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인신매매단 두 명이 밖에 널브러져 죽어 있는 이 씨를 발견한 듯했다. 이렇다 할 외상도 없으니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재언은 엔레이드맨을 끌어안은 채 숨을 죽여 위쪽의 기색을 살폈다. 그 와중에도 엔레이드맨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이 양반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뭔 쥐새끼가 숨어 있다느니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느니 해 대더니만.”
“잠깐… 모 씨, 이 양반 죽었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해도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직된 몸이었다.
“이 양반… 나잇값도 못 하고 어지간히 술 담배를 즐기더니만… 죽어 버렸구먼.”
“에잇, 귀찮으니 바다에 버리자고.”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둘은 별로 슬퍼하는 감정도 없이 이 씨의 몸을 영차 하고 들어 올리더니 바다에 풍덩 빠트려 버렸다. 그 탓에 재언이 있는 절벽 아래까지 바닷물이 튀었다.
그들은 몇십 년을 함께 해 온 동료였지만 서로 이용만 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괄괄하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이 씨와 같이 다니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바깥을 경계하며 살피던 재언의 얼굴 옆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무엇인가 했더니 새하얀 손이었다.
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커다란 폭발음이 절벽 아래에 울렸다. 공기가 터지는 듯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자신의 위로 돌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지는 걸 느꼈지만 다행히 그는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정신을 차린 엔레이드맨이 빠르게 움직여 재언의 몸 전체에 둠을 펼친 덕분이었다.
신재언을 공격한 남자는 놀랍게도 원 사원이었다. 그는 묶인 두 손을 내밀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공격태세를 취했다. 그의 능력을 파악하기엔 시간이 짧았지만, 아마도 공기를 압축해 폭발시키는 능력이 아닐까 짐작했다.
저런 능력을 동굴 안에서 펼치면 절벽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재언은 일단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절벽 위로 도망쳤다.
그러자 엽총을 든 남자 두 명, 모 씨와 박 씨가 신재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쥐새끼가 숨어든 게 맞았군. 잘했다!”
모 씨가 능력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충격이었다. 게다가 온몸에 멍을 달고 있는 원 사원이 그들과 한패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욱 충격인 것은, 원 사원이 인신매매범들 앞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다가가는 광경이었다. 그는 굉장히 비굴하고 복종하는 데 익숙한 사람 같았다. 능력자이면서 모 씨가 손을 들자 몸을 잔뜩 웅크리며 벌벌 떨었다.
재언이 아는 원 사원은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온몸으로 굽신거린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었다.
모 씨와 박 씨가 능력자가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면 원 사원의 능력만으로도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진 않겠지만 재언의 의아한 기색을 읽은 모 씨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 새끼가 두 살이었을 때 데려온 내 노예 자식이지. 능력자로 발현되었을 땐 이미 나한테 복종한 뒤였다고…….”
모 씨는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말을 잘 들어서 계속 데리고 있다가 이번에 죽인 새끼로 신분세탁 해서 밖으로 보내 줬더니 멍청한 게 다시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그것도 쓸데없이 버스를 털어 와서 종마니, 뭐니 데려와 귀찮게 굴길래 개 패듯 패 주고 가둬 버렸지. 퉤! 근데 여기 쥐새끼들이 숨어 있었네?”
‘맙소사! 정말, 그 종마가 김 대리였을 줄이야! 아무리 봐도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를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들의 심미안과 종마를 고르는 기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모 씨의 말에 따르면 원 사원은 엔레이드맨처럼 어릴 때 납치당한 피해자라는 소리였다.
노예로 부려먹다가 ‘진짜’ 원 사원을 죽인 뒤 ‘진짜’의 신분을 넘겨주었다는 건데, 왜 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놈들은 어째서 노예를 놔준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이 아는 원 사원은 언제부터 원 사원이었을까.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원 사원은 이곳을 지나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같은 회사 직원을 납치해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원 사원은 인신매매 피해자면서 저 모 씨라는 남자의 노예를 자처했다. 그건 또 왜 그랬을까.
머릿속을 괴롭히는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원 사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공격을 재개하려는 거다.
뒤쪽에 있는 엔레이드맨을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아직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역시 엔레이드맨보다 다른 자식들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 순간 엔레이드맨이 두 손을 모았다가 펼쳐 작은 돔 형식의 반투명한 둠을 만들어 냈다. 양손 위에서 빛나던 그것은 폭발하듯 늘어나더니 절벽을 포함해 저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그의 능력을 각성시키자, 다시 살아난 그는 섬 전체를 가둘 정도로 거대한 둠을 만들어 냈었다.
팡-!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원 사원’이었을지, 도중에 ‘원 사원’으로 바뀌었을지 모르겠는 그가 신재언의 얼굴 가까이에 능력을 썼다.
그래 봤자 마치 비눗방울이 얼굴 옆에서 터진 것 같은 가벼운 느낌만 들었다. 그마저도 가면에 가려져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언이 가면 안의 뺨을 긁적이며 뒤로 물러나자 경악에 찬 ‘원 사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엔레이드맨의 둠에 갇힌 능력자들은 원래 능력의 10분의 1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으으, 어어… 느, 능력이 안 써져요…!”
공기가 폭발해야 할 것이 비눗방울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기겁할 만도 하지.
그들이 경악에 찬 소리를 내뱉는 것도 잠시 곧이어 발밑으로 거대한 나무줄기가 솟아나 발목을 감쌌다. 가장 먼저 박 씨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나무줄기의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발목이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능력자!”
