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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53화 (53/324)

53화

재언이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오른 사이 언럭키 네임리스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러나 완전히 제정신을 차린 것도 아닌 듯했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죽은 생선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는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극도로 두려운 무언가를 본 사람 같았다.

신재언은 땅바닥을 더듬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몽롱한 시선을 들어 올린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들어 올리는 손끝마저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대체 이곳에서 뭘 봤기에 저렇게까지 두려움에 떠는 것일까.

“괴물, 괴물이 있었어. 댁들도 봤쥬!? 괴, 괴물이… 괴물이.”

그들의 뒤에서 철물점 사장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 댔다. 히어로라면 민간인을 안전한 곳까지 보호하는 게 응당 맞았지만, 강하기로 소문난 히어로는 그런 사명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신재언이 나서서 민간인인 철물점 남자를 이끌어 먼저 산을 따라 내려갔다.

‘나 스스로… 빌런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히어로도 아닌데 내가 왜 나서서 이 사람을 도와주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 사람 좀 께름칙한데.’

거기다가 남자에게는 아직 걸려 있는 저주가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이후로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 있기도 매우 찝찝했다.

별수 없이 재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제집에서 잠시 머무시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버럭 화를 냈다.

“저 산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미쳤수, 당신? 저딴 산으로 내 다시는 안 올라가요.”

남자가 온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옛날부터… 이 산에는 어린애를 잡아먹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들었지만 설마 실존했을 줄이야……. 꿈에 볼까 무섭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재언이 강제로 데려가기라도 할 듯 누구보다 빠르게 멀어졌다.

이윽고 철물점이 있는 건물 뒤쪽의 허름한 골목길로 들어가더니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저런 낡은 대문은 일반 성인 남성의 힘으로 쉽게 부술 수 있을 텐데.

어느새 재언을 뒤따라온 차민재도 더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저주에 걸렸는지 결국 깨닫지 못했다. 그가 죽을 뻔할 때마다 레헬은 남모르게 능력을 쓰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말하지 않았다.

“저 사람 괜찮을까요? 아직 저주가 하나 남아 있잖아요. 민재 씨가 누군지도 모르는 게 히어로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 언럭키 네임리스의 이름을 불러서 본인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경고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민재는 재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해 왔다.

“재언 씨는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사실 이상한 점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그의 주변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들만 있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었다.

재언은 한차례 숨을 들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있기야 하죠……. 그 괴물 같은 존재가 데려간 아이… 사진으로 봤던 그 집 아들이 분명했어요. 하지만 저 남자는 죽은 듯한 자기 아이보다도 괴물이 나타난 것에만 신경 썼단 말이죠. 아들을 그리도 애타게 찾더니 괴물한테만 눈길을 주는 게 이상하잖아요.”

재언이 턱을 쓰다듬으며 혹시나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였다.

“마치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느라 눈을 내리깔고 있던 재언은 자신의 옆에서 굉장히 오싹하고 괴상망측한 미소를 짓는 민재의 표정을 차마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재언이 고개를 들자 민재는 예쁘게 빙긋 웃고 있었다.

재언은 민재의 매력적인 미소에 잠시 홀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가볍거나 헤픈 사람은 분명히 아니지만, 차민재는 틈만 나면 분위기를 야하게 만들거나 수작을 부려 와 재언을 곤란하게 했다. 물론 그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는 자신이 가장 문제였다.

“일단 언럭키 네임리스가 걱정되니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 사람 혼자 두면 여러모로 불안해서 원…….”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산 위로 다시 올라갔다. 아직도 같은 자리에 앉아 정신을 놓고 있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데리고 산 중턱에 있는 재언의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부모님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실 듯해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득 눈에 들어온 달력을 보고 눈물을 삼켰다.

‘주말이 다 갔네…….’

언럭키 네임리스는 아직도 창백한 낯으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배고프네요. 낮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아무것도 못 먹어서 시장한데, 간단하게 국수라도 해드릴까요?”

