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재택근무 진짜 좋았는데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니…….”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신재언은 그에 150%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택근무 일주일 동안은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특히 김 대리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다른 유능한 사원들의 일을 방해하지도, 자신의 일을 떠맡기지도 못했을 테니 김 대리는 재택근무가 싫었겠지만 말이다.
재언은 지난 일주일이 벌써 눈물 나도록 그리워졌다.
테러 사건은 다크 스콜피온의 두목 ‘검은 전갈’이 서울 모처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뒤이어 그의 동생이라는 놈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테러 원인과 테러범이 사라지자 서울에 평화가 찾아왔고 덕분에 일주일 만에 지옥 같은 출근이 시작되었다.
재언은 다시 꿈같은 재택근무로 돌아가기 위해 빌런들을 서울에 풀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그러기엔 뒤처리가 너무 귀찮고 지금은 히어로 협회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을 테니 당분간 서울에서는 몸을 사려야 했다.
업무 준비를 끝내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아 자리로 돌아가던 남무혁이 재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재언 씨는 그래도 다음 주에 휴가 아니에요? 좋겠다…….”
‘와우-.’
그는 나날이 패션 감각이 진화하는 중이었다. 그쪽 팀장이 아무 말도 안 하더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난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사진이 박힌 티셔츠가 겹쳐 입은 흰 와이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이 선명했다. 게다가 양말까지 아이돌 그룹 로고가 떡하니 박힌 형형색색의 MD였다.
이런 패션 관련 회사에서 저렇게나 충격적인 차림새라니. 남무혁, 그는 어느 면에선 정말 최고의 사원이었다.
“맞아요. 재택근무 덕분에 푹 쉬어서 그런가……. 이번에는 어디 놀러 가고 싶어요.”
씩 웃으며 대답해 준 재언은 남무혁이 자리로 돌아가자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한 출근 때문인지 아니면 다음 주에 떠날 휴가 때문이지 하루 내내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중간중간 휴가 때 어디로 놀러 갈지 고민한 탓도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즈음 차민재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퇴근하셨어요?
“네. 민재 씨도 요즘 바쁘시던데 지금은 괜찮아요?”
- 네. 찢어 죽일 다크 카오스덕에 체면이 구겨졌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무서워!!!’
자신이 다크 카오스인 걸 그는 모를 텐데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하지만 히어로 협회가 떡하니 지키는 강남 일대를 테러한 다크 스콜피온의 두목을 다크 카오스가 죽였으니 히어로 협회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긴 했다.
“하하…….”
짧게 웃은 재언이 어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오늘 약속 있었나요?”
- 서운해요.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였어요?
“그게 아니라, 갑자기 전화하셔서… 무슨 일이 있었나 했던 거죠.”
‘레헬은 정말 무서운데, 차민재는 조금 귀엽단 말이야…….’
“큼…….”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민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수줍게 말했다.
- 이번에 휴가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저도 다음 주에 시간이 나는데……. 등산 좋아한다고 했죠, 재언 씨? 충북 XX쪽에 어머니께서 소유한 별장이 하나 있는데, 뒤쪽에 산도 있고, 주변이 어머니 개인 사유지라 사람도 없어요. 휴가에 저랑 그쪽으로 놀러 가지 않을래요?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론은 휴가 때 자신과 3박 4일로 놀러 가자는 소리였다. 재언은 사실 이번에 마약왕을 찾아갈 계획이었던지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이 재언을 몹시 보고 싶어 한다고도 했고, 재언도 아이를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했다. 게다가 알례리가 저번 마약 사건도 나름 깔끔하게 처리해서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줄 겸 찾아갈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이번에 꼭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기에 차민재의 제안이 제법 구미가 당겼다.
‘별장에 산이 사유지라니……. 어쨌든 놀러 가긴 딱 좋은 조건이네. 거절할 변명거리도 딱히 없고… 그가 레헬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민하진 않았을 텐데…….’
한참 고민하던 재언은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재택근무 때문에 계속 집에 있어서 몸이 찌뿌둥했거든요. 같이 놀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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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눈부셔라!’
