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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63화 (63/324)

63화

“민재 씨는 뭐 발견한 거 있어요?”

그에 차민재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봐도 살벌하게 생긴 덫들이 손안에 가득했다.

뾰족한 가시가 잔뜩 달린 덫에 걸리면 발목이 바스러질 것처럼 흉악했다. 게다가 가시마다 끈적거리는 액체로 반짝이는 게 딱 봐도 몸에 좋은 작용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끔찍한 도구들을 본 방혜림이 신음을 흘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지천에 깔려 있던 저것들을 헤치고 신재언을 무사히 찾아온 건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가 들고 있는 덫을 살펴보던 재언은 문득 꺼림칙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차민재의 예쁜 미소뿐이었다.

‘잘못 느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언은 시선을 다시 내려 덫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수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걸 아무 데나 버렸다간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다칠 수도 있으니 땅에 묻는 게 좋겠어요.”

“그럽시다. 제가 처리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재언에게 빙긋 웃어 준 민재가 등 돌려 나무 사이로 걸어갔다. 그는 이 상황에서 무섭지도 않은지 걸음걸이가 매우 여유로웠다.

하긴, 레드-헬-파이어가 무서워할 상황이 있기나 할까.

그의 원래 성격대로였다면 안에 있는 범인이 통구이가 되든 말든 저 집을 폭파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자에 묶여 있었던 노인이 집주인인 듯한데 범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집을 폭파하면 애먼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가 아무리 파탄 난 인성의 소유자라 해도 어쨌든 히어로였으니 말이다.

뭐, 레헬 때문에 자식들을 불러낼 수 없었으니 재언은 느긋하게 경기를 관전하는 일반인처럼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활약하는 모습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있던 살벌한 덫들을 모두 처리한 차민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민재 씨, 방혜림 씨와 계속 같이 다닐 수는 없으니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움직여요.”

“네.”

‘…정말 말을 잘 듣는단 말이야.’

차민재는 한 번도 재언에게 싫다고 말하거나 거절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썸 타는 중이라도 저 성격에 자신에게만큼은 다 맞춰 주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동굴에 도착했다.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간 재언이 안쪽을 확인하더니 바깥쪽으로 고갯짓했다.

안에는 네 명의 학생들이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인해 겁에 잔뜩 질려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온 이가 신재언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안도 섞인 탄성을 내뱉으며 너도나도 밖으로 뛰어나왔다.

“주변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죠?”

“없었어요. 그런데 혜림이가 갑자기 동굴 밖으로 나가 버려서… 혜림아!”

손명희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웅얼웅얼 말을 잇다가 재언의 뒤에 있는 혜림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 미쳤어?! 어디 갔었던 거야! 무사해서 다행이지, 너까지 없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

방혜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고 겁에 질린 채였다. 김재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그가 살인마에게 끌려가고 나니 죄책감이라도 든 걸까.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김재우와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우는 어떻게 됐어요? 아직 못 찾으셨어요?”

겁에 질린 네 명의 청년 중에서도 유난히 움츠려 있던 한 청년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에 커다란 뿔테안경을 쓴 남자였다. 그는 덩치가 작고 소심해 보이는 인상으로 신재언이 청년들과 처음 만날 때부터 곽도윤의 뒤에 쭉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나서서 한마디 한 적도 없고 남들이 말할 때마다 작게 반응해 오는 게 다여서 그의 질문이 의외였다.

재언은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못 찾았어요.”

그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무슨 우민이라는 이름이었는데……. 통성명하긴 했지만, 워낙 인상도 흐릿하고 대화도 나누지 않은 탓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눈앞의 안경 낀 청년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걸 재언이 물끄러미 살폈다.

‘친구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좋아하지? 증오도 없는 걸로 봐서는 괴롭힘당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재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직도 방혜림을 껴안고 있는 손명희를 쳐다봤다.

“저와 민재 씨는 다시 전원주택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혜림 씨가 뛰쳐나오지 못하게 단단히 지켜 주세요. 지금 이곳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아요.”

