구나. 김 대리는 곁다리일 뿐이야. 그러면 대체 그 청년을 왜?’

원 사원의 이름은 원태호.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었다. 재언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나름대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영국에서 졸업하고 스펙도 좋아서 나름 엄친아 느낌의 남자였다.

농담처럼 자신의 키는 2cm 모자란 180cm라고 말하고 다니는 그는 얼굴도 단정하고 성격도 그 정도면 무난하니 괜찮았다. 잘난 척도 없고 하나를 알려 주면 둘을 알아 선임이나 상사들이 꽤 예뻐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끌고 간 목적이 무엇인지는 빌런들에게 알아낼 문제였고,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흔적이 지워지기 전에 찾아가는 게 급했다.

주말에 이게 무슨 시간 낭비냐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흔적을 쫓아 산을 넘었을 때 보이는 바다 풍경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바다 쪽으로 산에서 내려가면 마을이 있을지도 모른다. 터널도 뚫려 있지 않아 거의 고립된 듯한 느낌의 시골은 아무리 기다려 봐도 마을버스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사고가 났는데 버스가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 사고를 수습한다고 히어로 몇 명과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있기에 들키면 귀찮아질 것을 예상한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도움을 받아 기척을 지운 채 산에서 내려갔다.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이는 놈들인지 바퀴 자국은 나무가 무성하고 풀숲인 곳만 골라 지나갔다. 벌레가 찌르르 울며 산에 들어온 불청객에게 불만을 토해 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도착한 곳은 산 아래에 걸치듯 존재한 주택가와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여기가 어디 면, 어디 리인 거지…….’

머릿속에서 이쪽 동네의 지도를 더듬거리며 마을을 돌아보던 재언은 마을에 있는 집이 겨우 네 채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해변에 선착장처럼 만들어 놓은 곳은 작은 나무판자들은 굉장히 불안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박되어 있는 낡은 보트 한 대는 아무리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이 아니라 범죄자들이 숨어 사는 동네 같았다. 생각에 빠져 걸음을 옮기는 재언을 엔레이드맨이 재빨리 낚아챘다.

걸음을 멈추게 한 엔레이드맨의 얼굴을 한번 보고 아래쪽을 쳐다본 신재언은 자신의 발 앞에 낚싯줄 같은 투명한 줄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줄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나무에 방울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수상한데…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보다 더 수상하잖아? 그리고 조잡해…….’

“아버지, 저… 여기 익숙합니다.”

“익숙하다고? 어떻게?”

엔레이드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에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재언은 엔레이드맨의 도움으로 마을 이곳저곳에 있는 함정을 피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다가갔다.

이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무렵 아궁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집 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지만, 이 마을에 지금 누군가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