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65화 (65/324)

65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재언에게 말을 걸었던 마약왕의 판단은 어떻게 보면 선견지명이었다. 재언이 무어라 소리 지르기 전에 차민재가 뒷문으로 나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재언 씨, 무슨 일 있어요?”

재언은 아주 잠깐 속으로 끙끙 앓은 뒤에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요.”

그리고는 민재가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기 전에 재빠르게 덧붙였다.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분들이신데, 돌아가기엔 산길이 너무 어둡고 아들이 힘들어한다며 하룻밤 머물 수 없겠냐고 물어 오셨어요. 저는 상관없지만, 민재 씨가 별장 주인이니까 결정하세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출발해서 안 그래도 지쳤는데 길까지 잘못 들어 아들이 무척이나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하룻밤까지는 아니고 짧게 쉬어 가기만 할 테니 부탁드립니다.”

알례리는 차민재를 보고도 얼굴빛 한점 바꾸지 않고 사업가적인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재언은 레헬과 마약왕을 붙여 놓기가 매우 걱정스럽고 찝찝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업가로 얼굴이 알려진 알례리를 빌런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론 그가 지오반니와 함께인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둘째 아들인 로메오 지오반니 벤라를 무척 아끼는 아버지였다. 아내와 첫째 아들을 눈앞에서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피붙이이기 때문이다.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일을 하러 오지는 않았단 뜻이니 말이다.

“그러세요.”

차민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가볍게 대답했다. 그에 마약왕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당신이 그 유명한 레드-헬-파이어군요.”

그의 말에 차민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차민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재언은 맥주를 홀짝이며 민재가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과 마약왕이 싱글싱글 웃는 모습을 번갈아 쳐다봤다.

자신이 레헬과 썸 타고 있는 사실을 자식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신의 앞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이 영 낯설고 민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 있는 지오반니의 시선이 따가워서 재언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마약왕보다 죽은 어머니를 닮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지오반니는 부드럽게 생긴 인상만큼은 여전했다.

“저도 다크 카오스 님께 선택받고 싶어요.”

풀이 죽은 채로 중얼거렸던 어린아이가 제법 의젓하게 성장한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능력자로 각성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은 게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인데, 능력이 각성했는진 잘 모르겠다.

짧게 인사를 마친 마약왕이 아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집 안으로 안내할 생각은 없는지 민재는 앉아서 고기를 구웠다. 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의 집을 터는 간 큰 도둑이 세상에 있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별장 주인이 가만히 있는데 나서기도 뭐해 재언은 차민재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그는 불을 다루는 건 누구보다도 익숙하니 고기를 굽는 건 자신이 하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세상의 많은 빌런이 두려워하는 히어로가 별장 앞마당에서 바비큐를 굽고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물이 없네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가져올게요. 그리고 저분들도 배가 고플 테니 불러오도록 합시다. 움직이는 건 제가 할 테니 민재 씨는 여기 있으세요.”

“네.”

차민재를 바비큐장에 두고 집 안으로 들어간 재언의 눈앞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근사하게 생긴 부자(父子)가 거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언은 뒤를 돌아보고 차민재가 여전히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식겁한 얼굴로 둘을 일으켜 세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릎 꿇지 마. 여기 우리끼리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정말 여기는 왜 온 거야?”

몸을 일으켰지만 알례리는 여전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채였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업가인 그가 이렇게 있으니 과연 동일 인물이 맞는 건가 싶었다.

재언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알례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정말 용건이 있어 지나가다가 길을 잘못 든 게 맞습니다. 저 역시 설마 이곳에서 아버지를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누추한 몰골을 하고 아버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겠지요.”

“…….”

저렇게까지 말하면 더 이상 깊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지오반니에게 있다는 용건이 무엇인지도 신경 쓰였다.

잘나가는 사업가의 가면을 쓴 이탈리아 마피아 보스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한국의 이런 산골까지 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재언은 그를 추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동안 고민했다. 지오반니가 옆에 없었다면 인정 없이 추궁했을 텐데, 아들 앞에서 아버지를 잡는 게 내키지 않았다.

