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45화 (45/324)

45화

발자국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허공에 둥둥 떠서 지금 있는 집에서 가까운 또 다른 집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 밖에서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리던 그때, 바로 눈앞에서 끼익-하고 창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쭈뼛하고 솜털이 잔뜩 일어섰다.

비명을 겨우 삼킨 그는 둠 안에 자신을 가둔 엔레이드맨 덕분에 들키지 않고 창문을 열어젖힌 사람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건 60대 정도로 보이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씻지를 않았는지 몸에서 구정물과 구린내가 잔뜩 흘러나왔다. 이도 몇 개 없는 데다 남은 이도 누렇게 떠서 썩어 가고 있었다. 배만 볼록하게 나온 노인은 옷으로서 기능하는지 의문인 찢어진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이, 이 씨… 거기 무슨 일이여.”

“어어… 모 씨, 여기서 자꾸 뽀시락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착각이었나벼. 안으로 들어가자구.”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긴 하구나.’

재언은 일단 놀란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신재언이 허리를 펴고 겨우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낮고 좁았다. 거기다가 이 허름하고 좁은 집에 세 명이나 모여 있었다.

이 씨라고 불렸던 노인과 모 씨라고 불린 모자를 쓴 중년 남성,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말없이 TV 리모컨만 꾹꾹 누르고 있는 남자까지 총 세 명이었다.

TV는 켜지지도 않는데 반복적으로 리모컨을 꾹꾹 누르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수상하고 무서웠다.

모자를 쓴 중년 남성 모 씨가 질겅질겅 씹어먹고 있는 무언가는 자세히 보니 떡이었다. 예쁜 보자기에 싸인 화과자와 떡 상자에 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저들이 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기 힘든 조합에 눈을 찌푸린 채 쳐다보던 신재언이 탄식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건 바로 김 대리가 미리 준비해 둔 화과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 대리가 직접 준비한 건 아니고 회사에서 답사 나갈 마을 이장님과 할머니 할아버지들 드릴 선물이라고 미리 준비해 놓았었다.

화과자와 떡이 같이 포장되어 있는 것으로 총 열두 개의 상자를 준비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TV 리모컨을 꾹꾹 누르는 남자의 기행에 보답이라도 하듯 먹통이던 TV가 드디어 켜졌다. 막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답사를 하러 가던 회사의 버스가 절벽에서 떨어졌고 빌런의 소행으로 보이기에 히어로들이 근처를 수색하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그러자 리모컨을 들고 있던 남자가 리모컨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이런 니미 씨발! 그러니까 버스는 털지 말자고 내가 말했잖여! 괜찮다고 하더니 히어로 새끼덜까지 불러와서는, 어쩔 것이여!”

“시끄러워 봐! 이 새끼 아까부터 큰소리만 내고 있어!”

왜 TV 리모컨이 먹통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여러 차례 바닥에 던져 부서진 리모컨을 테이프로 붙여 유지해 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서 제 기능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종마 새끼 하나 구해 왔으니 그 새끼만 잽싸게 팔고 우린 튀자고. 여기서 십 년이나 지랄했으면 많이 한 거지. 이번엔 위쪽으로 올라갈까?”

“여기가 숨기 딱 좋고 살기도 괜찮았는디…….”

혀를 차며 아쉬워하는 모 씨와 이 씨를 뒤로 하고 재언은 창문 밖으로 나섰다. 여간 수상한 놈들이 아니었다.

“엔레이드맨, 어떻게 생각해?”

신재언의 말이라면 곧바로 대답했던 그에게서 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 봤지만, 그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엔레이드맨? 엔레이드맨!”

고장난 인형처럼 멈춰 있던 엔레이드맨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주변을 살피고 남자들이 있는 방 안을 한 번 더 훑어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 여깁니다.”

“어?”

“기억났어요. 제가 세 살 때 일이요. 부모님과 차를 타고 이 산을 오르는 도로를 오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차가 멈췄죠. 부모님은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살폈고 저는 내리지 않고 뒷좌석에 그냥 앉아 있었어요.”

엔레이드맨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부모님이 타이어에 난 구멍을 확인하느라 정신 팔린 사이 뒷문이 열렸고… 저를 강제로 데려간 저 남자 얼굴이 뚜렷하게 생각나요.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요! 저 남자가 나를 납치해서 섬에 팔아 버린 것까지 전부!”

재언은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엔레이드맨을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다행히 이성적인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재언의 품에서 벗어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주고 저 남자들이 만든 게 분명한 조잡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행 중 다행인지 대머리 김 대리가 가져간 소중한 자료를 찾으러 왔더니 엔레이드맨의 원수가 여기 숨어 있었다. 설마 세 살 때의 일을 기억할 줄이야, 그 정도로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그가 복수한다는 선택지는 당연한 사실이었고 어떤 식으로 복수하고 싶냐는 물음이었다. 엔레이드맨은 저 남자들 때문에 세 살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약 13년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섬 노예로 살았다.

