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66화 (66/324)

66화

눈앞이 잿더미로 가득했다. 본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 재가 된 곳이었다.

원래는 주택이 있었을 잿더미 안쪽으로 여유롭게 걸어가던 알례리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제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정리했다.

그때, 잿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찾던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 지오반니가 그를 불렀다.

“아빠, 찾았어요.”

“오.”

소년이 잿더미 속에서 찾아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영롱한 빛을 내는 아름다운 푸른 구슬이었다. 크기는 소년의 손바닥보다 작았다.

“능력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약을 먹고도 레헬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니. 참 아쉽군.”

알례리가 안타깝다는 듯 말을 흘리자 지오반니가 활짝 미소 지었다.

“아직 실험체는 많아요, 아빠! 벌써 약한 소리 하면 안 돼요.”

사실 몇 달 전부터 이곳에서 퍼진 괴담은 이곳에서 죽은 능력자 남자의 힘이 ‘어느 계기’로 엄청나게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건 다 우리의 위대하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일이잖아요. 저도 얼른 선택받고 싶어요…….”

“그분께 힘을 받지 못해도 언젠간 네 진가를 알아봐 주실 날이 올 거다.”

알례리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의 위대하신 영광을 위해, 이 세계를 그분의 발밑에 두기 위해……. 언젠간 위대하신 아버지도 우리의 업적을 크게 칭찬하시며 곁에 두실 거다. 다른 형제들은 마음이 너무 나약해. 오로지 너와 나만이 그분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거다.”

“네, 아빠! 세상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트려요. 모든 인간이 위대하신 그분의 영광을 외치는 그날까지…….”

알례리와 지오반니는 만면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을 빠져나갔다.

@

짹짹-.

아침 새소리가 오늘따라 우렁찼다.

재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 안에선 술 냄새가 났고 머리는 까치집에 눈 밑이 퀭했다.

술 마시다가 언제 방에 들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끙… 역시 서른이 넘어가니까 밤늦게까지 술 마시는 게 좀 부담스럽네.”

허리부터 머리, 어깨, 무릎, 심지어 발끝까지 숙취로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방에서 나오니 차민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가 예쁘게 웃으며 눈을 마주쳐 왔다.

“일어나셨어요?”

“어… 네. 아침은 먹었어요? 아, 어제 민재 씨가 저를 침실로 옮겨 줬어요? 무거웠을 텐데. 그런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알례… 어제 그 부자는요?”

아침부터 정신없는 자신의 상태만큼 대답할 틈도 없이 한꺼번에 질문해 와도 민재는 차근차근 하나씩 대답했다.

“아침은 아직 안 먹었어요. 제가 옮기긴 했지만 그렇게 무겁진 않았는걸요. 지금은 뉴스를 보고 있었고요. 그리고 어제의 그 부자는 이른 아침에 출발했어요. 일정 때문에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재언 씨에게 고맙다고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더니 빨리 떠났군.’

재언은 민재의 일목요연한 대답에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소파에 앉아 TV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차민재가 뭘 그렇게 진지하게 보고 있던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 자막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보. 거대 빌런 체어맨과 S급 히어로 마더, 경기도 부천의 모처에서 대치 중.]

‘이게 무슨 일이람?’

재언은 너무나도 놀라서 하마터면 옆에 차민재가 있는 데도 엔레이드맨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

S급 히어로 ‘마더’는 인성이 훌륭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쉰 살이 넘는 나이임에도 지금까지도 정정하게 S급 히어로로서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게다가 약 십 년 전부터 보육원을 설립해 부모 없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길러 내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거나 좋은 부모에게 입양 보내는 봉사도 했다.

그녀는 과거에 어린 자식을 납치로 잃은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린 아들을 기리며 보육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마음으로 품는다는 뜻으로 ‘마더’라는 히어로 명을 받았다.

또한, 심판의 칼, 즉 ‘The Sword of Judgment’라는 어느 의미로 굉장한 이름의 능력까지 있었다.

사실 재언은 이런 것들은 조금 참기 힘들었다. 히어로 협회는 과장된 걸 좋아하고 그게 사람들에게 잘 먹힌다고 생각해 간단하게 지어도 될 이름에 굳이 있어 보이는 수식어를 모조리 갖다 붙였다.

물론 그녀의 능력만큼은 과장이 아니었다. ‘심판의 검’은 오로지 빌런들만 베었다.

평범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녀의 칼에 꿰뚫려도 죽기는커녕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악한 빌런들은 칼로 꿰뚫어 죽일 수 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히어로와 체어맨이 왜 대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등줄기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재언은 다음 내용의 뉴스 속보가 나오자 마음을 놓았다.

