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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46화 (46/324)

46화

김 대리는 동기나 후배들이 하나둘씩 부장과 차장 등으로 승진을 이어 가는데 자신은 대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열등감이 상당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후임이자 직속 부하인 신재언이 대리로 승진할까 봐 사람이 고생해서 만든 자료를 가져가려고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김 대리가 없는 게 사회와 나를 위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재언이 씨근덕거리고 있을 때, 어중간하게 닫혀 있던 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얼마나 오래된 문인지 소름 돋을 정도로 거북한 쇳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엽총을 든 노인이 신재언을 죽일 듯 노려보며 서 있었다. 빼빼 마른 몸과 불룩한 배, 신재언이 툭 치면 어디 부러질 것 같은 노인이었지만 엽총을 든 모습이 참으로 기괴해 보였다.

그때 노인이 흉흉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모 씨! 박 씨! 이리 나와 봐! 여기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어! 계속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서 짐승이라도 내려왔나 보러 왔더니…….”

노인, 이 씨는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된 범죄자였다. 그는 삼십 년간 숨어지 내면서 사람들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를 저질러 왔다. 그가 팔아넘긴 사람의 수만 세자릿수에 육박했다. 수입도 꽤 짭짤했다.

눈앞에 있는 쥐새끼는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궁금했지만, 상당히 잘생긴 놈이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나쁘지 않으니 돈이 될 놈이었다.

하지만 이 씨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무장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찾아온 것을 보면 능력자일 가능성을 고려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삼십 년 동안 이곳에 숨어서 사람을 납치해 온 그는 능력자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씨는 능력자들이 이곳 산길까지 일부러 넘어오지 않는단 걸 잘 알았다.

먹고 자고 입는 걸 아끼느라 행색이 이 모양이지만 이 씨는 손에 든 절친한 친구 엽총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엽총을 눈앞의 젊은이에게 살짝 빗나가도록 겨누고 방아쇠를 손에 걸고 당겼다. 한 발 정도는 위협으로 쏴 줘야 다들 얌전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엽총이 달칵이는 소리만 날 뿐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총이 잘못된 건가 곁눈질로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자신이 모 씨랑 박 씨를 큰 소리로 부른 게 한참 전인데 둘 중에 아무도 오지 않은 것도 좀 이상했다. 결정적으로 잘생긴 청년의 반응이 가장 이상했다.

청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푸른색 눈동자가 어둡고 더러운 판잣집 안에서 형형하게 안광을 밝혔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와 오만한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설마 이 새끼 능력자인가?’

엽총을 눈앞에 두고도 여유롭게 서 있는 걸 보면 분명 능력자가 틀림없었다. 이 씨는 일단 다른 동료들을 불러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소리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헛짓거리해 대는 이 씨를 보던 재언이 얼굴이 손을 올렸다.

“여기선 내게 어떤 공격도 허락되지 않을 텐데요.”

“허억! 이봐, 모 씨! 또 자고 있는감?! 빨리 안 튀어와?!!”

그 순간 재언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 씨는 재언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놀라며 위협적으로 쓸모도 없는 엽총을 휘둘렀다.

하지만 현재 그가 손에 든 것은 엽총이 아니었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간 그의 동반자는 온데간데없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손목을 칭칭 감싼 촉수에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었는데 마치 거머리처럼 생겼고 뭉툭한 머리에서 미끄러운 체액을 뚝뚝 흘렸다.

“으, 으, 으아악!”

이 씨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촉수 괴물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 씨의 팔을 집어삼키며 점점 어깨로 올라갔다.

바닥에 피가 후드득 떨어지고 이 씨의 공포 섞인 비명이 가장 커다래진 순간 괴물의 머리가 불쑥 입을 벌리더니 이 씨의 머리를 와그작 하고 씹어 삼켰다. 발버둥 치던 이 씨의 몸이 마치 실이 풀린 인형처럼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

꿀꺽-.

‘뭐야, 왜 이렇게 무서운 건데! 대체 어젯밤 무슨 공포 영화를 본 거야. 엔레이드맨!’

이 씨가 본 여유롭고 오만해 보이는 남자 재언은 촉수 괴물을 본 순간부터 속으로 와들와들 떠는 중이었다.

사실 낡은 집의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이곳은 엔레이드맨의 둠(doom) 속이었다. 엽총이 발사되는 걸 엔레이드맨이 절대 허락할 리 없으니 여유롭게 있을 수 있었다.

둠의 안은 엔레이드맨이 상상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이루어지는 세계로 그의 상상력에 따라 저렇게 끔찍한 괴물이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동화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나오기도 했다.

중요한 건 어젯밤 엔레이드맨이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서 본 영화의 장르가 공포이며 우주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거였다.

‘그러니 저런 흉측한 것들이 나오지…….’

