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57화 (57/324)

57화

도착한 곳은 연식이 오래된 한국의 아파트였다. 지하 주차장이 없어 지상 주차장엔 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가까스로 자리를 찾아 주차한 재언은 아파트 건물 입구까지 광안의 성녀를 배웅해 주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하는 내내 재언은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생경한 느낌이라 마음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예전에 귀신들의 성녀와 싸웠을 때 봤던 그녀는 금색 안광을 번뜩이며 살벌한 분위기를 폴폴 풍겼는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일반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귀신들의 성녀는 줏대 없는 위선자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했지만 말이다.

운전석에 탄 재언은 자동차 핸들에 올려놓은 팔 위에 얼굴을 묻고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광안의 성녀가 조수석에 올라탔을 때 조각난 장난감의 귀 일부를 그녀의 옷에 묻혀 두었다. 완전한 귀가 따라간 게 아니라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놓치기 쉬웠다.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겉으로 봤을 때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지라 계단을 오르는 듯했다. 걸음이 일정한 속도였다가 다시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꽤 길게 이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으니 4층이나 5층에 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 목소리. 나이는 중년쯤?’

- 만나서 반갑습니다.

- 들어오세요.

광안의 성녀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간 듯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여기 앉아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대접해드릴 것이 오렌지 주스랑 커피밖에 없네요.

- 아, 오렌지 주스면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손님을 위해 음료를 준비하러 간 듯 잠시 멀어졌던 걸음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테이블 위에 컵을 놓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말을 꺼내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죽인 놈을 풀어 달라고 빌런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요……. 덕분에 무고한 시민들만 피해를 보았겠군요.”

“대부분의 부상자는 제가 치료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 탓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재언이 봐 왔던 히어로들과는 달리 광안의 성녀는 사명감도 있었고, 시민을 존중하며 생각할 줄 알았다. 생명을 빼앗는다는 살벌한 능력과는 반대로 실의에 빠진 시민을 위로할 줄 아는 점잖은 히어로 같았다.

- 제가 이렇게 찾아뵌 것은, 유족분의 걱정대로 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인터넷이나 테러 피해자들의 인터뷰 영상 댓글에는 더 많은 희생이 나오기 전에 일단 범인을 풀어 주고 나중에 그의 연합원들을 일망타진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슬금슬금 언급됐다.

물론 그렇게 되면 더 큰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한 치 앞만 보면 안 되고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했지만 말이다.

광안의 성녀가 한 말로 미뤄 봤을 때 히어로 협회에서도 테러 때문에 범인을 풀어 주는 선례를 남기지 않게끔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 부모님께서는 금실 좋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주말마다 봉사를 나가셨고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모았던 퇴직금을 기부하셨죠.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음에도 지금 생활도 충분하다 하시며 검소하게 살아오셨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정기 후원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분들이 왜 그런 악독한 자식에게 죽어야 했을까요?

- …….

차오르는 울분을 참아 내지 못한 듯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어갔다.

-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잘 지내시냐고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저녁에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 개자식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법정에서 실실 웃으며 시시껄렁한 잡소리 따위나 하던 그놈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놈은 그곳에서 평생을 썩어야 해요!

결국, 남자는 마지막에 가서 울분을 터트리듯 소리쳤다. 그는 말을 멈추고 잠깐 씨근덕거리다가 또다시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강아지 산책 중에 그런 봉변을 당하셨는데……. 제발 그만 때리라고 무릎을 꿇고 비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그 악독한 놈은 연약한 노인들을…….

- …….

남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울음을 참는 듯 숨소리가 거칠었다.

- 토리가… 밥을 먹지 않습니다. 제 주인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텐데, 저 작은 강아지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날 이후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듯 저러고 앉아서 물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합니다. 불쌍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유일한 것은 강아지뿐인데……. 이 아이마저 잘못될 것 같아서 두려워요. 저렇게 기다려도 부모님께서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텐데…….

마지막에 가서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 사람처럼 넋두리하듯 한참을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조각난 장난감, 돌아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광안의 성녀가 나오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야 했고, 더 오래 붙어 있으면 들켜서 조각난 장난감이 다칠지도 모른다. 귀의 일부라도 다치면 안 되기에 조심해야 했다.

“오호호호…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혹시 화가 나신 건가요?”

분명 아무도 없었을 뒤쪽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백미러를 통해 확인하니 귀신같은 몰골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귀신들의 성녀가 보였다.

‘무서워 죽겠네.’

분명히 낮인데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이 놀랐다. 정말 귀신이 뒤에 앉아 있는 줄 알았다. 야간 운전 중에 저렇게 나타나면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자식들 대부분은 신재언이 부르거나 그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만 나타났다. 심지어 레드 헬 파이어와 자신이 만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그들이었다.

물론, 그 덕에 차민재와 썸을 탈 수 있는 것이지만…….

저렇게 먼저 나타나서 말을 건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안의 성녀가 나섰기 때문인지 귀신들의 성녀가 나서고 싶어 하는 듯했다.

재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동자만 굴려 아파트 건물을 노려봤다.

“그래. 이번엔 좀 열 받았거든.”