“혼자서 복수를 끝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저는 엔레이드맨. 위대하신 아버지께 능력을 받고 다시 태어난 몸입니다.”

“좋아.”

신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다른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수는 스스로 할 수 있게끔 전부 맡겼다. 피해자인 그들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나서서 뭐라 하는 것도 웃긴 노릇이었다.

여기 있는 세 명의 정체는 역시나 인신매매단이었다. 어느 곳이든 다양한 범죄가 일어난다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인신매매라니 너무나도 낯설었다.

게다가 엔레이드맨이 한 말에 의하면 그들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납치해서 돈을 받고 파는 짓을 반복한 듯했다.

엔레이드맨이 납치당한 나이를 생각하면 최소 20년 이상은 이곳에 터를 잡고 인신매매를 해 왔던 게 분명했다. 김 대리와 원 사원을 납치한 것으로 보아 꼭 어린아이만 사고판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는 산 아래에 판자촌을 짓고 생활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지금 발견한 인원은 세 명뿐이지만 여기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버스를 무형의 힘으로 폭파해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는 능력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중해지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여기 주변을 조사해봐 야겠어. 엔레이드맨, 둠(doom)을 해제해 봐.”

“네, 아버지.”

신재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막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둠은 결계 안과 밖의 세계를 단절시켜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말은 결계 안에서는 바깥의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 더 자유롭게 주변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결계 안보다는 밖에 있는 게 나았다.

인신매매단 세 명이 모여 있는 마을의 가장 왼쪽 집에서 반대편에 있는 오른쪽 집으로 향한 신재언은 곧바로 후회했다. 폭삭 주저앉을 것처럼 더러운 외관보다도 내부는 더 심각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이곳에 버리는지 썩는 냄새는 물론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벌레가 날아다녔다. 그나마 바퀴벌레가 가장 무난한 축에 속했다. 안쪽으로 발을 들일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못 볼 꼴 봤다…….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아.’

곧바로 확인하지 않은 마지막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이곳은 음식물 쓰레기도 없고 구더기도 없었다. 집집이 자물쇠를 걸어 두진 않아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마룻바닥이 얼마나 낡았는지 움직일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살펴보니 이 집 안에는 여기저기에 상자나 골동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이곳은 창고로 쓰는 모양이었다.

발치에서 뒹굴거리는 테디베어를 들어 올렸다. 붉은색 리본이 달린 곰 인형은 낡고 먼지가 가득한 게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재언은 테디베어의 털에 묻은 뽀얀 먼지를 탁탁 털어 준 뒤 선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창고에는 낡고 녹이 슨 로봇 장난감부터 바비 인형까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이것들의 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이 중에 엔레이드맨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재언은 탑처럼 쌓여 있는 곳의 맨 꼭대기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발돋움해 겨우 낚아채자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던 물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아차차.

숨죽여 슬그머니 바깥의 눈치를 살피자 다행히 저쪽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눈치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재언은 자신의 손에 있는 가방을 내려다봤다.

“역시… 이건 김 대리의 가방이잖아?”

이건 김 대리의 명품 가방이었다. 자기가 이걸 사려고 영국까지 가서 줄을 얼마나 섰는지, 이게 얼마짜리인지 아느냐며 하도 자랑을 해 대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들먹거리는 면상을 짓뭉개 주고 싶다는 생각만 여러 차례 했었다. 언젠간 이 가방을 몰래 한강에 던져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쳐다본 덕에 똑똑히 기억했다.

재언은 간절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었다.

“휴…….”

안에는 정말 다행히도 재언이 간절하게 찾던 두꺼운 파일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김 대리의 핸드폰과 기분 나쁜 손수건, 그리고 먹고 버린 과자봉지들이 잡다하게 있었다.

파일을 꺼내 안을 살펴본 신재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발품을 팔면서 손으로 끄적인 자료와 스크랩들, 리스트가 멀쩡하게 들어 있었다.

아직 컴퓨터로 옮기지도 못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새삼 백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은 채 파일철만 소중히 품에 안고 김 대리의 명품 가방을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역시 김 대리랑 원 사원이 여기 있었구나. 저놈들이 말한 종마가 원 사원인가? 하긴, 김 대리일 리 없지. 저런 놈을 종마로 쓰느니 인신매매 그만두는 게 나을 듯. 망할 대머리는 죽어도 싸지만, 앞날이 창창한 청년을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김 대리는 곱씹을수록 괘씸해 죽겠다. 그가 신재언의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채간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에 그가 부린 수작질은 의도가 빤했다.

이번 인사고과 때 재언의 승진을 막기 위해 치졸하고 악랄하게 군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