“저는 좋아요.”

상큼하고 반짝거리게 웃는 차민재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말아 준 국수를 나눠 먹은 뒤 방으로 돌아오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는 언럭키 네임리스가 보였다.

“정신 차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재언이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급하게 상체를 숙이더니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비닐봉지를 대 줄 시간도 없이 속을 게워 낸 그는 더러워진 이불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왓… 언럭키 네임리스, 괜찮은 겁니까?”

재언은 토사물이 몸에 튀지 않게 살짝 피한 뒤 바닥에 흐르지 않게 이불을 둥글게 말아 치웠다. 그런데 재언이 잠시 이불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언럭키 네임리스가 그대로 뛰쳐 나가 버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일어나는 재언을 민재가 막았다.

“재언 씨, 저놈은 제게 맡기고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민재 씨는 저와 그가 마주치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네요.”

“그는 위험합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를 사랑하는 존재들에겐 통용되지 않거든요. 저는 재언 씨가 위험에 빠지길 바라지 않아요.”

‘흠… 그것보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민재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당장은 더 고집부릴 생각은 없었다.

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물러나자 방긋 미소 지은 차민재가 뒤돌아 언럭키 네임리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런 민재의 뒷모습을 보던 재언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내며 짓궂게 웃었다.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다지만 일단 말려든 입장에서 궁금한 건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레헬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지켜보면 전투력 따윈 없는 조각난 장난감의 기척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살펴보고 와 줘, 조각난 장난감. 대신 너무 가까이 가서 화를 입지는 마! 상대는 레드-헬-파이어니까.”

재언의 말이 끝나자 동그란 눈알이 데굴데굴 구르다가 바닥에 떨어져 통통 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표시 같지만, 눈알이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광경은 매우 공포스러웠다.

창문을 열어 조각난 장난감이 밖으로 나가게 해 준 뒤 재언은 토사물이 잔뜩 묻은 이불을 화장실에 담가 놓고 바닥을 깨끗하게 닦으며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곧이어 바닥에서 언럭키 네임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헬이 주변에 없는 걸 보니 아직 그를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 그만… 그만 떠올리게 해!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지 언럭키 네임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혼자 어두운 산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땐 표정도 없고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 날 죽인 게 너희가 아니라 내 아버지였다는 거야? 웃기지 마! 안 믿어. 이딴, 이딴 기억 따위 믿지 않아… 으윽…….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겉으로 봤을 땐 그저 돌아다니고 있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무언가 보는 것처럼 말했다. 아마도 그에게 붙어 있는 상위존재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각난 장난감! 미안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보여 줘!”

신재언이 바닥에 대고 소리치자 화면 속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배경이 바뀌었다.

조각난 장난감은 보고 들은 걸 형상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포를 조금 떼어 내 다른 사람의 뇌 속에 침투하여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기억이라 사실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조각난 장난감도 이 능력을 쓰면 몹시 피로해 했기에 자주 쓰는 능력은 아니었다.

이윽고 화면은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숲속을 달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시야가 상당히 낮은 것으로 보아 어린 소년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언럭키 네임리스는 자신의 과거를 머릿속에서 보는 것 같았다.

간혹 뒤쪽을 바라보는 시야 끝에 검고 거대한 괴물 같은 것이 그의 뒤를 쫓아왔다. 그 검은 그림자는 보폭도 크고 어린 그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어느새 쫓아온 그것은 작고 여린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허공에 뜬 작은 육체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비가 내리려는지 어두운 하늘에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고 친 순간, 그의 목을 조르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소년의 시야에 가득 찬 그것은 촉수가 주렁주렁 달린 얼굴이 아니라 성장한 언럭키 네임리스와 닮은 중년의 남자였다.

’아, 아빠……!‘

어린 언럭키 네임리스의 목을 조르는 검은 괴물,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것’들이라고 믿었던 것은 바로 그의 친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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