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56화 (56/324)

56화

- 얼굴이 알려진 녀석들이 아니라 애를 먹고 있어요. 근처 CCTV를 아무리 돌려봐도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혹시나 해서 떠본 건데 의외로 쉽게 알려 주네. 딱히 비밀은 아니었던 건가.’

역시 히어로 협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그런지 레드 헬 파이어도 엮여 있었다.

재언은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회사 건물이 정말로 폭발해 버려서 회사가 망한다면 아주 곤란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면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새로 직장을 구하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한 달 동안 고생했던 월급이 날아가게 생겼다.

월급날을 눈앞에 두고 회사가 망하다니.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악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폭파된 건물하고 재언 씨가 일하던 곳이 가깝던데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네. 건물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아무 데도 다치지 않고 멀쩡합니다. 당분간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뉴스를 보니 직장을 잃게 생겼더라고요.”

- 하하, 재언 씨가 백수가 되면 제가 먹여 살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만 있을 수 있게 해드릴 테니까.

“…….”

이거 그거지?

나를 감금하겠다고 예고한 거지?

집에 가둬 두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 맞지?

차민재가 은근히 부리는 수작질에 재언은 혀를 내둘렀다. 그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어색하게 웃어 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역시 레헬에게 사건의 경위나 진척을 들을 순 있어도 도움을 받는 건 깨끗이 포기해야겠다. 그렇다고 제 자존심만 챙길 줄 아는 무능한 히어로 협회가 활약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슨 짓을 써서라도 빌런 놈들을 저지해야 했다.

폭탄 테러의 주동자를 찾아내 공격 목표를 다른 건물로 바꾸든 테러를 멈추든, 혹은 그 쓰레기 같은 동생 놈을 포기하게 만든다거나 그냥 본인더러 죽으라고 하든 고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다크 카오스의 하위 조직을 사칭하는 놈들을 다크 카오스가 나서서 처리한다. 이만큼이나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빌런이 빌런을 저지한다니.

“…맥주, 맥주가 필요해.”

@

재언은 엔레이드맨과 조각난 장난감이 반나절을 꼬박 주시하며 그들에 대해 알아 온 것을 살펴봤다.

그들은 그저 그런 뜨내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세력이 있는 어엿한 빌런 연합이었다. 또한, 다크 카오스가 지어 줬다는 ‘다크 스콜피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들과 마주친 적도, 이름을 지어 준 적도 없는 재언은 그 부분에 이르렀을 때 정신적인 충격으로 잠시 비틀거렸다.

놈들이 앞에 있다면 누가 니들 아버지냐고 소리 지르며 머리채를 잡고 흔들 수 있을 만큼 충격이 컸다.

사실 전 세계에 ‘다크 카오스’의 부하를 자처하는 빌런은 차고 넘쳤고 그중에는 정말로 자식들이 통솔하는 연합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재언은 그쪽으로는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도 별로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싶지 않은 데다 한번 나서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크 스콜피온’은 자식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연합이었다. 하긴, 연관이 있었다면 재언이 다니는 회사 건물을 테러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볼품없었던 연합이 다크 카오스의 이름을 덮어쓰자마자 점점 세력을 키우더니 지금은 대한민국의 커다란 골칫거리로 성장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해 온 짓을 살펴보니 강도질은 물론 사기에 도박까지 연루되지 않은 범죄가 없었다. 아주 가관이었다.

심한 두통이 올라오는 느낌에 재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사건의 발단이 된 녀석의 범죄 이력을 찾아 살펴봤다.

‘다크 스콜피온’의 부두목이자 두목의 친동생인 녀석은 머리까지 근육으로 꽉꽉 채워진 무식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놈이었다.

술집에서 난동을 부려 경찰서로 끌려간 게 두 번, 지나가던 여성들을 겁주고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잡혀간 게 세 번이었다. 딱 저열하고 더러운 불량배의 표본 같은 놈은 현장에서 구속되었다가 모두 집행유예로 빠져나왔다.

지금까지 뒤에서 형이라는 놈이 수작질을 부려 왔겠지만, 녀석이 이번엔 빠져나오기 힘든 사건을 저질렀다.

[산책 중이던 노부부가 금연 구역인 공원에서 흡연하는 그에게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라며, 꺼 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건넸지만, 일방적으로 폭행. 할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사망, 할머님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뇌사 판정 후 사흘 뒤 사망.]

“…생각보다 더한 쓰레기잖아?”

이런 쓰레기를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게 대의를 위해서도 좋으련만, 그의 친형인 빌런 ‘검은 전갈’은 그러지 못했다.

친동생을 매우 아끼는 ‘검은 전갈’은 강력한 독을 가진 인간으로 발꿈치에서 독침이 나오는 능력자였다. 대외적으로 움직일 땐 하위 조직원을 대리로 세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암살에 아주 적합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놈이 강남 한복판에 있는 40층 건물을 폭파한 것도 모자라 동생을 놔주지 않으면 추가 테러를 하겠다고 협박문을 보내고 있다.

