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러다 문득 생각난 이야깃거리에 장난기가 생긴 재언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평범하게 조용하지만은 않다고요. 여기엔 전설이 하나 있으니까요.”
“전설이요?”
그냥 농담으로 말해 본 것뿐인데 차민재가 예상보다 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여 줬다. 그에 신이 난 재언이 조잘조잘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어렸을 때, 아이가 한 명 산속에서 실종됐대요. 그전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밤중에 어린아이 혼자 산에 들어가면 괴물들에게 납치된다는 내용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제가 밤에 혼자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셨어요.”
차민재가 어린 재언에게 부모님이 주의를 주는 걸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재언은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이 빠졌다.
“아, 실종된 아이는 한 달 뒤에 산에 있는 개울가에서 발견됐다고 해요. 그런데 한 달이나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도 못 했대요. 납치범들에게 몹쓸 짓을 당해 실어증에 걸린 것 아니냐는 말도 있긴 했지만… 이런 곳에 더 못 있겠다면서 아이와 부모님은 이사가 버리고 사건은 그대로 잊혀졌죠.”
“괴물이 산에 있다고요? 히어로들은 불러 봤습니까?”
“뭐… 아이가 실종되자마자 아이 부모님이 경찰과 히어로 협회에 의뢰를 넣었는데 괴물은커녕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대요.”
재언이 어깨를 으쓱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때마침 담장 너머로 탈탈 탈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모는 경운기 소리였다. 예상대로 대문이 열리고 경운기를 끌고 오는 중년 남성이 집으로 들어왔다.
덩치가 제법 있고 키가 큰 남성은 구릿빛 피부에 남자답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상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젊었을 땐 제법 준수했을 것이라고 짐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가 모는 경운기 짐칸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중년여성이 타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제법 이국적으로 생긴 여성이었다.
인간의 팔이 아닌 새하얀 날개를 달고 있어 한눈에 봐도 하피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밀짚모자를 쓰고 옷에 흙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걸 보니 아랫마을 쪽 밭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들~”
경운기에서 내린 신재언의 어머니가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모습에 두 날개를 활짝 펼쳐 세게 끌어안았다.
한참을 아들의 체온을 느끼던 그녀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친구를 데리고 온다더니, 정말 근사하고 멋진 친구를 데려왔다.
그런데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경운기를 차고에 넣어 놓고 돌아온 아버지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레드 헬 파이어!?”
“반갑습니다…….”
자신의 히어로명을 들은 차민재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그가 레드-헬-파이어라고 불리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재언은 깜짝 놀랐다. 혹시나 차민재가 아버지의 입을 찢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신재언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고 있으니 차민재가 웃으며 아버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차민재라고 불러 주십시오.”
“어? 아니… 어떻게 여길…….”
“재언 씨 지인으로 왔습니다. 일 년 전부터 친분이 생겨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번에 생신이라고 하셔서 찾아뵈었는데 혹시 실례가 되었을까요.”
“어? 어… 어?”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굳는다고, 아버지는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신재언의 어머니 나인영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온갖 선물들에 눈을 크게 떴다.
“어휴, 이렇게 많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소고기도 있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좋은지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직도 굳은 채 서 있는 아버지를 지나 재언은 민재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집 안에 침실로 사용하는 방은 총 세 개로 부모님이 쓰시는 안방, 신재언이 썼던 방과 손님용으로 쓰는 작은 방이 있었다. 서울로 떠나긴 했어도 그가 쓰던 책상이나 침대는 나갔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재언의 친구가 오면 잔뜩 부려먹을 수 있다며 즐거워하던 어머니는 레헬을 어떻게 부려먹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그에 차민재가 나서서 예쁘게 미소도 지어 가며 어머니가 하는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내숭을 떠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얌전하게 웃으며 집안일을 하는 그의 모습에 재언의 가슴이 근질거렸다.
차민재 쪽을 힐끔거리고 있자니 아버지가 와서 돈을 주며 말했다.
“넌 마을에 내려가서 고기랑 이것저것 좀 사 와라.”
민재를 이곳에 두고 가기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그가 부모님께 무슨 짓을 하겠냐는 생각에 재언은 아버지의 트랙터를 타고 마을로 내려갔다.
