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년 전에 김 대리에게 다른 후임이 붙었을 때, 그 후임이 참지 않고 김 대리가 이렇게 알려 준 것이라며 과장님에게 일러바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과장은 김 대리를 불러내 제정신이냐며 난리를 쳤고 김 대리는 이렇게 알려 준 적이 없다며 박박 우겼다.
결국 본인을 두고 상사 두 명이 싸워 대는 통에 신입은 견디지 못하고 그다음 주에 퇴사해 버렸다. 꽤 싹싹하고 일머리도 김 대리보다 150배 정도 좋았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이후로 김 대리에게는 후임이 정해지지 않고 재언이 맡아서 신입 교육을 대신해 왔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붙인 것 같았다.
게다가 김 대리는 원래도 이상했지만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이후 더 이상해졌다. 무언가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잔뜩 어두운 얼굴로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우연히 화장실에 갔다가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재언은 너무나도 소름 돋는 느낌에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난 다크 카오스의 자식으로 선택받았는데……. 이 개자식들… 여기를 죄다 폭파해 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러면 살려 달라고 빌어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다.”
원래 제정신이 아니었던 김 대리가 더 이상해졌으니, 저 신입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네… 이리 오세요, 대영 씨. 제가 알려드릴게요.”
잠깐 신입 사원의 업무 능력을 파악하던 재언은 그가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썩을 김 대리! 망할 김 대리! 그냥 콱 죽여서 사회악의 근원을 뽑는 게 낫지 않을까? 이왕이면 야근 확정인 회사도 같이 폭파해 주면 더 고맙고.’
신입에게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업무를 알려 주면서 재언은 칠일 밤낮을 꼬박 일해도 모자랄 업무와 보고서 리스트를 떠올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콰앙-!!
처음엔 지구가 무너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재언이 있는 건물 전체가 흔들릴 만큼 커다란 충격이 느껴졌다.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박거리고 곧이어 연속으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더욱더 커다란 진동이 찾아왔다.
“지진이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재언도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는 신입의 손목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폭발하는 소리와 진동이 한참 동안 이어지다가 이윽고 사무실 형광등 불빛이 깜박거리는 소리만 남게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책상 밖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설마 회사 폭발했으면 좋겠다고 염불을 외우는 바람에 자식들이 사고를 친 것일까?’
하지만 그 마음을 재언은 입 밖으로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여덟 자식 중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언이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회사건물이 폭파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거대한 폭발음이 뭐지?
창밖을 살펴보니 옆옆의 고층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건물이 있었던 자리가 온통 불과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건물은 왜 무너진 거고?’
재언은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걸 멍하니 쳐다보다가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 빠르게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컴퓨터에서 USB로 중요한 데이터들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세상이 멸망해도 출근해야 한다고 할 게 분명한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한 건 그뿐만이 아닌지 데이터를 백업하는 사람이 몇 명 눈에 보였다. 데이터가 이동하는 걸 멍하니 보는 중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 사원과 눈이 마주쳤다.
충혈된 눈동자와 퍼렇게 뜬 안색을 보니 그도 제법 오랜 시간 회사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중에 5일을 야근하면서 맞은편 자리가 비었던 적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대피 안 하십니까?”
남 사원은 한 달이 넘게 야근하며 고생했던 자료들을 잃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것만 백업하고요……. 그러는 재언 씨는 대피 안 하십니까?”
“저도 이것만 백업하고…….”
그리고 그건 신재언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백업을 끝내고 USB를 소중하게 품에 넣고 전속력으로 도망친 그는 밖이 더 아수라장이라는 걸 확인했다.
저 큰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렸는데 냉정하게 건물 안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언제, 어떤 건물이 추가로 무너질지 모르기에 도망치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
재언은 대체 어떤 빌런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궁금해졌다.
“엔레이드맨, 너희야?”
엔레이드맨이 약간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위대하신 아버지. 저희는 아닙니다. 다만, 조각난 장난감이 범인들의 모습을 봤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다크 카오스의 하위 조직을 자처하는 집단으로 보스가 가진 능력이 제법 강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대체 왜 히어로 협회 바로 앞에 있는 빌딩을 폭파한 거야?”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경찰차와 구급차는 물론 협회 건물에서 쉬고 있던 많은 히어로들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렇듯 서울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이곳은 히어로 협회의 본부가 존재하는 동네였다. 그 때문에 이런 자살행위 같은 짓을 저지른 빌런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보스에게는 말썽꾸러기 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사람을 죽여 히어로 협회가 운영하는 감옥에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동생을 풀어 주지 않으면 이쪽 단지의 빌딩들을 하나씩 폭파하겠다는 협박문을 협회에 보내기도 했고요. 이런 짓을 한 것으로 보아 히어로 협회에선 그 동생을 풀어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엔레이드맨이 마치 남 말하듯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사람을 죽였다니, 쓰레기 아닌가?
