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하지만 이곳은 외국이 아닐뿐더러 아무리 시골의 산길이라 해도 조금만 되돌아가면 시내가 나온다.
그냥 시내 쪽으로 가다가 휴대전화 전파가 터지면 보험사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청년들은 조금 걸어가면 보이는 낡은 전원주택을 찾아가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재언은 민재를 힐끔 쳐다봤다.
‘그래, 여기 레헬이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갓길에 세워져 있는 차를 그대로 놔두고 재언과 민재, 그리고 청년 6명이 다 함께 전원주택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눠 본 바로 남자 셋, 여자 셋으로 이루어진 청년들은 같은 대학교 동기들로 이번에 방학을 맞아 같이 놀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젊은 남자들 중에 운동했는지 몸이 좋은 남자의 이름은 김재우로 가장 활발하고 말이 많았다.
“이쪽은 제 여자친구 방혜림이에요. 사귄 지 100일 정도 되었어요.”
김재우가 환하게 웃으며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검은색 블라우스, 무릎까지 오는 흰색 치마를 입은 한 여성을 가리켰다. 방혜림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남자친구와는 성격이 정반대인 듯 차분하게 고개만 꾸벅 숙였다.
산속을 걷기에는 불편해 보이는 구두가 재언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반가워요. 제 이름은 신재언이고, 이쪽은…….”
재언은 레헬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잠깐 머뭇거렸다. 본명보다도 레드-헬-파이어로 더욱 유명한 이라 이름을 알려 줘도 모를 확률이 더 높았지만 말이다.
“차민재입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서로의 통성명이 끝나고 이곳에서 가장 사교성이 좋은 김재우가 신이 나서 물어왔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쉴 새 없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얼굴도 진짜 잘생겨서 놀랐어요. 저분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아도 딱 느껴지는 게 완전 잘생겼을 것 같던데……. 혹시 모델이에요? 아니면 배우?”
“하하하…….”
재언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이런 칭찬이 엄청 익숙하신가 봐요?”
김재우가 가벼운 투로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뒤쪽에서 걸어오는 제 여자친구에게 향해 걸어갔다.
그보다 더한 찬사들을 받는 사람이긴 하지만 재언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기 때문이다. 칭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어투였다.
거기다가 연인관계라는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침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방혜림은 묘하게 남자친구인 김재우에게 쌀쌀맞으면서도 자기 의견 없이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재언마저 신경 쓰일 정도로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데 김재우는 여자친구의 어깨를 붙잡고 배려 없이 제 페이스대로 걸었다.
‘사람은 활발해 보이는데 별로 좋은 애인은 아닌 것 같네. 그렇다고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기도 뭐하고.’
신재언이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향해 걷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엔레이드맨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재언이 깜짝 놀라 차민재를 곁눈질로 살폈다.
‘옆에 레헬이 있는데 직접 말을 걸다니,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다행히도 그가 눈치챈 기색은 아니었다.
- 이 앞으로 결계가 깔려 있어요.
‘결계?’
재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딱히 육안으로 확인되는 점은 없었다.
그리고 레헬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조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이 결계 능력자라서 비슷한 종류의 결계 능력을 조금 더 기민하게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재언은 기침하는 척하며 차민재에겐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무슨 결계인데?〕
- 정확히 어떤 결계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제가 능력을 쓰는 걸 방해했어요.
엔레이드맨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한 재언은 또다시 자신이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 아닌지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기어 올라왔다.
그래도 자신의 옆에는 레헬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상기하면서 불안감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의 능력이라면 자식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어떤 문제든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까 근처를 살피고 왔다던 포니테일 머리의 젊은 여성의 말대로 산속을 조금 올라가니 허름한 전원주택 한 채가 나타났다. 마당이 꽤 넓은데 아무것도 없어서 휑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인가 싶었지만, 사용 흔적이 여기저기 남은 기구가 있었다. 그리고 낡았지만, 충분히 작동할 것 같은 트랙터가 사람이 사는 중이란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신재언은 결계가 쳐져 있다는 엔레이드맨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어떻게 해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잔뜩 긴장하면서 이곳저곳 살폈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어요?”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도 핸드폰 전파가 안 터져.”
