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검은 전갈은 왼쪽 다리에 가해지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오른쪽 무릎에도 똑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자의는 아니지만 결국 다크 카오스가 말한 대로 양쪽 무릎을 꿇는 모양새가 되었다. 강제로 검은 전갈의 무릎을 꿇게 만든 여자는 섬뜩하면서도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손톱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았다.
“끄으윽… 왜,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게 더 괘씸한 걸 알기나 할까.
검은 전갈이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방에 있던 연합 간부들 전부 귀신에게 붙잡혀 정신을 놓은 상태였기에 그를 도와줄 아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크 카오스가 느릿하게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멈추더니 검은 전갈 쪽으로 몸을 다시 돌렸다. 그의 곁에선 여전히 냉기를 폴폴 풍기며 음산한 분위기를 가진 귀신이 흔들흔들 맴돌았다.
피에로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마치 떠돌아다니는 먼지를 쳐다보는 듯한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다크 카오스는 검은 전갈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말없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 방울을 흔들어 악귀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악귀들이 자신의 앞으로 모이는 것을 본 검은 전갈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누구에게 사과를 하란 말입니까!”
“네가 아까부터 주절거린 그 사람들 말이야. 네 동생이 죽인 노부부에게 사과해서 용서받아 와. 그들이 용서해 주면 너와 네 동생을 놔줄 테니까.”
검은 전갈은 다크 카오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봤다. 그러다 겨우 이해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용서를 구하라니, 동생이 죽인 그 노인네들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용서를 구해.
이제 보니 다크 카오스는 그냥 트집을 잡고 있는 거였다.
황당하고 분한 마음에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겁이 나서 겉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이대로 있다간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동자만 굴려 탈출구를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는 다크 카오스가, 창문 앞에는 귀신들의 성녀가 서서 양쪽으로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어. 동생을 포기해. 그를 포기하면 네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다크 카오스의 제안에 검은 전갈은 대답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 동생은 목숨보다 소중한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이렇게 포기할 거였으면 진즉 버렸을 것이다.
다크 카오스는 그런 그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는지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내색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라니……. 어떻게 말입니까.”
검은 전갈의 잔뜩 억눌린 목소리에 대답한 건 귀신들의 성녀였다.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지 마세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절대적인 진리이며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녀의 대답 같지 않은 대답에 검은 전갈은 다크 카오스가 자신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습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도망쳐야겠다. 눈치채지 못하게 독침을 꺼내서 다크 카오스에게 던지면 귀신들의 성녀가 나설 것이다.
제아무리 거대 빌런인 그녀라도 방심할 수 있으니 그 틈에 도망쳐서 동생을 탈출시켜 해외로 같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응애-.
갑자기 발밑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확인하자 온몸을 옹송그려 앉아 울고 있는 갓난아이가 보였다.
뒤통수만 보고 평범한 아기인가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든 아기와 눈이 마주치자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는 데다 뾰족한 이가 잔뜩 보였고 흉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히이익!”
검은 전갈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도 전에 어린 악귀가 튀어 올라 그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뒤꿈치에 있는 독은 인간에게나 통하지 귀신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놀란 그가 본능적으로 발에 매달린 어린 악귀를 털어 내기 위해 팔을 뻗자 이번엔 손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으아악!”
검은 전갈이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어 어린 악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런 그를 여유롭게 쳐다보던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 방울을 흔들었다.
짤랑, 짤랑.
청량한 방울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아까보다 더 많은 악귀가 몰려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흉포하고 사기가 하늘을 뚫을 듯이 흘러넘쳤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귀신들은 독으로 여러 사람을 죽인 검은 전갈의 곁에서 떠돌던 원혼들이었다. 그들이 귀신들의 성녀의 힘을 빌려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기꺼이 악귀가 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악귀들에게 찢겨 죽기 직전, 검은 전갈이 소리쳤다. 그러자 다크 카오스가 손을 들어 귀신들의 성녀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널 용서했어?”
“헉, 헉…….”
악귀들의 움직임이 뚝 멈추자 검은 전갈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만 헐떡였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을 주고 기다리던 다크 카오스가 다시 귀신들의 성녀에게 고갯짓했다. 또다시 가지 방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자 악귀들이 사박사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검은 전갈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용서했습니다! 용서받았어요!”
“용서했다고?”
“네. 네……. 저를 용서했습니다.”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 그의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만연했다.
“마음씨가 곱고 착하다고 소문 난 분들이라 그런지, 우리 형제들이 저지른 짓을 다 용서해 주실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돌아가시기엔 너무나도 착한 분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검은 전갈은 끝까지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큰 두통이 이는 기분에 재언이 이마를 쓰다듬자 가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머물렀다.
