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70화 (70/324)

70화

“대영 씨, 어딜 보고 있어요?”

“네?”

“아니, 시선이 아래쪽을 향해 있어서.”

“아, 선배님 몸이 되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하세요?”

“가끔 헬스장에서 운동하긴 해요. 그것보다 이 차트 말인데요…….”

이상한데? 이놈 눈깔이 좀 이상한데!? 그냥 감탄처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데?

게이가 길거리에 치이는 돌멩이만큼 흔한 건 아니지만 같은 남자를 이런 식으로 쳐다본다?

게이가 아니라면 그럴 수 없었다.

재언은 럭키 능력과는 별개로 안목이 낮은 탓에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게이의 흑심을 알아차리는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대충 이해됐죠? 그러면 점심 먹으러 갑시다.”

재언이 마우스에서 손을 떼며 말하자 김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걸어 놓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재언 또한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미리 회사에 가져다 놓은 얇은 코트 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최윤정의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이 주임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어머, 어머, 이거 우리 회사 라이벌 xx 브랜드의 코트 아니에요? 엄청 비싼 데다 한정판이라 쉽게 구하지도 못했을 텐데. 어디서 구했어요?”

“아… 이거 비싼 겁니까?”

“우리 연봉만큼이요!”

‘…하필 내가 다니는 회사 라이벌 브랜드의 제품을, 그것도 내 연봉보다 비싼 걸 주는 저의가 뭐지? 그리고 이렇게 가벼운 코트가 몇천이나 한다고?!’

재언은 맹렬하게 코트를 그냥 벗어던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코트에 더러운 게 묻을 때마다 ‘–100만 원… -100만 원.’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때 뒤에서 외투를 걸치던 김대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선배님 부자예요?”

그의 물음에 당혹스러워진 재언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선물 받은 겁니다.”

자신은 부자가 아니라는 의미로 돌려서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 주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재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재언 씨랑 썸 타는 그 끝내주는 미인? 진짜 예쁘다더니 돈까지 많나 봐요?”

‘예쁘고 돈이 많은 건 맞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오늘따라 하필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이 순두부찌개 전문점이었다. 매장 구석에 마련된 옷걸이에 걸어 두고서 밥을 먹는 와중에도 재언은 코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밥을 먹는 사람들과 거리가 있는 편인데도 혹시나 국물 한 방울이라도 튈까 봐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밥을 먹고 회사로 돌아왔다.

퇴근 시간 직전까지 업무와 신입 교육을 하고 있을 때, 옆 부서 남무혁이 찾아왔다.

“재언 씨, 오늘 끝내고 한 잔 어때요?”

남무혁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걸 보니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컴백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흰 와이셔츠 너머로 보이는 옐리의 대문짝만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심란해진 재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습니다.”

“아, 그…….”

“…….”

‘아니 도대체!’

히어로 협회에서는 내가 이미 레헬의 애인이라고 알려지지 않나. 회사에서는 썸 타는 상대가 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어느새 예쁘고 돈 많은 미인과 만난다고 소문이 나질 않나.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소문을 좋아하는 건지.

최애 아이돌의 컴백 생각으로 들뜬 남무혁은 자신의 벅차오르는 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어지자 풀이 죽어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재언이 시계를 확인하고 옆에 앉아 있던 김대영을 돌아봤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대영 씨. 먼저 퇴근하세요. 벌써 여섯 시 십 분이네요. 정각에 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자 김대영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고개를 끄덕여 신입을 보낸 뒤 재언은 목덜미 뻐근해지는 느낌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번 신입은 싹싹하고 제대로 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이일 줄이야!’

제발 자신이 도끼병에 걸려서 착각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재언이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땐 저녁 일곱 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때마침 회사 앞에 도착해서 기다리겠다는 차민재의 메시지도 와 있어서 서둘러 회사를 나섰다.

이번엔 재언이 먼저 나서서 잡은 약속이었다. 휴가 때 별장에서 무척 근사한 대접을 받은 듯해 이번에 큰맘 먹고 차민재에게 한턱내고 싶었다.

차민재는 종종 꽃다발을 선물해 주곤 했는데 지금도 고급스럽게 생긴 외제 차 앞에서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무척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강남 한복판에서 저걸 건네받는다면 내일 포털사이트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뜰 것만 같았다.