“이상하다. 아무리 산이라도 대한민국에 전파가 안 통하는 곳이 있었어?”
아예 없다곤 할 순 없겠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환한 대낮에 자동차 소리도 없이 조용한 것도 꺼림칙하지만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주변의 분위기도 꽤 으스스했다.
재언은 말없이 주변을 살피던 민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민재 씨, 여기 좀 수상한 것 같은데 그냥 저 학생들을 데리고 내려가요.”
그러자 차민재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재언과 눈을 마주치더니 빙긋 웃었다.
“재언 씨. 이번에 히어로 협회에 의뢰가 들어온 것 중에, 이 부근에서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내용의 의뢰가 세 개나 돼요.”
“뭐라고요? 그러면 여기로 오면 안 됐었잖아요.”
“이 부근 어디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특정되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럭키였나 봐요.”
‘럭키는 무슨! 평범한 사람한테는 엄청 큰일이라고!’
차민재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당황스러웠지만, 생각을 조금 달리하면 나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S급 히어로인 그가 알고 있을 정도면 제법 보수가 짭짤한 의뢰일 터, 겸사겸사 해결을 도와주면 자신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히어로를 도와줘도 되는 건가? 딱히 세상을 혼돈에 빠트리거나 질서를 어지럽혀 발밑에 둘 생각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 해야 옳은 일인지 재언은 한참 고뇌했다.
그때 대학생들이 집 안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저택의 현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내 김재우가 앞으로 나서서 현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는지 현관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옆에서 말없이 있던 방혜림이 깜짝 놀라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재우야. 아직 집주인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안에 들어가는 건…….”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있으면 사과하면 돼. 그리고 여기서 계속 불렀는데 대답하지도 않았잖아.”
“야, 그러다 안 도와주려고 하면 어떡해? 그냥 내려가자. 시내로 가서 보험사를 부르는 게 빠르겠어!”
“야, 손명희. 넌 이쪽을 살펴봤으면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 보냐? 두 번 귀찮게. 이게 뭐야?”
손명희라고 불린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가 김재우의 타박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난해? 네가 움직이기 싫다고 징징거려서 내가 왔던 거잖아. 그리고 혼자 왔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사람을 불러, 위험하게!”
“자자, 학생들. 주인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냥 내려갑시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계속 핸드폰 전파 확인하고…….”
재언은 막 싸우려는 두 학생 사이로 끼어들어 손을 들어 올렸다. 레헬이 옆에 있어서 위험하지 않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결계가 쳐진 이곳에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김재우의 옆에서 멀뚱멀뚱 눈만 끔벅이고 있던 남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창문에 누가 보이는데요.”
“어디? 어? 도윤이 말대로 누가 있어요.”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거실 안의 풍경이 조금 보였다. 그것도 아주 작은 틈이어서 집중해서 봐야 했다.
그런데 정말로 거실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이거 정말 무서운데?’
비단 재언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대학생들도 소름이 돋았는지 겁먹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재언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헛기침하며 초인종을 눌러 봤다. 하지만 삐걱대는 소리만 날 뿐 초인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며 크게 소리쳤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그러자 안쪽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졌다.
“꺼져!”
“헉!”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그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꺼져!”
히스테릭한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커튼 사이 틈을 자세히 살펴보자 상체만 벌떡 일으킨 노인이 머리를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보였다.
확연하게 들리는 거부의 말에 재언은 문에서 한걸음 물러나 뒤를 돌아봤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본 게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한 표정이었다.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이곳에서 신재언 혼자뿐이었다.
‘그 녀석? 저 어르신… 겁에 질린 목소리였는데. 이거 복잡한 일에 끼어든 걸지도. 그냥 시내로 내려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