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재언은 이번 일에서 그냥 손을 떼기로 했다. 레헬이 옆에 있는데 자식들을 불러내는 것도 위험했고 결계를 펼친 능력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데 조각난 장난감을 풀어놓을 수도 없었다.
결국, 옆에 있는 레헬을 믿고 평범한 일반인이 되기로 했다.
김재우가 납치되듯 사라지고 크게 충격을 받아 한참 동안 나무에 기대앉아 있던 방혜림을 진정시키고 전원주택으로 돌아갔을 땐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휴가의 첫날을 이렇게 날려 보내는구나.’
원래라면 지금쯤 차민재의 호화로운 별장에서 누구보다도 황제같이 휴가를 즐기고 있어야 하는데, 결계에 갇혀 산속이나 헤매고 있다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집 밖을 아무리 살펴봐도 마당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까 봤던 것처럼 창문에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여전히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있었다.
그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던 재언은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민재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할머니, 의자에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묶여 있어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워낙 풍성해서 이전에 대충 봤을 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힘없이 고꾸라진 고개와 의자에 딱 달라붙은 등, 바닥에 질척하게 쌓인 대소변들이 자의로 의자에 앉아 있던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었다.
노인은 이곳에 꼼짝도 못 하고 묶여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이러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노인이 묶여 있다는 걸 알게 된 재언은 조심스럽게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하는 나무 장판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기세 좋게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인은 일어나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길 나간 다음 히어로 협회에 연락할 예정입니다. 그때 함께 구조하도록 하죠.”
하긴, 차민재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 할머니를 구해 봤자 결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 혹시라도 노인을 풀어 주었다가 깨어나서 덤벼들기라도 하면 곤란하기에 그대로 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거실 쪽으로 들어가자 실내에서 역한 냄새가 일행을 반겼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어 봐도 냄새는 더 심해질 뿐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 꽤 넓어 보이는 전원주택은 주방과 거실, 방이 네 개인 집이었다. 하나는 가장 큰 안방이었고 나머지 세 개는 크기가 비슷한 작은방이었다.
다행히 모든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에 쉽게 안쪽으로 들어가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방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집 안 깊숙이 주방 옆에 있는 문을 발견하고 열자 안쪽에서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군데군데 홈이 파여서 수상한 검은 때가 얼룩덜룩 묻어 있는 허름한 문이었다. 잠겨 있진 않은 듯 문을 힘껏 밀자 삐걱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계단이 문 안쪽에 있었다. 너무나도 스산한 분위기에 선뜻 내려가기가 머뭇거려졌다.
“민재 씨, 일단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밖에서 학생들과 있어 주는 걸로 합시다.”
그러자 차민재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면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재언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사실 상의할 필요도 없이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상태였다.
“아니요. 차라리 제가 내려가는 게 나아요. 민재 씨는 여기서 학생들을 지켜 주세요. 저도 여차하면 위로 도망칠 수 있는 정도는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차민재가 말은 잘 들어 줘서 다행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물러서고 재언은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발을 디뎠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용기 내서 계단 끝까지 내려가 지하 안쪽을 확인한 재언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단숨에 위쪽으로 올라갔다. 올라오는 데 10초도 안 걸린 듯했다.
“재언 씨?”
“민재 씨! 저, 전체 연령가에서 나오면 안 될 것들이 있는데요!? 여, 여기 식인 살인마가 살고 있어요!”
재언은 약 10년 전에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을 손에 넣은 뒤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단연코 지금이 가장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신재언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횡설수설 소리치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재가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게이들의 스킨십을 보게 된 청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서 그들의 표정을 목도한 재언의 영혼이 지하실에서 빠져나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굳이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하지만 가장 잘 먹혔잖아요.”
자신이 한 짓에 민망해진 재언이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거실에 있는 노인을 힐끔 살피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재언은 수많은 빌런이나 파렴치한 놈들을 많이 봐 왔지만, 식인 살인마는 솔직히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뒤따라온 민재에게 물었다.
“민재 씨, 정말 결계를 깨트릴 방법이 없는 걸까요?”
“재언 씨와 학생들이 멀리 피해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위험해질 수 있어요. 범인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 같은데…….
차민재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레헬이 옆에 있으면 자식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없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민재의 상냥한 말투와 다르게 선글라스 너머로 느껴지는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어서 차마 그의 말에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착각인가 싶으면서도 기분이 조금 찝찝했다.
