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레드-헬-파이어, 차민재는 신재언이 다니는 회사의 전속 모델로 영입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회사 대표 디자이너의 뮤즈이기도 한 차민재는 최강의 히어로라는 위치에 걸맞게 계약을 성사시키는 게 무척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당시 재언은 입사한 지 1년 조금 지나 갓 신입 딱지를 떼고 2년 차가 된 사원이었다.
한창 분위기가 바뀌는 시즌이었기에 영업팀부터 인사팀까지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재언은 사수인 김 대리의 일까지 도맡아 하는 바람에 정신 차릴 새가 없었다.
어느 날, 박 팀장이 사무실을 쭉 훑어보더니 재언을 불러냈다.
“신 사원이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생겼구먼. 어렵게 모신 분이니까 잘 대접해야 해. 알겠지?”
“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얼결에 끌려가 회사 건물 1층에서 재언은 박 팀장의 뒤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게 되었다.
박 팀장이 버선발로 맞이한 상대는 바로 레드-헬-파이어, 차민재였다. 그는 검은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간편한 복장임에도 충분히 눈이 부실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키는 크고 얼굴이 작아 비율도 엄청 좋았다. 8등신은 무슨, 9등신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다리도 길었다. 티셔츠로도 가려지지 않은 보기 좋은 근육들이 재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전까지만 해도 재언은 레헬만 보면 ‘저 사이코패스 자식, 절대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만큼 감탄했다.
‘진짜 잘생겼네. 우와 진짜 잘생겼어!’
재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레헬은 이제까지 재언이 봤던 사람 중 가장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전까지는 타락한 추기경, 에렌 성이었는데, 오늘에서야 순위가 변동되었다. 물론, 타락한 추기경도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재언의 취향은 아니었다.
박 팀장의 뒤에서 남몰래 레헬을 힐끔거리던 재언은 눈이 호강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엔레이드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에 엔레이드맨이 레헬과 싸우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거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다른 형제들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흠흠, 어쨌든 이번엔 회사일 때문에 만나는 거고… 절대로 가까워지지 말자. 이 남자는 너무 위험해. 내가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받아 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레헬이 내 정체를 알면 분명 날 잔인하게 태워 죽일 거야.’
그렇게 결론지은 재언은 레헬을 절벽 위의 꽃처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민재 씨.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회의실로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박 팀장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이며 차민재에게 말을 건넸다. 멀뚱히 선 그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박 팀장과 신재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차민재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재언의 코앞으로 다가와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왜 이래!’
화들짝 놀란 재언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손을 잡은 힘이 풀리지 않았다.
기겁하는 재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차민재는 신재언을 위에서 아래로 낱낱이 훑어본 뒤 환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홀릴 정도로 예쁜 얼굴이 자신을 유혹하듯 매혹적으로 짓는 눈웃음을 본 재언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예? 잠시만… 레헬, 이것 좀 놔주시고…….”
“레헬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차민재라고 불러 주십시오.”
차민재가 손가락으로 재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 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보이기에는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뜨거운 희열이 보였다.
마치 자식들이 처음 능력을 각성했을 때 보여 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신재언이 의문의 노인에게 ‘증오를 각성 시켜 주는 능력’을 받은 건 10년도 안 되었고 레헬은 그보다도 더 전인 어렸을 때 능력을 각성했다.
그러니 재언이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을 가졌을 땐 이미 레헬은 능력자였다는 의미이므로 자신을 이렇게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슬슬 부담스러워질 때쯤, 박 팀장이 끼어들었다.
“저… 차민재 씨, 혹시 신재언 씨를 아십니까?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혹시라도 사생활 얘기면 어쩌려고 저렇게 물어보나!’
그러면서도 재언은 차민재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일까 싶어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의 능력에 산채로 불타 죽는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재언의 곤혹스러운 눈빛과 마주친 차민재가 드디어 단단히 잡은 손목을 놔주었다. 어찌나 강하게 잡혔는지 손목이 하얗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기억 안 나요?”
“누구인지는 알죠…….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잖아요.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니까요.”
신재언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차민재는 눈웃음 지은 표정을 풀지 않으며 사근사근 입을 열었다.
“아하. 제가 사람을 착각했나 봐요.”
“…….”