집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온 차민재를 보고 재언은 절로 나오는 감탄을 삼켰다.
차민재가 원래 잘생긴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타락한 추기경이 신성력을 사용할 때나 볼 수 있었던 후광이 그의 등 뒤에서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검은색 목티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화보처럼 보이는 아주 잘생긴 미인이었다. 나름대로 멋을 낸 건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코트 주머니에 선글라스를 걸어 놓았다.
그에 재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가리켰다.
“너무 꾸미는데 힘준 거 아니에요?”
민재가 머쓱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걸어 놓은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썼다.
“운전하는 데 쓰려고 한 거예요. 그만 웃으시죠, 재언 씨?”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레드-헬-파이어가 웃지 말라면 웃지 말아야지.’
여기서 더 웃었다가 평생 웃게 해 주겠다며 자신의 입을 찢어 놓으면 곤란했다.
트렁크에 짐을 다 싣고 조수석에 타니 민재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사실 재언 씨가 흔쾌히 허락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힘 좀 줬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재언은 이미 외모에 홀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레드-헬-파이어라는 걸 알면서도 어영부영 넘어가는 거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여 출발하고 곧이어 빠르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시내를 달렸다. 슬슬 배가 출출해지는 참에 시골길로 빠졌는데 요즘도 이런 길이 있나 싶을 정도로 좁았다.
“슬슬 배가 고파지니까 가게가 보이면 내려서 밥 먹고 출발해요.”
“좋아요.”
시내에서 거리가 있는 산길이라 과연 음식점이 있을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저 앞에 SUV 자동차 한 대가 정차해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빼 들고 보니 차 안에 있던 일행들도 모두 밖으로 나온 듯 저들끼리 심각하게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차민재의 차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두 손을 흔들어 멈추게 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들은 친구끼리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모두 다섯 명으로 남성이 셋, 여성이 둘이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나 본데요?”
“흐음…….”
차민재가 선글라스를 고쳐 끼더니 관심 없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이봐 히어로 양반, 시민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어?’
차가 멈추자 이쪽으로 그들이 다가왔다. 차민재는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는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채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저희 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가지 못하고 있거든요. 보험사를 불러야 하는데 전파가 터지질 않아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통화가 가능한 곳까지 동행해도 될까요?”
“아, 그래요……. 잠시 앞에 정차할게요. 민재 씨. 어린 사람들이 곤경에 빠졌으니 도와줍시다.”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의 민재를 어르고 달래며 청년들이 주차해 놓은 SUV 자동차 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자 청년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팔을 휘저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 돼요!”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민재가 방향을 틀어 후진하려는 순간, 갑자기 차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타이어 공기압을 확인하세요.]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확인하니 뾰족한 철조망같이 생긴 것이 타이어에 얽혀 있었다.
“이게 뭐지?”
철조망이 어찌나 두껍고 튼튼한지 타이어 곳곳에 흠집이 나고 구멍이 날 정도였다. 게다가 타이어가 완전히 얽혀 있어 운전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청년들 중 한 명이 난처한 듯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이래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우리 차도 그래요. 누가 여기다가 철조망을 설치했는지 한쪽 타이어가 터졌어요.”
그의 말대로 SUV 차량의 타이어에도 앞뒤로 철조망이 얽혀 있었다. 이제 보니 차가 지나가는 길 곳곳에 함정처럼 설치되어 나뭇잎에 가려져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노리고 설치한 듯했다.
‘어라…? 이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차민재가 차에 가해진 테러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양쪽 다 자동차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발만 동동 구르던 중에 저 멀리서 여성 한 명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재언과 민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분들은 누구야?”
“네가 주변을 살펴본다고 갔을 때 오신 분들이야. 우리랑 똑같이 곤경에 빠지셨거든…….”
“저 위로도 통신이 잘 안 잡혀서 아래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저쪽에 허름한 농장은 발견했거든. 아무도 사는 것 같진 않은데 여기저기 누가 쓰던 물건들이 있어서 그쪽에서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해.”
재언은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이 상황, 외국 영환지 뭔지에서 많이 봤던 장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