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51화 (51/324)

51화

이사를 가는 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원래라면 이런 날에 이사를 가진 않았겠지만,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소년의 부모는 이사 날짜를 단 하루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사를 가던 도중 달리는 그들의 차량 맞은편에서 트럭이 매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그것은 부모님과 자신이 탄 차량을 그대로 들이박고 전복되었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직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년만이 상처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트럭 운전사는 갑자기 핸들과 브레이크가 먹통이 되었고 누군가가 액셀을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진술했지만, 트럭에서는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못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이렇게 큰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 무언가가 소년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산속에서 만났던 그들의 촉수와 느낌이 똑같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소년은 슬프거나 기쁘거나 화나거나 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산속에서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소년은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적으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실종되었던 그날, 어두운 산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왔어. 빼앗긴 내 마음을 되찾으러…….”

거기까지 말한 언럭키 네임리스가 마스크를 다시 꼈다. 굉장히 무시무시하고 신기한 이야기였지만 재언은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든 것도 잠시, 언럭키 네임리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그에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들이… 네가 마음에 든대. 그러니까 내가 대화할 수 있게 허락해 준 거야. 다른 사람과 말을 하면… 여기가 아파.”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중얼거렸다. S급 히어로면 돈도 잘 벌고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강한 힘을 가졌을 텐데, 그는 별로 그런 거에 개의치 않은 듯했다.

단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신재언은 자기도 모르게 또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그의 인생 절반이 오지랖 때문에 망해 가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혹시 여기 있으면서 지낼 곳은 있습니까?”

“…….”

신재언은 정말 바보였다.

@

언럭키 네임리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늘어난 손님에 눈을 크게 뜬 어머니의 옆에서 예쁘지만 살벌한 웃음을 짓는 레헬이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

“우연히 만났는데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집에 초대했어요. 두 분 아는 사이잖아요. 하하…….”

“얼굴을 아는 사이긴 한데… 이렇게 마주 보고, 하하 호호 얘기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렇지? 언럭키 네임리스.”

‘뭐야! 생일 파티에 초대할 정도로 친한 거 아니었어? 원래 평범한 생일파티에는 껄끄러운 상대는 초대하지 않는 게 맞다고!’

차민재가 언짢은 표정으로 서 있어도 언럭키 네임리스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묵묵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언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죄송해요, 민재씨, 그런데 정말 갈 곳이 없어 보여서…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배려가 없었어요.”

“아니에요.”

그런 재언에게 살짝 웃어 준 차민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

“그의 곁에 있어서 좋은 꼴 본 사람을 못 봤거든요. 녀석과 이름뿐만 아니라 길게 알고 지내면 결국 저주를 받게 될 거예요.”

문득 신재언은 차민재가 언럭키 네임리스의 이름을 불러서 어떤 짓을 당했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건 마당에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터줏대감처럼 마당에 당당하게 나와서 활보하고 다녔던 복덩이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보자마자 낑낑거리며 집에 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재언은 오지랖을 부려 그를 데려온 게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언럭키 네임리스는 깨작거리며 밥을 먹은 뒤 마스크를 벗지도 않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잘 곳이 거실이나 드레스룸밖에 없다고 하니까 드레스룸을 선택한 듯했다.

그 후에 몇 시간도 안 돼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미 어두워진 산속으로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참외를 까먹다가 깜짝 놀라 말을 걸었다.

“어머, 얘 어디 가니?”

그녀가 날개를 퍼덕이며 조심스레 불러 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가 나간 문을 쳐다보는 그녀는 옛날부터 어두운 산속을 매우 무서워했다. 옛날에 밤중에 산속으로 들어간 아이가 괴물에게 잡혀 실종되었다는 시골 괴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렇게 언럭키 네임리스는 아주 늦은 새벽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에 자는 데 어렴풋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살짝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분명히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은 하나였는데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이상했지만 그것을 신경 쓰기엔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그는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옆에서 자고 있던 차민재는 재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한 걸 느낀 순간 벌떡 일어나 창문을 노려봤다. 창문에 무언가가 붙어서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레헬이 봤을 때 신재언은 겁이 없고 이상한 것들을 몰고 다녀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꺼져. 또 매운맛 보고 싶어?”

그것들은 레헬에게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매우 무서워했다. 그것들의 기척이 사라지고 민재는 재언을 다시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침에 눈을 뜬 재언은 눈앞에 보이는 널찍한 가슴에 잠이 확 달아났다. 이제 보니 자신이 차민재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했다. 차민재가 눈을 뜨기 전에 벗어나려고 했는데 타이밍 좋게 그가 눈을 번쩍 떴다.

끌어안긴 상태 그대로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떨어졌다.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안긴 꼴이 너무나도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방 밖으로 나오니 부모님이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혹시 언럭키 네임리스가 아직도 자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슬그머니 드레스룸 앞으로 다가가 문에 노크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슬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더니 그는 드레스룸 구석에 몸을 구긴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너무나도 곤히 자고 있어 깨우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친구는?”

혼자서 돌아오는 재언의 모습에 어머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비록 친구는 아니지만 설명하는 것도 애매해 부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물음에 재언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어제 밤늦게 잤나 봐요. 지금 깨우는 것도 불쌍하니 자게 내버려 두죠.”

어차피 오늘 저녁에 출발할 생각이었으니 그동안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

언럭키 네임리스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야 느지막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곧장 현관으로 직행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때 재언은 민재와 거실에 앉아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에 차민재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기에 몸을 일으켜 뒤를 쫓았다.

그런 신재언의 모습에 차민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기요, 언럭키 네임리스… 밥은 안 드십니까? 어머니가 남겨 주신 점심이 아직 남아 있는데 드시고 가죠.”

“…….”

그는 재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산속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쪽에 대체 무슨 꿀을 발라 두었기에 저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긴 신재언의 본가였다. 산 중턱에 터를 잡아 부모님이 삼십 년가량 살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마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구는 게 기분을 오싹하게 했다.

그때, 산 아래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신재언과 언럭키 네임리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략 50세가 넘어가는 중년 남성은 밭일하다가 급하게 튀어나온 듯 흙이 잔뜩 묻은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그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는 마을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줄곧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얼굴은 익숙했지만 친하진 않아서 그렇게 말을 붙였던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 혹시, 요만한 아 못 봤슈?!”

“네?”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보지 못했냔 듯이 아이의 사진까지 보여줬지만, 사진 속의 아이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 아이도 보지 못했다.

“우리 아가 어제부터 보이질 않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이 산이요. 혹시 근처에서 여섯 살 난 아 못 봤슈?!”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절박하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일단 그를 떼어 놓으며 진정시킨 다음 민재에게 손짓해 불렀다.

마지막으로 이 산에서 봤다고 하지만, 산은 너무 넓었다. 아이가 하룻밤 동안 산속에 있었다면 잘못될 확률이 아주 높았기에 남자의 표정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분 아이가 실종됐나 봐요. 마지막으로 본 게 이 산이라던데.”

“어? 너… 너, 태우 아니냐?”

이쪽으로 다가오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유심히 관찰하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가 내뱉는 이름을 듣더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전 어린아이일 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음에도 남자는 기억력이 좋은지 곧바로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불행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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