“하긴… 제가 어렸을 때 그 사람은 지금의 재언 씨 나이였거든요. 지금은 50세가 넘었으려나. 그런데…….”
차민재의 시선이 짧게 재언의 왼쪽 팔뚝을 향했다. 그걸 알아챈 재언은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능력과 함께 받은 팔뚝 문신은 마치 저주처럼 신재언을 괴롭혀 왔다. 목욕탕이나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어야 할 땐 문신을 가려 주는 살색 패치를 붙이고 다녔기에 이곳에 문신이 있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계약 조건만 듣고 와 보라고 해서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뀌었어요. 재언 씨, 잘 부탁드려요.”
“네?”
차민재가 의미심장한 말을 불쑥 내뱉더니 회의실 안으로 앞서 걸어 들어갔다. 회의실에서 진행된 계약은 생각보다 쉽게 성사되었다.
빌런들에게 있어 살이 떨리도록 무시무시한 레헬은 그 뒤로도 신재언에게 일분일초도 눈을 떼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미인의 시선에 심장이 떨리긴 했지만, 그가 레헬이라는 것에 큰 벽을 느꼈다.
왜 홍보팀 사원인 자신이 전속 모델 레드-헬-파이어의 담당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와 최대한 멀어지려고 노력했던 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박 팀장 또한 의아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위에서 결정한 일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수당은 두둑하게 챙겨 주겠다는 말과 그 기간 동안은 망할 김 대리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했다.
후에 그와 일하며 알게 된 사실은 레헬이 소문처럼 쓰레기는 아니란 것이었다.
그는 꽤 매너가 좋고 나름대로 신재언을 세심하게 챙겼다. 처음에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의 모습에 연기를 잘한다고 여길 정도로 생각보다 얌전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재언 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닙니다.”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물기를 탈탈 털었다. 화보 촬영을 진행하다가 차민재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재언과 부딪혔는데 운이 나쁘게도 수영장 안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대체 왜 수영장에서 겨울 코트 화보 촬영을 해야 하는지 재언은 예술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딱히 차민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게 그는 사진작가의 말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하필 그쪽에 수영장 상태를 확인하던 재언이 있었을 뿐이었다.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된 재언이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재언 씨 팔뚝에 이거 뭐예요?”
재언의 팔을 잡고 부축해 주던 민재가 희미하게 보이는 팔뚝의 패치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 패치입니다. 가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저쪽에 탈의실이 있으니까 옷 갈아입어요.”
언제 챙겨 왔는지 차민재가 수건과 옷가지들을 손에 들려 주며 그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대체 이런 건 왜 챙겨서 다니는 거지?’
차민재가 챙겨다 준 새 옷과 속옷들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 탈의실에 들어간 재언은 빨간색에 표범 무늬가 그려진 속옷을 들고 그의 취향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탈의실에서 머리를 탈탈 털며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팔뚝에 붙인 패치가 신경 쓰였다. 방수가 되긴 하지만 패치의 이음새가 젖어서 팔뚝이 끈적거렸다.
이것도 갈아야겠다고 생각한 재언이 조심스럽게 패치를 떼어 냈다. 곧이어 마치 검은 날개가 그려진 듯한 기괴한 모양의 문신이 드러났다.
이런 건 돈을 준다고 해도 하기 싫을 괴상망측한 디자인인데, 지워지지도 않아서 그냥 가리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탈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재언 씨, 속옷이 바뀌었어요……. 그건.”
차민재가 다른 디자인의 속옷을 든 채 발가벗은 신재언을 멍하니 쳐다봤다. 신재언은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파드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속옷으로 얼른 아래쪽부터 가렸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재언의 상체를 한번 훑고 그의 왼쪽 팔에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영문 모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사냥꾼에게 위치를 들킨 사냥감의 등골 오싹한 기분을 맛본 재언이 잔뜩 굳은 사이에 차민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맞잖아요, 재언 씨.”
“네?”
“나 재언 씨에게 흥미가 있어요.”
그때부터였을까.
차민재는 신재언에게 끈질기게 접근해 왔다. 자식들이 레드-헬-파이어라면 눈에 불을 켜고 게거품을 물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라붙어 오는 미인을 재언은 도저히 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재언은 어영부영 차민재와 제법 가까워져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를 일 년 넘게 유지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