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61화 (61/324)

61화

“민재 씨. 아무래도 안에 계신 어르신은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여요. 하긴,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무서울 만도 하지요. 그냥 시내 쪽으로 내려가서 보험사를 부르는 거로 합시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건 맞잖아요. 그냥 전화되는지 확인해 달라고만 하면 되죠.”

까불까불한 이미지에 걸맞게 김재우는 사람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리곤 말릴 틈도 없이 그가 현관을 벌컥 열어젖혔다.

“할머니, 죄송한데요. 여기 혹시 전화 되나요?”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네 녀석들 다 얼굴 기억해 놨어. 죽여 버릴 거야. 죽여서 솥에 끓여 버릴 거야!”

안에 있는 노인이 의자 위에서 버둥거렸다. 어찌나 기세가 사납던지 온 집 안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노인이 움직일 때마다 대변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거실에 이리저리 튀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로 실례해 버린 듯한 모습에 김재우가 놀란 얼굴로 현관을 닫았다. 그럼에도 안쪽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손명희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며 김재우를 타박했다.

“지금 너 때문에 저분이 더 놀라셨잖아, 이 멍청아! 어떻게 할 거야? 어? 남의 집 문을 그렇게 벌컥 열면 나라도 화내겠다. 다 망했으니까 다시 돌아가자. 나 여기 조금 무서워.”

“…나도 무서우니까 빨리 돌아가자.”

다른 친구들마저 같은 목소리로 타박하자 김재우가 잔뜩 풀이 죽은 채 등을 돌렸다.

재언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민재와 함께 대학생들의 뒤를 쫓았다.

‘…뭔가 불길한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른 가정에 재언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내 럭키 가이 능력이 사라졌나? 왜 불길한 일만 일어나는 거지?’

아무리 미비한 능력이라도 나라에 등록해 매월 연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었는데, 어째 능력이 점점 쇠퇴하는 기분이다.

‘능력이 사라지는 능력자도 있었나?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멈춰 서서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이 가만히 서 있는 차민재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때요?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재가 고개를 돌려 선글라스 너머로 재언과 눈을 마주했다. 확실히 선글라스를 껴도 그가 가진 잘생김을 전부 가려 주진 못했다.

“아니요. 억지로 파괴할 순 있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도 무사하기는 힘들 거에요.”

역시 그도 결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차민재가 고개를 저으며 한 말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재언이 눈앞에 있을 무형의 결계에 손을 갖다 댔다. 허공을 꾹 하고 누르자 마치 벽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손을 가로막았다.

“이건 대체 뭐에요?”

“왜 나갈 수 없는 거예요? 무서워!”

옆에서 대학생들이 잔뜩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며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산속에 갑자기 갇히게 되어 두려워하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차민재의 정체를 알려 줄까 고민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입을 닫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특효약이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일단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다닙시다. 이렇게 갇혀 있을 때 낙오되면 위험해요.”

크루즈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한 재언이지만 학생들은 잘 모를 게 분명하니 몇 번이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차민재와 상의한 끝에 다시 전원주택이 있는 곳으로 다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 펼쳐진 무형의 결계를 알아낼 단서가 있을 만한 곳이 지금으로서는 그 집뿐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을 진정시키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방혜림이 손을 들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아, 어떻게 하지.”

그녀 혼자 보내기도, 그렇다고 일반인인 다른 학생을 붙여서 보내 봤자 소용이 없을 듯했다. 그렇다고 자신이나 레헬이 같이 가기에는 서로가 민망할 테고 매우 난감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자친구인 김재우가 한걸음 나섰다. 정말로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듯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전 혜림이 남자친구니까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머뭇거리는 재언의 말을 끊고 방혜림이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재우랑 갈게요. 멀리 가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 겁먹은 기색도 없이 침착한 그녀의 말에 재언은 당황해 어물거리다가 결국 두 사람을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이 나무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재언은 긴장을 풀기 위해 민재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조각난 장난감으로 하여금 주변을 돌아보게 하고 싶은데, 레헬이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별장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수영을 즐기고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재언 씨.”

“어? 별장에 수영장이 있어요?”

“네. 3층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수영장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요.”

‘3층짜리 별장에 수영장이라니……. 부자라고 알고 있긴 했지만 진짜 부자구나.’

그때, 모여 있는 학생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 곽도윤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김재우가 까불까불하면서 활발한 성격이라면, 곽도윤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재우랑 혜림이 싸우지 않았나? 지금은 그래도 지 남친이라고 의지하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엄청 안 좋았으니까…….”

‘사이가 안 좋았다고?’

“재우가 끈질기게 혜림이한테 사귀자고 쫓아다녔잖아. 역시 혜림이도 재우가 싫지 않았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든 잘 사귀면 되지.”

저들끼리 모여 수군대는 소리에 재언이 귀를 기울일 무렵, 방혜림과 김재우가 갔던 방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깜짝 놀란 재언과 일행이 그쪽으로 달려가자 방혜림이 수풀 사이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변 어디에서도 김재우는 찾을 수 없었다.

재언이 다가가자 방혜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저기, 괴물이 재우를 끌고 갔어요. 순식간에 낚아채 가더니 저쪽으로 사라졌어요.”

아까까지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녀가 지금은 크게 충격받은 듯 소리를 지르며 바들바들 떨었다.

손명희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사방이 아수라장인 와중에도 재언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방금 웃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차민재가 소란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대학생들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고 재언은 그 틈에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반지 케이스에서 꺼내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민재가 재언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잽싸게 조각난 장난감을 가방에 넣은 재언이 뒤를 돌았다.

“학생들이 패닉 상태에요. 일단 앉아서 쉴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이럴 때는 제법 히어로 티가 나네.’

재언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부터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게 중요했다. 크루즈에서 몇 번이고 경험했으면서 또 실수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방혜림의 미소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론 지금은 창백한 안색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매우 충격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조금 긴가민가했다.

신재언은 일단 패닉에 빠진 학생들을 앉혀 놓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방혜림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더듬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졌다.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린 재언은 나무 아래에 있는 것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윽!”

“왜 그러십니까?”

뒤따라온 민재가 옆으로 다가와 재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상체는 나무에 기대 있고 하체는 땅에 묻혀 있는 시체가 있었다.

이건 자연스럽게 죽은 시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고 상·하체를 분리해 이곳에 놓아둔 것이다.

죽은 지 시간이 오래 지났는지 부패한 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도 역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민재 씨. 이건…….”

“쉿. 저쪽이 알면 상당히 시끄러워지고 소란만 일어날 테니 지금은 못 본 척하고 돌아갑시다.”

“그건 동감이에요. 전시하듯 시체를 놔두다니……. 살인마가 아직 이곳에 있을까요?”

“여기가 아마 그의 사냥터일 겁니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상대는 전 세계에서도 당해 낼 자가 없는 레드-헬-파이어였다. 둠(doom) 안에서 10분의 1도 안 되는 능력만으로도 엔레이드맨을 가지고 놀았던 괴물이었다.

재언의 예상대로 레헬이 코웃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머지않아 눈치채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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