@

술병이 테이블 위에 가득 나뒹굴었다. 그곳뿐만이 아니라 바닥과 소파 위에서 빈 초록색 술병들이 가득했다. 마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쓰레기장이 된 소파 위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는지 비틀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애는 불쌍한 애야……. 부모 사랑도 제대로 못 받았고 어릴 땐 매일 굶주리면서 살았다고! 보육원에서도 눈칫밥이나 먹으며 늘 참고 살았단 말이야. 그래서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거야. 그러니까 애를 건들지 말았어야지. 불쌍한 내 동생을 왜 또 건드려서…….”

술을 마시기만 하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푸념이었다. 그는 빌런명 ‘검은 전갈’인 다크 스콜피온의 두목이었다.

숨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탓에 얼굴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는 동생을 굉장히 아끼는 형이었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어릴 적부터 동생과 뒷골목을 전전하며 굶주리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쓰레기인 부모 밑에서 형제는 살아남기 위해 아주 힘겹고 고난에 빠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까지 빌런 연합을 키워 놓은 건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동생은 형보다도 더한 쓰레기였다. 자신보다 강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항상 약할 것 같은 약자에게만 강해지는 전형적인 쓰레기의 표본이었다.

다크 스콜피온이 세력을 불리고 어엿한 빌런 연합으로서 사회의 규범을 알차게 말아먹는 동안 형이 제 말에는 꼼짝도 못 한다는 걸 안 그의 동생은 더욱 안하무인이 되어 갔다. 아무리 경찰서를 들락거려도 패악이 멈추지 않았다.

저러다 언젠가는 큰코다칠 것이라고 부하들 모두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검은 전갈의 독침에 맞아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생은… 먼저 건들지 않으면 폭발하지 않는다고……. 그냥 얌전히 지나가면 됐잖아. 퉤! 그 노망난 노인네들 때문에 앞길 창창한 동생이 잡혀갔잖아.”

그때, 중얼거리는 그의 귓가를 무언가가 쓰다듬었다. 서늘한 손길에 검은 전갈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가 얼굴을 맞대고 대작하는 이들은 오로지 연합의 간부들뿐이었고, 그마저도 추리고 추려서 정말 믿을 수 있는 놈들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니 지난밤에 함께 술을 마신 이들은 모두 맞은편에 앉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들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의문의 손길은 여전히 검은 전갈의 귓가를 쓰다듬는 중이었다.

“누구냐!”

검은 전갈이 바닥에 뒤꿈치를 치면서 소리쳤다. 뒤꿈치에서 튀어나온 뾰족한 가시에서 독이 뚝뚝 떨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는 맹독이었다. 그는 이 능력으로 지옥에서 살아남아 왔다.

“호호… 호호호… 맞이하세요, 우리들의 위대하신 아버지를…….”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새하얗고 사람의 손처럼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손이 그의 귓가를 지나 뺨을 어루만졌다. 옆눈으로 보이는 손톱이 무척이나 길고 뾰족했다.

그때, 허공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가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가 함께했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술이 깼는지 간부 중 한 명이 정신을 차리고 술병 사이에 숨겨 두었던 권총을 꺼내 겨눴다.

총구가 자신을 향해 있는데도 피어로 가면의 남자는 무섭지도 않은지 굉장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가면에 표정이 가려져 있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피어로 가면의 남자가 느긋하게 소파로 다가가 앉는 사이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오히려 얼굴을 흉악하게 만들면서 펄펄 뛰었다.

검은 전갈의 귓가를 만지던 새하얀 손이 사라지더니 총을 겨눈 간부의 앞에 나타났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손톱이 손목을 긁어 버린 탓에 총을 바닥에 떨군 간부는 발발 떨며 주저앉았다.

이윽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의 웃음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벌벌 떠는 방 안의 사람들을 구경하던 피에로 가면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날 따르고 섬긴다면서 부하를 자처하더니 정작 나를 모르는 건가?”

낮은 울림이 있어 듣기 좋은 미성을 가졌지만, 그의 말뜻은 매우 두려웠다. 검은 전갈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의 부하를 자처해 세력을 키우긴 했어도 그가 몸소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의 남자가 바로 빌런들의 왕이자 세계를 혼돈에 빠트릴 다크 카오스라는 사실을 검은 전갈은 드디어 눈치챘다.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저, 정말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눈치가 빠른 검은 전갈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음산하게 웃으며 돌아다니던 귀신이 한걸음 물러났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피에로 가면의 뒤에 붙어 있던 여자는 거대 빌런 중 하나인 귀신들의 성녀가 분명했다. 목숨이 이대로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위험한 빌런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아버지인 다크 카오스의 안전과 안녕을 가장 우선시하는 자식이며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귀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귀신으로 만든 뒤에는 더 잔인하고 악독하게 괴롭혔다.

하지만 검은 전갈은 그 무엇보다도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있는 피에로 가면이 가장 두려웠다. 피에로 가면 너머의 푸른색 안광을 번뜩이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꿇어.”

“예……?”

“꿇어서 용서받아 와. 그렇지 못하면 너와 네 동생은 반드시 죽을 테니까.”

누구에게?

검은 전갈이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끔찍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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