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뭐야? 왜 갑자기? 할머니, 정신 좀 차려보세요!”
재언이 깜짝 놀라 노인을 몸을 흔들었는데 집 밖에서 갑자기 괴성이 울렸다. 창문 쪽을 보니 아까 집 밖으로 나갔던 남자가 울부짖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몸을 숨길 새도 없었다. 이윽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현관 앞에 선 거대한 체구의 남자는 어떤 오해를 한 건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의자에 묶인 노인을 쳐다봤다.
“어무, 어, 엄… 마.”
재언은 더듬거리며 노인을 부르던 남자가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걸 느꼈다. 두려우면서도 상당히 억울했다.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이 자신들을 보며 피를 토하듯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더니 죽어 버렸다.
게다가 여태까지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와 놓고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울부짖는 남자의 꼴이 아주 당황스러웠다. 거구의 남자가 거대한 회칼을 들어 올렸다.
그에 재언은 조심스럽게 차민재의 뒤로 움직여 몸을 숨기려 했다.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때 코웃음 치며 남자를 비웃는 엔레이드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위대하신 아버지. 저런 조잡한 놈 따위가 아버지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레헬에게 좋은 감정 따위 전혀 없는 엔레이드맨은 아버지의 곁에 붙어 있는 레헬이 잘못되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재언에게만 둠(doom)을 확장해 지킬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이런 시골에 숨은 식인 살인마가 괴물 같은 레헬보다 강한 고수 능력자일 확률은 사실 0%에 가깝다는 걸 엔레이드맨도, 재언도 뼈저리게 잘 알았다.
“으아아악!”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회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전에 레헬의 고갯짓에 이미 남자의 발목부터 생긴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발부터 천천히 불에 태우며 빌런을 쉽게 죽여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한 레헬다운 대응이었다.
“몸이 커서 그런가, 태울 것도 많아서 좋네…….”
중얼거리는 레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하며 재언은 혹시라도 화염에 말려들지 않게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레헬이 실수해서 자신에게 화를 입힐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재언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긴 방향이 죽은 노인 쪽이라는 게 문제였다. 노인을 향해 재언이 한걸음 움직이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살인마가 안광을 번득이며 괴성을 질러 댔다.
그는 발밑이 타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언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섭고 육중하던지 재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인마의 타깃이 자신이 아닌 재언에게로 향하자 레헬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재언에게 달려들던 살인마는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하체가 완전히 타 버려 재가 되었다. 삽시간에 화르륵 커져 버린 불길이 상체마저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인 살인마는 본인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무척 가볍게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을 구해 준 것이긴 하지만 레헬의 능력에 질린 표정을 짓던 재언은 민재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뭐 하려는 거지?’
의문은 레헬의 행동에 곧바로 풀렸다.
그가 살인마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담배를 가져다 대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른한 표정으로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게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이 대단히 두려웠다.
두려움에 질린 재언의 기색을 읽었는지 웃는 얼굴 그대로 차민재가 물어 왔다.
“재언 씨. 제가 무서워요?”
“…….”
아무리 식인 살인마에 자신들을 해치려 했던 범인이라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불타 죽고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묻는 모습이 어색했다.
그러다 과연 어떤 대답이 정답일지 재언은 짧게 고민했다.
“무섭긴 하지만 구해 줘서 고마워요, 민재 씨.”
“뭘요.”
그게 정답이었는지 차민재가 예쁘게 웃으며 재언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뒤쪽에 있던 주택이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능력자가 죽었으니 결계도 사라졌을 것이다. 위험한 식인 살인마도 죽어 이제 돌아다니지 않을 거고 레헬이 주변에 설치된 함정들을 다 없애 버렸으니 다른 사람들이 다칠 일도 없다.
동굴로 돌아가 학생들을 챙기던 재언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결계가 사라지자 전파가 터져서 보험사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보험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청년들은 살인마에게 끌려간 친구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침울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문득, 뒤에서 조용히 다른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박우민이 조심스럽게 방혜림에게 접근했다.
“혜, 혜림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
결계도 사라지고 식인 살인마도 죽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위험하지 않겠지만, 재언은 떨떠름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쁜 마음을 먹은 김재우에게 술에 취한 그녀를 넘겨주고 못 본 척한 게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차민재를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던 재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쪽 학생들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잠시 다녀올게요, 민재 씨.”
아까까지 나른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잔뜩 풍기던 민재가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재언 씨.”
