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69화 (69/324)

69화

“주희 씨! 승민이 밥은 챙겨 왔어요?”

“아뇨. 어제 뭘 잘못 먹었는지 탈이 나서 죽 먹이고 왔어요. 아프면 집에 있으라니까 친구들 보러 갈 거라고 얼마나 떼를 쓰던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잖아요.”

식판에 배식을 받아 자리 잡고 앉은 재언은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점잖게 생긴 그녀가 바로 체어맨이 노렸던 ‘피해자’ 나주희였다. 턱선보다 조금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는 아주머니 봉사자들 사이에선 가장 젊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주희 씨도 정말 대단해……. 나는 그런 일을 당하면 무서워서 며칠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

“지금도 무섭긴 하지만… 히어로분들이 도와주셔서 안전하게 외출하고 있어요. 승민이도 집에만 있으면 답답한지 계속 보채고요.”

말만 들어 보면 다른 여느 가족처럼 자식을 아끼는 부모 그 자체였다.

재언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곁눈질로 확인한 뒤 빠르게 밥을 먹어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선 벌써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밥 먹고 바로 뛰면 옆구리 아플 텐데…….’

그런데도 아이들은 노는 게 좋은지 놀이터가 떠나가라 꺄르르 웃어댔다.

“참 밝은 아이들이죠?”

옆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쪽 발에 깁스한 중년 여성이 미소 지은 채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재언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이제 보니 그녀가 바로 이 보육원의 이사장이자 S급 히어로 마더였다. 다음 주까지 입원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퇴원했다.

머리카락이 부분적으로 희게 센 것을 빼면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그녀는 연보라색의 아주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머, 마더! 벌써 퇴원하셔도 돼요?”

“아이들이 걱정되어서요. 그리고 주희 씨도…….

마더가 보육원에 등장하자 친분이 있는 봉사자들이 몰려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매우 평범한 첫인상이었지만 그녀는 체어맨과 카운터를 주고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히어로였다.

몇몇 봉사자는 보육원 교사들을 도와 수업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청소와 빨래를 도왔다. 수업에 들어가 다섯 명의 아이들과 종이접기를 하는 일을 맡게 된 재언은 다섯 명 중 한 아이가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억지로 옆에 앉힐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도와줘도 마찬가지인지라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아이가 놀라지 않을 만큼만 신경 쓰기로 했다.

“아이 이름은 유리에요, 이유리. 부모가 아동 학대범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이곳에 온 경우에요. 어른을 무서워하니까 이해해 주세요.”

옆에서 같이 종이접기를 하던 나주희가 재언에게 소곤소곤 속삭였다. 그녀의 주변에 아이들이 많은 걸 보니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봉사자에 속하는 듯했다.

“그래도 유리는 운이 좋은 케이스에요. 우리나라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아도 부모와 분리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 많아서… 정말 가엾죠. 얼른 그런 일들이 사라져야 할 텐데.”

‘체어맨이 이번엔 착각한 건가? 도저히 아동 학대범으로는 보이지 않은데. 아니면 체어맨의 추종자들이 멋대로 벌인 일에 말려든 건가. 도통 모르겠네.’

색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나주희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머, 얘 승민아!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봉사자 중 한 명의 품에 안겨 있던 남자아이를 향해 나주희가 후다닥 다가가 건네받았다.

승민이라고 불린 네 살짜리 어린 남자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다. 어딘가 아픈지 계속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어제 뭘 잘못 먹어서 탈이 났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중요한 건 승민이라는 어린아이에게서 증오 한 점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엄마 품에 안기니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아동 학대범이 아동학대에 관한 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웃기지. 이번엔 체어맨이 잘못 본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한 신재언은 이제 나주희에 대해 알아보는 걸 멈추고 체어맨에게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더의 보육원에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봉사를 왔고 그만큼 마더와 친분이 상당해 보였다. 아들을 데리고 자주 봉사활동을 다니는데, 만약 정말로 아이를 학대했다면 마더의 앞에 아들을 보여 주는 간 큰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확실하게 의심을 없애려 재언은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냈다.

“조각난 장난감. 저녁에 그녀의 집 주변을 자세히 관찰해 봐.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으면 바로 돌아와도 돼.”

조각난 장난감은 재언의 손바닥에서 몇 번 데굴데굴 구르더니 두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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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샤워를 가볍게 끝내고 머리를 털었다. 그때 창문에서 탁탁-, 소리가 들려 문을 여니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채 안으로 들어왔다.