[속보. 체어맨, 마더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주, 마더는 생명엔 목숨엔 지장이 없으나 병원으로 이송 중.]

“…….”

애초에 빌런과 히어로는 부딪치는 일이 많긴 했지만, 한국에서 S급 히어로와 거대 빌런이 싸우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한국에 등록된 S급 히어로는 전부 10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과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 모두가 각기 맞붙은 적은 있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닐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레헬과 엔레이드맨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등비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나거나 사정이 생겨서 한쪽이 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도주했다고 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하필 마더라니, 체어맨도 기분이 좋진 않겠어.’

혹시라도 체어맨이 잡혔다는 특보가 뜨기라도 할까 봐 재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뉴스를 계속 지켜봤지만, 다행히도 그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잘 도망친 모양이다. 재언은 너무나도 신경 쓰여서 옆에 있는 차민재의 기색도 느끼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이제 뉴스에는 ‘마더’에게 신세를 진 히어로들이나 많은 일반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병원 앞을 서성이는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뉴스에 정신을 쏟고 있는 재언을 보며 차민재가 리모컨을 조작해 TV 화면을 꺼 버렸다. 그는 뉴스를 더 보고 싶다는 재언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배가 고프기도 하고 뉴스를 보며 걱정해 봤자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재언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피곤하다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재언 대신에 민재가 내내 고기를 구웠으니 보답할 차례였다.

“어제 먹고 남은 것들로 볶음밥 해 줄게요.”

“제가 해드리려고 했는데. 진짜요?”

“네.”

엄청나게 맛있게 하지는 못하지만, 자취생활이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재언이기에 기본적인 요리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재언은 어젯밤 바비큐를 하고 남은 고기들을 잘게 잘라 김치와 밥을 넣고 같이 볶으니 그럭저럭 맛있어 보이는 김치볶음밥이 완성되었다.

워낙 고급스러운 외모의 그인지라 이런 음식이 입에 맞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차민재는 남기지도 않고 전부 먹어 치웠다.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소화도 할 겸 주변을 산책하러 나갔다. 아무도 없다 하더니 정말 주변이 휑했다.

수풀이 우거진 산에 그림처럼 넓고 아름다운 별장이라…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은 사시사철 비가 내리고 파도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끔 번개가 내리치는 그곳에는 해가 온전히 뜨는 날이 없었다.

빌런들의 성격이 어두워지는 이유가 그 때문일까.

산책길을 쭉 따라 내려가니 작은 계곡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고 싶은데 지형이 꽤 험해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져 다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차민재가 신재언의 손을 잡고 이끌며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다.

“여긴 어릴 때부터 왔었던 별장인데, 가끔 여기 와서 놀다가 넘어지곤 했어요.”

“하하하… 민재 씨는 어렸을 적부터 뭐든 혼자 척척 잘 해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잘 컸을 것 같아요.”

“그건 아니에요. 저도 제 인생을 바꿔 준 은인이 있으니까요.”

‘어라…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ㄴㅁ위키에 없는 내용이잖아!’

신재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차민재가 싱긋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을 이어 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덕에 얼굴이 알려졌었거든요. 능력이 각성하기 전이었을 때라 평범한 아이였어요. 그렇게 납치범들에게 몹쓸 짓 당할 뻔했을 때 누군가가 구해 줬어요.”

“와, 다행이네요. 히어로였나요?”

“히어로는 아니었어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다만, 아직도 그의 얼굴만은 기억하고 있지요.”

“은인이네요.”

“네, 은인이에요.”

정말 은인을 생각하는 눈빛이 맞는 걸까.

어쨌든 그 은인을 떠올리는 차민재의 목소리가 꽤 부드러웠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상대는 과연 자기가 구해 줬던 어린아이가 지금 세계 최강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체어맨 때문에 불안했던 기분을 마음 한편에 놓아두고 호기심을 먼저 충족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 은인과 연락하고 지내요? 정말 뿌듯하겠어요. 자기가 구해 줬던 아이가 이렇게 굉장한 히어로가 되어서…….”

그러자 차민재가 고개를 흔들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는 서울에 살지 않았어요. 금방 살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만난 그는 저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억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누구일까, 그 운을 차 버린 녀석이. 레드-헬-파이어의 생명의 은인이라니,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겠네! 나쁜 놈이어도 한 번쯤은 봐주겠지? 부럽네!’

럭키 가이 능력으로 다가왔던 운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 장담하는 재언은 레헬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대를 동정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거기다가 지금도 예쁘고 잘생겼는데, 어릴 때라고 달랐을까, 한번 보고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니다.

TV 속 화면에서가 아닌 실제 레드-헬-파이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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