거기에 그들 주변으로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흘러나오고 하늘에서 거대한 잠자리가 이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다.
그리고 거의 국제선 비행기 크기만 한 잠자리가 박 씨의 머리를 잡고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렇다고 땅에서 자라나온 나무줄기가 그의 다리를 놔줄 일은 없었다.
재언은 끔찍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주진 않겠지만 정신적으로 굉장한 고통이었다.
“저리 가! 저리 가!”
믿었던 능력자인 ‘원 사원’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자 모 씨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물리 능력자들은 엔레이드맨의 둠과 상성이 가장 나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힘이 약해진 그들은 이곳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엔레이드맨에게 유린 당해 죽을 것이다.
이번엔 절벽 위에서 집채만 한 벌이 날아왔다. 꿀벌도 아니고 말벌이었다. 창보다 두꺼운 침을 달고 날아오는 말벌의 날갯짓 소리가 헬리콥터보다도 컸다.
대체 어제저녁에 무슨 영화를 본 거야?
아까는 에X리언이더니 지금은 거대한 곤충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거대 말벌이 두꺼운 침이 달린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며 하강했다. 노리는 건 당연히 모 씨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모 씨는 죽지 않았다. ‘원 사원’이 온몸을 내던져 그를 구한 것이다.
“쿨럭!”
배가 뚫린 탓에 피를 한 움큼 토한 원 사원이 모 씨에게 말했다.
“괘, 괜찮… 으, 세요, 어르신…….”
“으아악! 으아아악!”
모 씨는 자신의 위로 피 흘리며 쓰러진 ‘원 사원’을 내동댕이치고 두 손을 휘두르며 말벌에게 맞섰다. 물론 저것이 평범하고 작은 말벌이라면 모를까, 엔레이드맨이 만들어 낸 괴물 곤충이 솜방망이 같은 공격에 당할 리 없었다.
말벌이 ‘원 사원’을 죽이고 유유히 날아가 버리자 이번엔 땅이 울퉁불퉁해졌다. 땅 밑에서 다가오던 어떤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모 씨를 낚아채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으아아악!”
모 씨의 비명이 땅굴을 타고 울려 퍼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신재언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셋 다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으니 엔레이드맨의 숙원은 해소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방금까지 창백했던 그의 안색에 점점 혈색이 돌아왔다. 그는 이제 당하기만 하던 섬 노예가 아니었다. 늘 기죽어 있는 주혀니라는 이름의 소년도 아니었다.
엔레이드맨이 둠을 거두자 세 구의 시체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원 사원’을 살피는 신재언의 표정이 복잡했다. 어릴 때 납치당해 그들에게 키워진 그를 위해 모 씨는 신분을 위조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진짜 ‘원태호’라는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모 씨는 대체 왜 납치한 노예를 풀어 주었으며 ‘원 사원’은 어째서 평범하게 사회에 나와서 살아갈 기회를 내던졌을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모 씨를 위해 온몸을 날리기까지 하고.
“…정말 어렵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재언이 그대로 시체를 내버려 두고 절벽을 빠져나왔다.
나와서 보니 안 그래도 어른스러운 척하는 엔레이드맨이 더욱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었다. 과거를 이겨 내고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감성에 취한 것 같았다.
한껏 성숙한 척하지만, 재언의 눈에 엔레이드맨은 여전히 그때의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지우며 김 대리를 그냥 두고 갈까 말까 4564번 정도 고민하던 재언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마을 어귀에 던져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리품을 들고 귀환한 신재언은 남은 주말을 편하게 보내는 게 불가능했다. 김 대리에게 되찾아온 파일철을 컴퓨터에 옮겨 담아 파일로 완성해야 했다.
이제 이건 김 대리에게 빼앗겨도, 그가 나가서 죽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김 대리는 그 이후로 일주일 정도 휴가를 받았다. 빌런들에게 습격당해 실종된 지 이틀 만에 인근의 마을 어귀에서 발견된 김 대리는 히어로들의 조사와 병원을 병행해야 하기에 일주일간의 휴가를 받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신재언은 그가 없는 일주일 내내 행복했다. 게다가 ‘원 사원’은 아무 데도 없고 김 대리만 발견된 탓에 그의 조사는 더욱 길어졌다.
김 대리는 어떤 남자들에게 끌려간 기억은 나지만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단 소리만 반복해 조사를 더디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지금쯤 발자국이니 흔적이니 하는 것도 사라졌을 테고 워낙 산세가 심해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헤매고 또 헤매다가 절벽 아래에 숨겨진 동굴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시체 네 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그들이 찾는 ‘원 사원’이었다.
그렇게 꿈만 같았던 일주일이 지나고 출근한 월요일, 신재언은 김 대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 양반 벌써 나와?’
짜증 나는 것도 잠시 그는 휴게실 구석에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아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볼록했던 배가 살짝 들어가 있었고 볼도 홀쭉해져 있었다. 전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나타난 김 대리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난 다크 카오스에게 선택받았어. 이거 히어로들에게 알려야 하나? 하지만! ‘다크 카오스’에게 선택받으면 그의 자식이 된 거잖아. 으윽… 부모를 배신하는 자식이라니, 있을 수 없어.”
재언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의 내용을 들고 조용히 물러났다.
역시 김 대리를 죽였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