재언의 손바닥 위로 안착한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직접 보여 주었다.

나주희가 사는 곳은 나름 신축인 빌라 3층이었다. 투룸에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지만, 집값이 비싼 동네에 사는 만큼 그럭저럭 잘 먹고 편히 사는 듯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나주희는 어린 아들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작고 도톰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찰싹!

재언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 너, 너! 또 엄마 욕 먹이려고 그렇게 행동했니? 도대체가 너 때문에 살 수가 없어. 거기서 다른 아줌마들 귀찮게 하면 된다고 했어, 안 했어!

뺨을 호되게 맞은 아이가 나동그라져 집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그러자 이번엔 나주희가 시끄럽다면서 아이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신체 위로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잘못 맞기라도 했는지 갈비뼈를 부여잡고 울던 아이가 잘못했다고 두 손을 싹싹 모으자 그제야 폭력이 멈추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아이가 괴로워하자 나주희는 정신이 들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 승민아, 승민아. 엄마가 미안해. 하지만 승민이도 엄마 말 잘 들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엄마를 이렇게 슬프게 하니. 안 그래도 네게서 전남편이 보인다고 남편이 매일 짜증 내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주희의 얼굴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재언은 착잡한 눈빛으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내려다봤다.

어리고 작은 아들을 때리는 나주희 쪽이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식을 진심으로 증오하면서도 순간순간 미안한 감정도 드러냈다. 그러나 그마저도 증오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조각난 장난감이 보여 주는 참혹한 광경은 부모의 훈육이 아닌 학대였다.

때리는 쪽이 증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맞고 있는 아이에게서는 증오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저토록 지독하게 맞아도 결국 부모이기에 미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자신이 잘못했다고만 느낄 가능성이 컸다.

보육원에서 웅크리고 있던 어린 승민이를 얼핏 봤을 때도 증오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래서 아동학대 장면을 보는 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내심 재언은 나주희가 평범한 부모고 체어맨이 착각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어맨이 그녀를 왜 사냥감으로 점찍었는지 알게 되었다.

재언은 한참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집 주변은 분명 히어로 협회에서 수작을 부렸을 게 분명하니 직접 움직여 봤자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게다가 자신이 나서서 레헬까지 나서게 된다면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될 게 분명했다.

결국, 재언은 112로 전화를 해 나주희를 아동학대로 신고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핸드폰으로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 신고받아서 출동하긴 했지만, 부모가 너무 완강하게 부인했어요. 아이도 아니라고 하고 잘못해서 혼낸 걸 선생님이 오해하셨나 봅니다.

“네?”

재언이 황당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들었던 것이기를 빌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 주변의 이웃분들께도 여쭤봤는데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다고.

“네, 알겠습니다.”

재언은 한껏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신은 조각난 장난감 덕분에 폭력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고 신고했던 것이지만, 경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게다가 주변 이웃들도 나주희가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꾸준히 나가는 것도 알 테고 밖에서는 누가 봐도 좋은 어머니의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다.

재언은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검지로 긁적였다. 일이 쉽게 풀리기는커녕 꼬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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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언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회사 업무는 매우 순조롭게 굴러갔다. 김 대리가 망쳐 놓았던 신입은 일머리가 좋고 눈치도 빠른 데다 싹싹하게 굴었다.

선을 넘지 않게 예의 바르면서도 재언을 편하게 해 주었다. 제대 후 대학교를 갓 졸업한 스물일곱 살 사회 초년생인 그는 신재언과도 말이 잘 통했다.

담배를 피우긴 해도 점심시간에 한 번, 오후 지나서 한가해질 때쯤 한 번, 드물게 피우는 게 아주 흡족했다. 담배 피운다고 한 시간에 한 번씩 나가서 십 분을 잡아먹는 골초들이랑 비교될 정도였다.

‘일머리가 좋아서 김 대리가 알려 준 엉터리 교육을 너무 잘 습득했던 거군. 정말 억울했을 텐데 김 대리 때문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사적인 이야기도 잘 안 해. 아침마다 인사도 잘하고, 오랜만에 정말 좋은 신입이 들어왔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쓴다는 태블릿 PC를 들고 다니면서 재언이 업무를 알려 줄 때마다 열심히 적는 게 참으로 흐뭇했다.

실수해도 솔직하게 말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건 물론 해결될 때까지 지켜보며 배우려 했다.

재언은 신입사원이 제발 오래 버텨 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에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었다.

그런데… 이놈, 친절하게 굴수록 뭔가 눈빛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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