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차민재의 이야기를 들은 재언은 그가 처음 만났던 날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처음 만났을 때, 저를 보고 착각했던 사람이 그 은인이었던 거예요?”
차민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랑 닮았다니 신기하네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재언은 이미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레헬이 그렇게 접근해 온 것일까.
이해는 되면서도 무언가가 찝찝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세계 최강 히어로의 어릴 적 얘기를 듣고 있자니 흥미롭고 꽤 재미있기도 해서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산책을 끝내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공기 좋은 별장에서의 호화스러운 생활이 남은 휴가 기간 동안 이어졌다. 이곳이 천국인가 싶을 만큼 호사를 누렸다.
더우면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고 쌀쌀한 밤에는 편백 욕조에서 온천을 즐겼다. 차민재가 미리 준비해 준 온천 입욕제를 넣고 그가 따라 주는 와인을 마셨다.
‘엄청 좋긴 한데 아직도 찝찝하단 말이야……. 레헬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건가?’
우연히 사고를 겪었던 첫날을 제외하고 남은 2박 3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했더니 금방 지나갔다. 휴일은 미사일보다 빠르다더니 내일이면 달콤한 휴가도 끝이었다.
“민재 씨, 이번에 별장에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잘 쉬었어요.”
“별말씀을요.”
차민재는 정말 자상하고 이상적인 남자였다.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재언은 집 앞에 멈춘 차에서 내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에 도로가 너무 막혀서 바꿔 운전하자고 해도 그는 괜찮다며 극구 거부하고 힘든 티도 내지 않았다.
집까지 자신을 에스코트해 준 차민재와 짧게 키스를 나눈 뒤 떠나는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재언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엔레이드맨! 체어맨과 마더가 싸웠다니 무슨 소리야?”
재언의 부름에 엔레이드맨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원수나 다름없는 레헬과 신재언이 굿바이 키스를 나누는 걸 직접 목격했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체어맨의 사냥이 시작했을 때 우연히 근처에 S급 히어로 마더가 있었다고 합니다. 운이 나빠 들켰고 그녀와 싸우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체어맨의 사냥은 대부분 아동 학대범을 납치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죽을 뻔한 기억 때문인지 체어맨은 심심할 때마다 아동 학대범들을 잡아 와 고문을 일삼았다.
전 세계에 아동 학대범들은 널리고 널렸기에 체어맨의 고문실은 피가 마르지 않았다.
“체어맨은 다쳤어?”
“아니요, 멀쩡합니다.”
그나마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체어맨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한시름 놓은 재언은 우물쭈물하며 엔레이드맨의 눈치를 힐끔 봤다.
재언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엔레이드맨이 그런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 부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엔레이드맨의 태도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마더가 제 친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에 눈치를 보시는 거면, 감히 말씀드리는 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
그렇다. 사실 S급 히어로 ‘마더’는 엔레이드맨의 친모였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은 조각난 장난감처럼 부모에게 애틋한 감정은 없었다. 그렇다고 체어맨처럼 부모를 증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괜히 더 신경 쓰였다.
어머니에게 약간의 잔정도 없어 보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재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은 말해 주기를 꺼리는 것 같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대화해 봐야겠군.’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살펴본 체어맨의 상태는 그리 멀쩡하진 않았다. 엔레이드맨 기준에서 멀쩡했던 걸까 싶었다.
왼쪽 쇄골부터 팔뚝까지 길게 난 상처에서 지금까지도 피가 멎지 않아 지혈을 위해 감아 놓은 붕대 곳곳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피가 대강 멎어 가자 타락한 추기경이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이윽고 기다란 상처를 따라 금색 테두리가 생겼다.
신의 축복이라는 타락한 추기경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추기경은 신에게 사랑받는 힐러가 아니었기에 효과가 크진 않았다.
체어맨이 놓친 ‘피해자’는 히어로 협회에서 S급 히어로를 붙여 보호할 게 뻔하니 다시 노리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재언은 체어맨에게 당분간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서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근신하도록 명령했다.
일주일 내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체어맨의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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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의 회사에서는 전 직원들에게 주기적인 봉사활동을 권장했다.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운운하며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실상 직원들에게는 반강제나 다름없었다.