“…좋아. 이번만 믿어 주겠어. 더는 사고 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약왕. 그리고 지오반니는… 으음……. 그새 많이 컸네.”

2년 전에는 어린아이로만 보였던 지오반니는 그새 키가 많이 컸다.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섰으니 훨씬 더 클 것 같았다. 빠르게 성장하는 신체와 다르게 소심하고 말수가 적은 건 변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재언을 바라보는 지오반니의 푸른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반짝였다.

“뵙고 싶었습니다, 다크 카오스 님. 위대하신 분을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

내 주변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저 연령대 아이들이 원래 저런 식으로 중2병이 세게 온 것처럼 행동하는 건지 모르겠다. 버드맨과 만나면 죽이 아주 착착 맞을 것만 같았다.

‘…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이 차이가 좀 있지만 만나서 친해지면 조금은 정신 차리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상상을 해도 재언의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갈 게 뻔했다. 재언은 둘을 붙여 놓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엄한 표정으로 단단히 일렀다.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볼일만 보고 돌아가.”

“네, 다크 카오스님.”

“위대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잘생긴 외국인 부자가 저러고 있으니 낯간지러워서 소름이 절로 돋았다. 꾹 참고 손을 휘저어 주며 방에서 나온 재언이 주방에서 생수를 한 병 챙겼다.

그리고 서둘러서 바비큐장으로 향하니 차민재가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여전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접시에는 이미 많은 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짧게 대화한다고 했는데 꽤 기다린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저분들은 밥 생각이 없대요.”

“그래요? 별로 그렇게 기다리진 않았어요. 그저… 여기 있는 고기들을 다 구울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정도로만 늦었어요.”

‘그거… 많이 늦었단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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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의 걱정과는 달리 마약왕은 얌전했다. 오히려 배부르게 고기를 다 먹고 정리까지 마친 뒤 안으로 들어오는 민재에게 명함을 내미는 사업가적인 면모를 내보였다.

알례리가 운영하는 사업은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명해 차민재도 별다른 의심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곤란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방까지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급하게 차에 있던 걸로 가져온 거라 별것은 아니지만, 부디 받아 주세요.”

알례리가 조심스럽게 내민 건 고급스러운 나무상자였다. 그 안에는 별 모양의 라벨이 인상적인, 고급스러운 와인병이 들어 있었다. 꽤 고가의 고급 와인이 분명했다.

‘저런 걸 빌런이 히어로에게 덥석덥석 잘도 주는구나. 저 한 병이 내 월급의 몇 퍼센트 정도나 될까.’

뭐, 그런 걱정은 쓸데없을 만큼 알례리는 부자였다.

“재언 씨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으면 저도 거절했을 테니, 인사는 그에게 하시죠.”

민재가 부드럽게 웃으며 재언에게 공을 넘겼다. 재언은 그의 낯간지러운 말을 자식 앞에서 듣고 있자니 민망하고 어색해서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에 알례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짙게 띠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있으니 지오반니가 눈을 비비며 알례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빠. 저 졸려요.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러 갈게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오반니를 쳐다보며 알례리가 차민재에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늦었군요. 저도 이만 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좋은 자리에서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때에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알례리와 지오반니가 방으로 들어가고, 차민재와 신재언은 2층의 제법 경치가 좋은 테라스로 향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재언은 그제야 긴장이 탁 풀려 늘어지게 앉았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보상받으려는 듯 민재와 함께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 홀짝였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피로가 잔뜩 쌓인 육체에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재언 씨, 지금 자요?”

“…자는 건 아닌데. 좀 어지럽네요. 하하…….”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조는 재언에게 어깨를 빌려준 민재는 능력으로 주변에 날아들어 오는 모기와 벌레를 태워 죽이는 걸 반복했다.

재언은 술기운으로 잠들면서 자신의 이마를 쓸어 주는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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