이런 느낌 때문에 사실 재언은 차민재를 도통 신뢰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좋아하면서도 그가 수작질을 부릴 때마다 한걸음 물러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보다 재우 씨가 걱정이네요. 어딜 끌려갔는지…….”
“제 탓이에요… 제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방혜림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굉장히 후회하면서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신재언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녀가 아까부터 연기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사건에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을까.
‘도통 모르겠네……. 일단 김재우를 찾아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부터 생각하자. 아까 봤던 광경이 너무 생생해서 토할 것 같아!’
재언은 청년들을 인근의 눈에 띄지 않는 동굴에 숨겨 두고 차민재와 함께 다시 주택으로 돌아왔다.
레헬이 동굴 주변에 불씨를 뿌려 놨으니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접근하면 불길에 홀라당 타 죽을 것이다. 물론 레헬의 특수 능력으로 만들어진 불씨라 산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는 이쪽, 민재 씨는 저쪽을 둘러보기로 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누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재언이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 건 바로 ‘레헬 소환 돌-☆’이었다.
그럼에도 차민재는 안심되지 않는지 한참 동안 눈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주택을 기준으로 결계 끝까지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빙 돌아보기로 했다.
꽤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상한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민재와 떨어져 산속으로 들어가는 재언에게 엔레이드맨이 말을 걸어왔다.
“위대하신 아버지.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엔레이드맨이 알려 준 방향을 유심히 살피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곳에 작은 담장의 쪽문이 존재했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가 쪽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회칼을, 다른 쪽 어깨에는 어떤 남자를 매단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기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고 눈이 하나뿐이었다. 다시 보니 원래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인지 두 개여야 할 눈이 연결되어 하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멀리서 봐도 몸집이 거대했고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깨에 매달고 있는 건 김재우였다.
‘찾았다!’
재언은 그를 구하기 위해 엔레이드맨과 뛰어들 작정이었다. 레헬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재언의 어깨와 옷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동굴에 친구들과 있어야 할 방혜림이 그의 옷을 잡고 있었다.
살기가 없어서 엔레이드맨이 나서지 않은 것이겠지만 재언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혜림 씨… 왜 여기에… 친구들은요? 무슨 일 생겼습니까?”
그러자 어두운 안색의 방혜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해서 와 봤어요. …저 자식을 살릴까 봐.”
“…….”
역시, 뭔가 연관된 게 맞았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눈앞의 사람은 유난히 행동이 조심스럽고 방어적이었다.
재언은 살인마와 김재우가 들어간 쪽문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내가 오해하기 전에 자세히 설명해 봐요.”
“…….”
“혜림 씨, 지금 재우 씨를 끌고 간 저 남자와 무슨 관계인가요?”
“아니에요. 저… 저 남자는 저도 잘 몰라요.”
방혜림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채 입만 달싹였다.
그 순간 재언은 어깨가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신이 새겨진 왼쪽 팔이었다.
“…저놈은 절 스토킹했어요. 어느 날 제가 술에 취했을 때 모텔에 데려가서… 사진을 찍고 절 협박하더라고요. 사귀어 주지 않으면 학교의 익명게시판에 그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겠다고, 직장을 다니거나 결혼을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퍼트리겠다고 협박했어요.”
방혜림의 증오가 어두운 기운을 내며 스멀스멀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가 지옥인 거예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이곳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이 부근에 괴물이 사는데 사람들을 납치해서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죽을 각오로 온 거예요. 제가 죽거나, 아니면 저 파렴치한 개새끼를 죽이거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김재우와 방혜림의 행동을 보면서 기분이 찝찝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괴로운 듯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검은색 기운들이 그 말은 전부 사실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각성시킬 수도 있겠지만, 김재우가 괴물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증오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김재우를 구하지만 않으면 그녀가 빌런으로 각성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학생들은 죄가 없을 텐데… 왜 여기까지 끌고 왔니?”
“…그 애들은 김재우가 절 모텔로 끌고 갔을 때 함께 술을 마시던 애들이에요. 제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면서도 김재우한테 넘긴 거죠. 그 애들은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녀는 뺨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그냥, 그 애들이 딱히 죽지 않아도 상관없어졌어요. 제가 원하는 건 김재우가 죽거나 제가 죽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의 말에 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혜림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되돌아가서 차민재와 만났다.
“김재우 씨는 찾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이미 늦은 것 같아요, 민재 씨.”
자신이 선택한 일이 과연 옳은 것일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