너무 선뜻 대답한 그의 반응이 조금 미심쩍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한 재언은 방혜림과 박우민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용히 접근한 재언은 여차하면 박우민을 죽이고 방혜림을 증오로부터 해방할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뒤에 숨어서 엿본 그녀의 증오가 조금씩이지만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박우민이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 혜림아. 난 정말 김재우가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 우연히 너와 재우가 하는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협박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말을 이어 가는 박우민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 뒤로 널 도와주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어. 그… 그래서 이번 여행에 일부러 따라왔던 건데.”
박우민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안에 있는 핸드폰을 보는 방혜림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아 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김재우의 것이 틀림없었다.
즉, 그녀를 괴롭히고 협박했던 끔찍한 물건이었다.
일부러 따라왔다는 게 저러기 위해서였나 싶었다. 박우민이 핸드폰을 돌로 치며 깨부수더니 바닥에 던져 잘근잘근 밟았다.
“…계속 이렇게 하고 싶었어. 너한텐 계속 미안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고작 핸드폰이나 훔치는 거…….”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 가는 박우민의 얼굴에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 위에 불까지 붙였다.
“김재우가 사라졌고, 결국 찾지 못했다고 했을 땐 솔직히 기뻤어. 그리고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그동안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면 너한테 말을 꺼내 볼까. 수만 번 고민해 봤는데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재언은 방혜림의 증오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녀가 당했던 굴욕과 수모는 쉽게 해방되거나 용서할 마음이 들진 않겠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증오심의 정도가 줄어든 그녀를 재언이 건들 이유가 없었다.
@
두 사람은 출발한 지 만 하루가 되어서야 별장에 도착했다.
3박 4일의 휴가 일정 중에 겨우 하루가 다 지났을 뿐이지만 심신이 지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차민재네 별장은 확실히 거대했다. 넓은 마당에 뒤쪽에는 수영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워터파크도 아니고 3층 방 테라스에서 수영장으로 연결되는 미끄럼틀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 별장뿐만이 아니라 언덕 너머로 다른 호화로운 별장 몇 채가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무래도 부자들이 별장을 지어 놓고 쉬러 오는 곳 같았다.
“재언 씨, 좀 늦었지만, 밥 먹읍시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차민재가 밖에서 바비큐 준비를 하다가 재언에게 다가왔다. 티 나게 입을 삐죽이며 재언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피곤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냥 간단하게 시켜 먹어요.”
“여기까지 배달 안 와요.”
솔직히 움직이고 싶지도 않고 그냥 대충 먹고 싶었다. 재언이 꾸물꾸물하자 민재가 싱긋 웃으며 침대 위에 널브러진 재언의 위로 올라탔다.
“재언 씨, 저는 사람을 태워 죽이면 흥분해요.”
“…네?”
‘이게 무슨 사이코패스 같은 발언이야?’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성벽이었다. 눈앞에 가득 들어차는 차민재의 얼굴에 재언이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그러자 그가 더욱 몸을 붙여 오며 속삭였다.
“그래서, 지금 밥 안 먹으면 후회할걸요?”
대놓고 수작질을 부리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야하게 성적인 접촉을 해 왔던 적이 거의 없었던 터라 재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 먹어요. 먹으러 갑시다!”
차민재가 기겁한 재언의 얼굴을 내려보다가 빙긋 웃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고작 밥을 먹이기 위해라기에는 협박의 수준이 어마어마했다.
얼핏 느껴진 꼿꼿한 세 번째 다리가 예쁜 얼굴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흉악했다.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난 재언은 발발 떨며 민재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걸었다. 부엌에서 챙겨갈 것이 있다는 그를 두고 재언은 어슬렁어슬렁 걸어 밖으로 나와 마당 한쪽에 있는 바비큐장에 도착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의자에 털썩 앉아 표면에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는 차가운 맥주 캔을 보자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별장 입구 근처로 근사한 외제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이곳 주변은 전부 차민재의 어머니 소유라고 했으니 길을 잘못 든 외부인인 것 같았다.
차의 시동이 꺼지고 운전석에서 외국인 남성이 내리고 뒤이어 조수석에서 그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도 차에서 내렸다.
외국인 남자는 신재언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푸웁!”
그런 남자의 반응과는 달리 재언은 차에서 내린 둘을 보자마자 입에 물고 있던 맥주를 뿜어냈다.
“안녕하세요.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아들이 피곤하다고 보채서 하룻밤만 쉬어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외국인은 어색하지만 제법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는 자연스럽게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옆에 딱 달라붙은 아들은 매우 부드러운 인상의 앳된 티가 나는 소년이었다.
‘마약왕, 네가 왜 여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