검은 전갈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건 재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다크 카오스가 제발 이걸로 넘어가 주길 바라며 눈동자를 굴리던 검은 전갈은 갑자기 닥쳐오는 한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신의 목과 얼굴을 감싸는 주름진 손길을 느꼈다. 어찌나 차갑고 서늘한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생전에 착했다고 억울하게 맞아 죽은 걸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다크 카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전갈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흉흉한 원념을 내뿜으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악귀들이 그의 얼굴과 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건 바로 동생에게 죽은 노부부였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검은 전갈이 벗어나려 발버둥 치자 악귀의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으아아악!”
“공원에서 악귀가 되어 성불하지 못하고 있던 걸 귀신들의 성녀가 데려왔지. 원한이 너무 강해 저승으로 가실 수 없었던 거야. 두 분께 물어보니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너, 동생이 사람을 때려죽일 때 사실 옆에 있었다면서?”
“으아아악!”
말하던 중에 검은 전갈이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리자 재언이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따 기절한 검은 전갈의 머리 위로 뿌려 다시 정신을 차리게끔 했다.
이윽고 눈을 뜬 검은 전갈이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듯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악몽이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피에로 가면이 눈앞에 있었다.
“노인분들이 제발 그만해 달라고 빌었을 때 웃고 있었다던데, 너도 웃어 봐.”
공포에 발버둥 치는 검은 전갈을 비웃으며 구경하는 신재언을 보며 귀신들의 성녀가 머뭇거리며 물어 왔다.
일곱에서 여덟이 된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자 거대 빌런들은 ‘위대하신 아버지’의 행동에 토를 달거나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위대하신 우리들의 아버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버지답지 않으시네요.”
물론 ‘아버지’에게 어떤 뜻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가 아는 신재언은 화가 나도 직접 나서지 않고 넘어가거나 약간의 벌만 주고 끝내는 사람이었다.
피해자들이 직접 복수하는 걸 도운 적은 많아도 본인이 직접 일을 처리한 적은 없었다. 죽은 노부부는 재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났거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하피였던 재언의 외조부모님은 평생을 숨어 살면서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던 분들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살았을 때에도, 부모님이 결혼하셨을 때에도 한 번 찾아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 내어 밖으로 나왔다가 화를 입었다.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가던 취객이 재수 없게 아침부터 하피를 봤다며 외조부모님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몸도 크게 다쳤지만,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충격을 받으셨는지 외할아버지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외할머니께서도 그 뒤를 따라가셨다.
재언의 부모님이 그자를 폭행죄로 고소했지만, 죄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형량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끝이 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어린 재언의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 남자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였다. 본인이 행한 짓으로 사람이 죽었는데도 죄책감 한 톨 보이지 않았던 그 얼굴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상황이 이번 사건과 오버랩되면서 결국 직접 움직이고 말았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남겨진 가족들의 오열까지 듣고 말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검은 전갈을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얼굴이 아주 익숙했다. 곧이어 그를 본 귀신들의 성녀가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미친 눈깔!”
‘히어로명이 광안(狂眼)의 성녀이니 아예 틀리게 부른 건 아니다만…….’
광안의 성녀는 자신을 향해 욕설 아닌 욕설을 내뱉는 귀신들의 성녀를 한 번 보고 그 옆에서 여유롭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내를 쳐다봤다.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을 가진 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최악의 빌런 세대를 이끄는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
“당신들!”
“늦었군요, 광안의 성녀.”
속으로는 굉장히 놀랐지만 여기서 그런 내색을 보일 순 없었다.
히어로 협회가 마냥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는지 검은 전갈의 아지트를 생각보다 빨리 알아냈다.
여기서 나타난 게 레드-헬-파이어가 아니라 광안의 성녀라서 다행이었다. 레헬이었다면 입을 열기도 전에 통구이가 되어 저승에 가 있을지도…….
마음속으로 벌벌 떨던 재언은 싸울 준비를 하는 귀신들의 성녀를 붙잡고 허공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체어맨이 타이밍 좋게 문을 만들어 줘서 다행이었다.
악귀를 조종하는 귀신들의 성녀와 생명을 흡수해 힘의 원천으로 삼는 광안의 성녀는 힘의 상성이 매우 나빴다. 둘이 붙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서울은 귀신들의 소굴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재언은 이를 갈면서 광안의 성녀를 노려보는 귀신들의 성녀를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도 문을 넘어가면서 잠시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검은 전갈이 바닥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생전에 착해서 용서해 줄 것이라고 하더니 노부부는 그를 용서해 주지 않은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서 있는 광안의 성녀에게 한 마디하고 문을 넘어갔다.
“그럼 뒤처리 부탁해요, 히어로~”
‘어라? 나 이번에도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