참으로 짜증 나게 우애 깊은 형제애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 저희는 늘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탁에 앉아 검은 십자가를 든 여덟 명의 개성 넘치는 자식들이 재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꽤 멀리까지 가게들이 문을 닫았네. 하긴… 그런 폭발이 있었으면 나 같아도 무서워서 못 나오지.’

재언의 회사 건물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대피 명령이 떨어진 탓에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도 전부 문이 닫혀 있었다. 한참을 차로 멀리까지 간 뒤에야 겨우 오픈한 카페 한 곳을 발견해 들어갔다.

재언이 한적한 매장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한 뒤 구석진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미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싱긋 웃고 있는 어떤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귓불 아래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하얀 천으로 눈을 감싸고 있었다. 눈에 띄는 인상적인 행색에 재언은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챘다.

‘광안의 성녀?’

대외적으로 유명한 히어로를 재언이 알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그녀가 재언을 알아보는 건 조금 이상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인사한 걸 착각한 것인가 주변을 돌아봐도 매장에는 카페 알바생과 자신뿐이었다.

눈이 가려져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순 없으나 몸은 자신을 향해 있었기에 재언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S급 히어로 광안의 성녀 맞으시죠? 그런데 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차민재의 생일파티에서 그의 곁에 있는 당신을 봤거든요. 그래서 아는 척했어요. 혹시 불편하셨나요?”

‘불편해……. 엄청 불편하지.’

하지만 면전에다 대고 불편하다고 말할 용기는 없는 소심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지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이번에 큰일이 있었잖아요. 그때 당신을 본 것 같았어요. 다친 곳은 없는지 궁금해서 말을 걸었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두 팔을 살짝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했다.

일분일초라도 다른 히어로와 엮이고 싶지 않건만 그녀에게서 자리를 뜨려는 기미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유일한 S급 힐러씩이나 되는 분이 한가해서 이럴 리는 없다.

불안감에 재언은 그녀가 무어라 말을 걸기 전에 자리를 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타이밍도 좋게 그녀가 입을 여는 게 빨랐다.

“정말 끔찍해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혀간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해서 죗값을 받은 것뿐인데 큰 피해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선 더 큰 피해가 나오기 전에 그를 풀어 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히어로 협회에서 이번 사건을 광안의 성녀에게 맡긴 듯했다.

하긴, 여기서 레헬이 전면에 나선다면 협회의 이미지만 떨어질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레헬이 이번 테러를 막지 못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히어로 협회의 콧대가 꺾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선책으로 그녀에게 맡긴 듯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다 맡겨 버리는 비겁한 짓을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범죄자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고 정당하게 내려진 형량이 끝난 후에 사회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번 일로 그를 풀어 주게 된다면 이후에 수많은 빌런이 고삐 풀린 듯 테러를 자행하며 동료, 혹은 가족의 석방을 요구하게 되겠죠. 그렇다면 피해를 보는 건 힘없고 약한 시민들이랍니다.”

재언은 그녀의 말에 한 가지만 빼고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는 시민들의 안위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녀는 약속이라도 있는지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S급 히어로가, 아니 성인이 끼기에 어울리지 않은 캐릭터 시계였다.

눈을 가리고 있는데 시간은 어떻게 확인한 걸까?

재언이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그녀가 손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제 딸이 선물해 준 것입니다.”

“아.”

그녀에게 자식이 있다는 건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씁쓸하게 웃는 것을 보니 건들면 안 되는 부분을 건든 것만 같아서 미안해졌다.

“재언 씨랑 대화하면 편하고 좋네요……. 언럭키 네임리스에게 들은 얘기로 궁금했던 차에 우연히 만나서 재언 씨의 시간을 잡아먹고 말았어요.”

“저도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다른 약속이 있으신 겁니까?”

“네. 이번에 뵙기로 했거든요. 피해자의 유족분들과.”

피해자가 누구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재언은 유족이 노부부의 가족임을 바로 눈치챘다.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그녀가 피해자의 가족들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언은 과연 히어로가 그들에게 건넬 첫마디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인사를 하고 매장을 나간 뒤 재언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분리수거까지 꼼꼼하게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매장 앞의 도롯가에 가만히 서서 택시를 잡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택시를 잡는 요령이 없는 건지 지금 돌아다니는 빈 택시가 없는 것인지 그녀는 여태 출발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와의 대화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재언은 히어로와는 엮이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을 깡그리 잊고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택시 잡으세요?”

“네. 그런데 택시가 잡히질 않네요.”

‘S급 힐러 정도면 돈을 꽤 잘 벌 텐데 희한하네. 앞을 못 보니 운전을 할 순 없겠지만 운전기사 정도는 고용할 수 있지 않나?’

재언은 마침 눈앞에서 쌩하니 지나가는 택시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녀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 귀신들의 성녀가 지금 재언의 모습을 보면 울고불고 난리 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곤경에 빠진 그녀를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 차 가지고 왔는데 모셔다드릴게요.”

그리고 궁금했다.

S급 히어로인 그녀가 피해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할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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