물론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집에 두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마음을 놓고 마을에 내려온 재언은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의심했다.
창백한 안색, 죽은 생선 눈알 같은 눈동자. 바로 ‘언럭키 네임리스’가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 양반이 왜 여기 있지? 여긴 내 고향인데? 설마 쫓아왔나?
경계심이 생기는 것도 잠시, 멍하기 짝이 없는 동태 눈을 보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엮이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모른 척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언럭키 네임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트랙터를 운전하고 있는 신재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결국, 재언은 마트 주차장에 트랙터를 두고 그가 있는 횡단보도로 걸어갔다. 한 번 밖에 만난 적 없지만 면식이 아예 없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냥 지나가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저… 안녕하세요. 여기는 어쩐 일로… 레헬을 찾아오셨어요?”
스케치북을 팔에 끼고 있기에 당연히 거기에 끄적여 대답할 줄 알았던 신재언은 언럭키 네임리스가 마스크를 벗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맨얼굴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피곤해 보였다. 입술에는 각질이 잔뜩 일어나 있었다. 그 입술이 열려 소리를 내는 을 보고 재언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기에 있었는데, 없어져서…….”
“네?”
“찾으러 왔어……. 내 마음.”
도대체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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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내가 S급 히어로인 언럭키 네임리스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프렌차이즈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게 된 걸까…….
언럭키 네임리스는 스케치북을 이용해 주문했다.
그런데 대체 왜 자신한테는 말을 꺼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는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도 힘이 빠질 것 같이 기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그의 모습에 결국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전부 제쳐 두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풀어야겠다.
“아까 점원에겐 스케치북으로 얘기하시던데, 저한테는 말로 하셨죠. 그러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대화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으니까.”
“……?”
“당신은 허락했고.”
‘아니, 진짜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좀 알아듣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한참 동안 우울한 눈빛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느 시골에 평범하고 활발한, 여느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유치원도 없는 시골이었기에 일곱 살까지 자유롭게 산속을 놀러 다니기도 하고 계곡에서 친구들과 가재를 잡고 놀았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다. 산속에 사는 친구와 친해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소년은 산속의 어두운 곳에 모여 사는 친구들을 발견한 지 일주일 만에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은색 천을 두른 그들의 얼굴은 촉수로 가득했다.
결국, 신재언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고 말았다.
“잠깐만요. 촉수라고요?”
“…응.”
신재언은 ‘평범하고’, ‘활발했다.’는 그의 말에 왜 이 사람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말하는 소년이 네임리스 본인이라는 걸 깨닫고 매우 당황했다.
산속에 얼굴이 촉수로 뒤덮인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신고를 해서 히어로를 불러와야 했건만 어린 소년은 그들을 발견한 걸 특별하게 여겼다.
소년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아주 유쾌했고 무언가를 항상 진지하게 쳐다봤다. 가끔 소년이 찾아가면 다 같이 재미있게 놀곤 했다. 그들은 소년을 붙잡고 촉수로 볼을 핥는 등 놀다가 저녁때가 되면 돌아갔다.
그때도 그런 날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상시처럼 소년이 그들을 찾아가자 갑자기 아주 검고 커다란 것이 소년을 덮쳤다.
겁에 질린 소년은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은 촉수가 달린 얼굴로 흥미로운 듯 소년을 쳐다보기만 했다.
괴물이 달아나는 소년의 등을 쫓아 달렸다. 그렇게 달리는 소년과 그를 쫓는 괴물은 한참 동안 산속을 휘젓고 다녔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소년이 넘어지는 바람에 괴물에게 잡히자 소년은 마구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뭐, 뭐야? 왜 그래? 나 갈래, 무서워!”
그렇게 소년은 한 달 동안 실종 상태가 되었고 소년의 엄마는 필사적으로 아들을 찾아다녔다. 그녀가 한 달 만에 아들을 되찾았을 땐, 이미 소년은 기억을 잃은 채였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저 산속에 아주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다는 것만은 직감적으로 기억했다.
그 이후로 소년의 이름을 부른 잔혹하게 하나둘씩 사고를 당했고 소년의 부모는 하나뿐인 자식을 데리고 도망치듯 이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