거기다가 엔레이드맨의 다음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히어로 협회에서 기삿거리가 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본부가 있는 지역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니 감추고 싶었겠죠. 그 보스의 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지나가던 노부부가 꺼 달라고 했다는 것에 기분 나빠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쓰레기네.”
재언이 열불 터진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소리쳤다.
“정말 쓰레기네!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다니……. 평생 감옥에서 썩어도 모자라.”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재언은 히어로들이 점점 모여들자 일단 엔레이드맨을 보냈다.
역시 본부가 앞이라 그런지 S급 히어로들이 잔뜩 있었다. 그중에서 짧은 단발머리에 흰색 천으로 눈을 가린 여성이 사람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반짝이는 커다란 구슬 같은 것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하늘 위로 두둥실 띄워 올렸다. 그러자 구체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로 한국의 유일한 S급 힐러 광안(狂眼)의 성녀였다.
재언은 예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그녀가 귀신들의 성녀와 싸운 적이 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녀는 히어로명과는 다르게 매우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새하얀 구슬을 이용하면 얼마나 크게 다쳤든 죽지만 않으면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면 굉장한 능력이지만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생명력을 빼앗겨 결국엔 목숨을 잃게 되는데, 그렇게 빼앗은 생명력을 자신이 들고 있는 구슬에 담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사용했다.
히어로인 그녀가 무고한 사람의 생명력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사형을 선고받은 빌런들의 사형집행을 도맡아 하는 것으로 힘을 모았다.
그 때문에 평소엔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다녔다.
그녀에게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그녀보다 강하면 된다.
S급 능력자인 그녀보다 강한 능력을 가진 이가 거의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다친 분은 더 없으신가요?”
“아, 여깁니다, 성녀님.”
“좋습니다. 심하게 다치신 분들은 손대지 마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침착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은 성녀 그 자체였다. 실제로도 꽤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재언은 그녀와 털끝 한 올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파를 헤쳐 그곳을 빠져나와 그녀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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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내일부터 재택근무가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히어로 협회가 숨기려고 했던 사건이 결국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40층 건물을 폭파해 폭삭 주저앉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재택근무를 한다고 일이 줄어들진 않았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데다 10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온 재언은 TV 화면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보던 드라마들이 줄줄이 휴방되어 뉴스로 대체되었다.
- 이번 서울에서 테러를 자행한 테러범들이 쓴 협박 편지가 히어로 협회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히어로 협회는 이번 일에 대해 사죄하는 기자회견을 열면서 책임자인 XXX 소장을 파면하기로 했습니다.
테러범들은 자신들이 다크 카오스의 하위 조직이라고 말했다지만, 신재언은 그런 하위 조직을 단 한 개도 허가한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다크 카오스의 이름을 사칭하고 다니는 놈들이었다.
그런데도 나서서 말리지 않은 건 말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빌런의 범죄행위를 막는 건 히어로가 할 일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괜히 끼어들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엄청나게 놀라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것도 아니고…….
히어로들도 이번엔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듯이 언론을 통해 일정을 잔뜩 떠벌리고 있었다.
- 테러범들은 익일 자정까지 XXX을 풀어 주지 않으면 이번엔 강남 테크노밸리를 파괴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미 전적이 있는 폭파사건을 대비해 이번에는 히어로들이 대거 투입될 예정입니다.
맥주를 마시며 뉴스를 가볍게 듣고 있던 재언은 이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것을 뱉어 내고야 말았다.
“푸우웁! 콜록! 콜록!”
그는 사레가 걸린 탓에 기침을 한참 동안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뉴스에서 소개하는 강남의 테크노밸리 건물은 20층부터 36층까지 재언의 회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회사가 폭파되었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염불을 외워 대긴 했지만, 만약 진짜로 회사가 폭파되기라도 한다면!?
회사가 망하면 겨우 취업한 게 말짱 도루묵이 될 테고…….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주가 급여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야근 수당과 인센티브가 빵빵한 나의 월급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