재언의 말에 손명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재언은 동굴에 있는 대학생들을 한 명씩 살펴본 뒤에 다시 민재와 걸음을 옮겼다.

마음속에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던 탓에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을 때, 엔레이드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

그리고 갑자기 차민재가 재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윽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은 두 사람을 둘러싸고 거대한 불길이 휘몰아치며 솟아올랐다.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재언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장벽을 쳐다봤다. 화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두 명이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는 거대한 장벽이 짧게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격 대상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도록 레헬이 능력을 조절한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능력자야.’

“…뭐에요?”

엔레이드맨이 다급하게 불렀던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둘의 발치에 재가 되어 흔적만 남은 화살 세 촉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 우리를 노리고 날아온 거 맞죠?”

차민재가 대답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쪽을 곁눈질했다. 역시, 그곳에는 석궁이 낚싯줄에 과 연결된 채로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그 낚싯줄이 재언의 발치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재언의 발이 낚싯줄을 당기면서 화살이 발사된 듯했다.

석궁의 활시위가 향한 곳이 재언의 가슴 부근이었던 걸 보면 정확도까지 꽤 높은 듯했다. 레헬을 가두게 된 운 나쁜 범인이 설치한 함정이 분명했다.

‘레헬이 없었다면…….’

소름 끼치는 상상에 재언은 짧게 침묵했다. 만약, 레헬이 아니었다면 재언은 이미 황천길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레헬은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석궁을 잡아 내리고 불로 녹여 버렸다. 제법 단단해 보였던 석궁이 단숨에 녹아 바닥에 흘러내렸다.

재언은 무시무시한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무척 근사하고 잘생긴 레헬을 힐끔 쳐다봤다. 이런 위험한 순간에도 그의 외모는 여전히 반짝반짝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쳐다보던 재언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저 외모에 홀리지 않는 날이 올까?’

재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재가 어깨를 툭툭 치며 주택 쪽을 손가락질했다.

“재언 씨, 저기 봐요. 웬 남자가 집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함정에 이상이 생긴 걸 눈치챘나 봐요.”

“아, 그러면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보죠.”

그의 말대로 피를 잔뜩 뒤집어쓴 남자가 집 밖으로 튀어나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남자의 남색 앞치마가 피로 잔뜩 물들여진 것을 보며 재언은 넌덜머리를 냈다.

이내 남자가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재언은 민재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도 더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한 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가 돌아오지 않는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의자에 묶인 노인이 정신을 차렸는지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듯 노인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재언은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흰자위가 잔뜩 드러나게 눈을 치뜬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 너희들 뭐야? 여기서 얼른 꺼져! 녀석의 먹잇감이 되고 싶어? 네 녀석 일행 하나가 결국 잡혀 와서 내내 비명을 질러 대는 바람에 고막이 터질 것 같다고! 꺼져, 꺼져!”

“할머니. 방금 나간 남자와는 무슨 관계이신가요? 혹시라도 피해자라면 풀어드릴 테니 솔직하게 말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코웃음 치며 재언을 향해 침을 내뱉었다. 물론 거리 때문에 그에게 닿지 못하고 더러운 거실 바닥에 떨어졌다.

“괜한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아니, 어차피 도망쳐 봤자 그 녀석한테 금방 잡힐 거야. 내가 괴물을 만들었어……. 그냥 태어났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키웠다가 이 꼴이 난 거야…….”

노인이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재언은 그녀의 말에 이곳의 살인마가 노인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이런 외딴곳에 집을 짓고 살아온 것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저 애는 열다섯 살 때부터 이상한 재주를 부렸어. 처음엔 손바닥 크기만 한 능력이었는데 거기에 참새를 가두고 놀더라고. 점점 나이가 들수록 이상한 재주가 점점 커졌고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렸지 뭐야……. 하나뿐인 어미라고 죽이거나 때리진 않지만, 너무 힘들고 괴로워. 죽고 싶어.”

푸념 비슷한 걸 늘어놓으며 혼잣말을 하는 노인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의자에서 풀어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재언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웅얼거리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후련하게 내뱉던 노인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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