재언은 못 본 척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간 뒤, 차에 올라탔다. 차민재는 재언이 머쓱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타는 걸 보며 웃다가 뒤따라 운전석에 자리 잡았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요.”

“네.”

재언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건네받은 꽃다발을 감상했다.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꽃다발에서는 정말 신기하게도 판에 그린 듯이 서투른 세계 최강 미인의 수작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인기가 많아서 연애 경험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는 여태까지 한 번도 누군가와 사귀어 보지 못한 모태 솔로였다.

자신과 한 키스가 그의 첫 키스라는 사실을 듣고 처음엔 믿지 못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재언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재언이 꽃다발을 뒷좌석에 놓고 내비게이션을 찍으면서 입을 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평이 좋더라고요. 고깃집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긴 하는데, 정말 맛집이라고 했어요. 민재 씨 고기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알아봤는데, 서울에서 좀 먼 게 걸리네요.”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재언의 말을 듣고 있던 민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휴가 때 별장에 있는 동안 그는 대략 세 번 정도 바비큐를 구웠다. 사흘 내내 하루에 한 번 꼴로 고기를 먹었다는 소리였다.

재언은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마지막에는 고기가 조금 질릴 정도였다. 그에 비해 차민재는 고기를 한 점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도착한 가게는 1인분에 5만 원이나 하는 값비싼 음식점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인적이 드문 허허벌판에 간판만 올려진 가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인기가 많은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가게 안쪽에 차민재와 자리를 잡고 앉은 재언은 음식을 기다리며 가볍게 떠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재 씨는 S급 히어로 마더와 친해요? 이야기 나눠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존경스러운 히어로지만 저와는 맞지 않아요. 그녀는 빌런도 고치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비로운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대립했었죠.”

…엔레이드맨을 반죽음으로 만들고 그의 친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니.

체어맨과 한판 붙은 마더에 관해 물어보면 수상하게 여기려나?

레드-헬-파이어에게 자신의 정체가 들키는 순간 통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와 만남을 이어 가면서도 늘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떠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슬쩍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보니 별다른 표정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대한민국의 S급 히어로들은 전부 유명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에서 다뤄지곤 했다. 그러니 레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놓은 재언이 편안한 얼굴로 고기를 집어 먹기 시작하자 차민재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상추로 쌈을 싸서 고기를 먹던 재언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과연, 고기는 비싼 값을 했다. 가게 종업원들도 레드-헬-파이어를 보고도 호들갑 떨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비싼 고기인 걸 아는데도 자꾸 입 안으로 넣게 된다. 고기를 먹다 보니 술도 마시고 싶었지만, 술은 둘 다 마시지 않기로 했다. 재언은 내일도 출근하는데 마시고 싶지 않았고 민재는 운전 때문이었다.

“재언 씨,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아, 이번 주말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하자 미묘한 정적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차민재 눈썹이 꿈틀댄 거 같은데? 화났나? 설마 화난 건 아니겠지? 뒷감당해 줄 사람도 없는데!’

재언은 속으로 오들오들 떨었지만, 다행히 그는 화를 내진 않았다. 단지, 회유하듯 자상하고 부드럽게 물을 뿐이었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재언 씨를 붙잡고 놔주질 않더니, 주말에는 또 누가 재언 씨의 시간을 빼앗았을까요?”

“…음.”

재언은 짧게 고민한 뒤 대답했다.

“저번 주에 회사 봉사활동 다녀온 건 알고 계시죠? 이번 주에 또 그곳으로 봉사 가기로 했습니다.”

“아, 마더가 운영하는…….”

‘음, 마더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봉사활동 갔다고 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 안 했던 거 같은데……. 그냥 회사 인사고과 때문에 봉사활동 가서 시간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대체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퍼져 나가는 거람……?’

봉사활동을 다녀온 이후 재언은 계속 고민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말이다.

체어맨처럼 아이의 부모를 납치하는 게 편하겠지만 혼자 남은 아이가 어떻게 될지 걱정되는 마음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나주희와 승민이를 떨어트리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그녀가 사실 아동 학대범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게 먼저일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 어영부영 다음 봉사활동을 신청하고 말았다.

“흐음, 이번에 꽤 괜찮은 연극을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그러면 제가 가도 됩니까?”

“네? 어딜요?”

“재언 씨랑 봉사활동,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안 돼! 그런데 거절할 명분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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