일정한 시간을 채우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는 공지 탓에 많은 사원이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주말에 봉사활동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사에서 주관하는 봉사활동을 재언은 두 달에 한 번씩 참가해 왔고,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평소 재언은 유기동물들을 보호하는 동물 보호시설이나 달동네 연탄 나르기에 참가했지만, 이번 주는 다른 곳에 지원했다. 마더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지원한 것이다.
마더의 사비로 운영되는 보육원 ‘희망의 쉼터’는 전국의 보육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어린 나이의 미혼모들을 지원하거나 피치 못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부모들이 두고 간 아이들 혹은 학대를 받아 구조된 아이들을 위탁 보호하며 입양처를 구해 주기도 했다.
또한 ‘희망의 쉼터’에서 아이를 입양해 간 부모에게도 일정 기간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요즘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까지 재단을 확장해 해외 언론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됐었다.
이번에 재언이 이곳으로 자원한 이유는 체어맨의 ‘피해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어맨에게는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했지만, 재언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냥 살펴보기만 할 생각이니까…….’
그동안 재언은 체어맨이 노렸던 ‘피해자’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해 몇 가지 알아냈다.
‘피해자’인 여성의 이름은 나주희, 나이는 서른네 살, 이혼 경력이 있고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네 살배기 아들이 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만난 남자와 재혼에 성공, 현재는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
재혼한 지금의 남편은 유명한 물류회사의 계장으로 주말 저녁마다 가족을 데리고 외식을 나가는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졌다.
나주희는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꾸준히 다녔는데, 그곳이 바로 마더가 운영하는 보육원 ‘희망의 쉼터’였다.
희망의 쉼터에 발을 들이는 게 조금 불안했지만, 마더를 마주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뉴스에서 체어맨에게 당한 상처가 회복이 더뎌 그녀가 아직도 병원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광안의 성녀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타인의 생명력으로 치료받는 것은 자신의 신념과는 맞지 않는단 이유 때문이었다.
재언은 이런저런 심란한 마음으로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아이들은 다섯 살부터 초등학생까지 연령대가 아주 다양했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총 서른두 명으로 고등부 네 명, 중등부 여섯 명, 그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안녕.”
그가 웃으며 인사하자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소리쳤다.
“와! 아저씨 진짜 크다!”
“안녕하세요!”
“저 매달려 봐도 돼요?”
‘…어린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적은 드문데.’
활발하고 사교성 좋은 아이들은 벌써 그에게 매달려 인간 그네를 태워 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아이가 어른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이는 게 적어도 이곳에서 보살핌을 잘 받는다는 의미였다.
내심 안도한 재언은 양팔에 아이들을 매달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이 재언을 둘러싸고 자기도 태워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봉사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벌써 체력이 바닥나는 건 곤란했다.
“딱 4명만 더 태워 줄게.”
그런데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꺄르륵 웃으며 더욱 엉겨 붙어 왔다. 양 팔뚝에 매달린 남자아이 둘, 허벅지와 종아리에 매달린 여자아이 둘에 재언은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함께 봉사활동을 나온 남무혁이 재언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재언 씨 인기가 많네요. 제 주변으로는 아이들이 안 와요.”
“하하하…….”
그렇게 아이들과 놀아 주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자 일반 봉사자들이 몇 명이 보육원을 방문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간식거리나 손수 만든 반찬을 한 아름 들고 와 먹을거리가 풍족해졌다. 역시 세상은 이런 좋은 분들 때문에 돌아가는 거였다.
“어머, 못 보던 분인데 이번에 새로 왔나 봐?”
“아, XX 브랜드에서 봉사 나온 신재언입니다.”
재언은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 다가오는 나이 지긋한 여성에게 명함을 주며 서비스 미소를 지었다.
“어머머, 거기 명품 브랜드잖아. 내 딸이 생일선물로 거기 가방을 사 줬거든.”
“감사합니다. 무척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비싸서 신줏단지 모시듯 집에 놔둔다니까.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어.”
그렇게 한 아주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던 재언의 주변을 어느새 아이들이 아닌 아주머니들이 둘러쌌다.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좋아 보이는 외모 덕분에 재언은 어른들이 자신을 귀여워하는 게 익숙했다.
웃으면 살짝 보이는 덧니가 덩치에 비해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아주머니들도 그 부분을 매력으로 꼽았다.
‘…이렇게 찬사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호의를 받는 자신의 모습에 머쓱해진 재언은 정신 차리고 다른 봉사자들을 도와 급식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