엔레이드맨이 둠을 거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치에는 이 씨가 쓰러진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빼빼 마른 노인은 눈에 보이는 둠 안에서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외상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심장이 멎어 있었다. 시체를 지나쳐 밖으로 나간 재언은 집의 다른 방을 살폈다.

시꺼멓게 눌어붙은 담뱃재와 타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남은 다른 집도 가 봤지만, 어느 곳에도 김 대리와 원 사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다른 두 명이 모여 있는 집이었다. 이 씨가 죽기 전에 필사적으로 불러 젖힌 모 씨가 능력자일까.

그냥 엔레이드맨에게 능력을 쓰게 해서 둘을 제압할까 했지만 그랬다가 김 대리와 원 사원을 찾을 수 없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조각난 장난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곳만 찾을 수 있었고 동굴 안에 숨겨진 곳이나 트릭을 써서 들어가야 하는 곳은 찾지 못했기에 이용할 수 없었다.

그때, 엔레이드맨의 왼쪽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조각난 장난감의 오른쪽 귀였다.

“조각난 장난감?”

엔레이드맨은 형제들에게 제법 엄한 축에 속했지만 유독 조각난 장난감에게는 무르고 친절했다. 두둥실 떠오른 조각난 장난감의 오른쪽 귀가 판자촌이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다른 절벽을 찾아냈다.

그곳은 풀숲으로 정교하게 가려져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아래쪽에 공간이 있었다. 이전에 루벤 섬에서 봤던 동굴 속 감옥과는 구조가 조금 다르지만 비슷했다.

바위 사이로 박혀 있는 말뚝에 줄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저것을 통해 오르내리는 듯했다.

재언이 말뚝에 이어진 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안쪽 공간에 발을 들이자 그곳엔 김 대리와 원 사원이 기절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을 숨겨 두었군.’

재언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모습을 살폈다. 손목과 발목이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원 사원은 반항이 심했던 모양인지 얼굴과 팔에 멍이 가득했다. 그에 반해 망할 김 대리는 어디 상한 곳 하나 없이 깨끗하고 멀쩡했다.

‘안 봐도 비디오지!’

분명 원 사원이 반항하고 있을 때 바닥에 딱 엎드려 싹싹 빌면서 항복했을 게 분명했다. 대머리 김 대리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 순간 김 대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재언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피에로 가면을 얼른 얼굴에 썼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맨얼굴을 그에게 보일 순 없었다.

인신매매범에게 덜 처맞은 김 대리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떴다. 눈을 깜박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피에로 가면을 쓴 신재언과 눈이 마주쳤다.

“…….”

“…….”

신재언은 혹시 가면이 벗겨진 걸까 하는 생각에 손을 들어 가면을 더듬거렸다. 김 대리의 눈이 기분 나쁘게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못생긴 배불뚝이 대머리 김 대리가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의 표정이 마치 동경하는 히어로를 만나게 된 어린아이 같았다.

반짝이는 어린애 표정의 김 대리라니, 상상만으로도 속이 거북한데 실제로 본 김 대리의 표정은 더욱 속이 거북해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다크 카오스’가 왜 여기 있지.”

“…….”

검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은 대외적으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때에 신재언이 쓰는 것으로 자식들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검은 십자가와 피에로 가면이 다크 카오스의 상징이 되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다크 카오스는 상징적인 인물일 뿐, 그의 자식들이 대단한 빌런들이었기에 가면까지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버드맨의 앞에서도 가면을 썼는데, 그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가면을 아는 사람들은 다크 카오스를 공공의 적으로 삼는 히어로 협회 사람이나 다크 카오스의 팬들뿐이었다. 사실 왜 팬이 생기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히이익!”

팔에 소름이 잔뜩 돋은 재언이 김 대리의 머리를 쳐서 다시 기절시켰다. 김 대리가 자신의 팬이라니, 두 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면 뒤의 얼굴이 잔뜩 창백해져 있을 것이다.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야겠어!’

“엔레이드맨!”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분위기에 뒤를 돌아보자 엔레이드맨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설마 김 대리의 충격적인 모습에 충격받았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엔레이드맨? 왜 그래, 엔레이드맨. 내 말 들려?”

“여, 여긴 어두워요, 아버지. 제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에요. 저는 여기에 갇혀서 계속 묶여 있었어요. 그때부터 계속…….”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람을 납치하고 가둔 것이라면 세 살의 엔레이드맨도 섬 노예로 팔리기 전까지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혹시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일까?

재언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지만 엔레이드맨의 반응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재언은 상태가 좋지 않은 엔레이드맨을 챙기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여기엔 원 사원과 김 대리 뿐이었다. 아마 어릴 때라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하다가 육체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체어맨에게 부탁해 원 사원과 김 대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위쪽에서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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