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결국, 재언은 민재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후일을 걱정하면서도 신재언은 하루가 바쁘게 업무를 보고 체어맨의 상태도 확인하는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체어맨은 타락한 추기경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거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더 또한 완전히 회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어맨은 자신이 사냥감을 놓쳤다는 사실에 굉장히 분해 하면서도 히어로 협회가 나섰다는 소식에 미련 없이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세상에는 나주희보다 더 악독한 아동 학대범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동안 나주희가 승민이를 때리지 않았냐면 그건 아니었다.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나주희가 손을 올리는 걸 볼 때마다 경찰에 신고했다.
네 번째 신고에 이르렀을 때 재언은 경찰서에 불려 갔다. 허위신고로 처벌받고 싶지 않으면 그만하라는 훈계를 받고 겨우 풀려났다.
차라리 나주희와 학대를 방관하는 그녀의 남편까지 싹 납치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주말이 와 버렸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 적당한 해결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새워 뒤척이며 고민하는 바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게다가 주말 전날, 신입사원인 김대영이 묘하게 짜증 나는 말을 해서 기분이 더욱 저조했다.
“선배님은 썸 타는 분도 계시면서 저한테 엄청나게 잘 웃어 주시네요.”
“네?”
“아닙니다.”
재언은 갑자기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저 혼자 선을 긋고 딱딱하게 대답하는 김대영의 옆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웃는 모습은 기본 아니던가. 인간관계 기본에 충실한 자신의 모습에 대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게이라도 만나는 남자들 모두에게 꼬시거나 추파를 던진다는 생각으로 웃어 주진 않는다.
‘정말 황당한데……. 이번 주 교육이 끝나면 다음 주부터 업무에 투입되니까 자주 마주치진 않겠지. 같은 팀원이긴 해도 맡은 프로젝트가 다르잖아?’
회사생활 3년 차, 이런 일 저런 일 자주 겪는 편이지만 웃어 준 거로 꼬투리 잡는 건 처음이었다. 김 대리도 저러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또 밤잠을 설쳐 두통이 일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두 병 사서 밖으로 나오자 차민재가 때마침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멋들어지게 차를 세우고 내린 그는 재언에게 다가와 뺨에 입부터 맞췄다. 아침부터 받는 미인의 뽀뽀라니, 이런 호사가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저도 차를 끌고 갈까 했는데…….”
재언이 중얼거리자 민재가 예쁘게 웃었다.
“그럼 제 차는 여기 주차해 놓고 재언 씨 차를 타고 가면 되겠네요.”
“그럴까요?”
어떻게 해서든 같은 차를 타고 가려는 수작이 노골적이었기에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타는 것마다 억대를 호가하는 고급 차량을 여러 대 보유한 그에게 빌라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자동차를 보이기는 좀 부끄러웠지만 나름대로 할부 없이 구매한 국산 승용차였다.
이전에 민재가 말하기를, 그가 타고 다니는 차들은 대부분 어머니가 사 준 것으로 있으니까 타는 것일 뿐, 차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차민재와 함께 보육원으로 들어간 재언은 한데 모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난감한 표정의 보육 교사들을 향해 누군가가 매서운 기세로 나무라는 중이었다.
“내가 여기 5년이 넘게 봉사를 왔는데, 당신들은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승민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일단 경찰에 신고했고, 히어로 협회에 연락도 넣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순간적으로 재언의 머릿속에 어두웠던 산속 풍경이 떠올랐다. 살해당할 뻔했던 언럭키와 아들을 죽여 놓고도 모른 척했던 아버지들이 겹쳐 보였다.
설마.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재언 씨?”
혹시라도 자신의 망설임 때문에 아이가 잘못됐을까 봐 초조했다. 피가 식는 듯한 기분까지 들어 재언은 다급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주희는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끼어들어 말을 걸자 구경하러 온 줄 아는 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잔치라도 열린 줄 아세요?!”
예민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이를 잃어버려 초조해하는 부모 그 자체였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승민이가 놀이터에 있다가 사라졌는데, 아이가 있던 곳이 CCTV로는 확인되지 않는 사각지대였기 때문에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때, 재언의 뒤쪽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희 씨. 이번 일은 제가 발 벗고 나서서 도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돼요. 특히 이럴 땐, 더욱…….”
“…….”
희게 센 머리카락을 부러 염색하지 않고 연회색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다가왔다. 이 보육원의 이사장이자 S급 히어로 마더였다.
나주희도 차마 그녀에게는 소리칠 수는 없었는지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지금 상황을 잔뜩 신경 쓰는 중이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재언을 바라보던 차민재가 한걸음 나서서 마더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마더. 곤란한 상황인 것 같은데 손 좀 빌려드릴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차민재는 신재언을 자신의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민재의 얼굴을 본 마더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차민재 씨. 긴급상황이니 도움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여긴 어수선하니 원장실로 같이 갑시다.”
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껄끄러워 보이진 않았다. 마더는 뒤를 돌아 나주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희 씨,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승민이는 반드시 찾아드리겠습니다.”
“…….”
마더를 따라 들어간 원장실 안에서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스무 살 초반 정도의 나이쯤으로 보이는 여성은 가슴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흰 티, 청바지를 입은 수수한 차림새였다.
그녀의 이목구비가 매우 낯이 익다고 느낀 재언은 그녀가 엔레이드맨의 친동생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더가 원장실로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엄마! 어떻게 됐어?”
친근하게 마더에게 다가오려던 그녀는 뒤따라오는 레드-헬-파이어를 보고 당황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제자리에 우뚝 선 그녀는 원장실로 들어오는 사람이 레드-헬-파이어가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아… 뒤에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저는 마더의 사이드킥 박주연입니다.”
“반가워요.”
차민재가 시큰둥한 얼굴로 인사하며 마더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신재언은 과연 자신이 이곳에 끼어도 되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민재의 옆에 앉았다.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원장실에 있는 이들은 재언을 딱히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사라진 승민이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승민이를 데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봉사 활동차 보육원에 온 나주희는 보육 교사들에게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맡기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잠시 후, 대충 일을 끝낸 나주희가 밖으로 나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다가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보육 교사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후 아무리 찾아도 보육원 내에 승민이가 없다는 걸 눈치채고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보육 교사의 실수가 확실했기에 재언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참, 내가 그녀를 몰래 살펴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체어맨의 사냥감들 대부분이 아동 학대범이라는 걸 밝힐 수도 없으니 답답하군.’
나주희가 현재 승민이를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신재언뿐이었다.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려니 참으로 답답했다.
마더는 체어맨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지 이따금 가슴께와 배 부분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지 박주연은 연신 마더를 힐끔거렸다.
“일단 보육원 밖으로 나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방심하긴 일러요.”
말을 잠시 멈추고 짧게 침묵한 마더는 고개를 들어 신재언을 쳐다보며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실례했습니다. 신재언입니다.”
“재언 씨,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주희 씨도 지금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될 거예요.”
“…….”
그때, 차민재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재언 씨, 이레일과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네.”
이레일은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 차민재가 그쪽에 뭘 요청한 걸까 싶었다.
원장실 밖으로 나가는 차민재의 뒷모습을 보는 재언의 귓가에 마더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신재언은 눈을 내리깔고 엔레이드맨을 떠올렸다.
“아버지, 됐어요.”
엔레이드맨이 빼빼 마른 손으로 신재언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해가 뜨기 전부터 자정이 넘는 새벽까지 섬의 고된 일을 도맡아 했던 노예 아이는 섬을 나와서도 오랜 기간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의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말하거나 쓰는 것도 매우 서툴렀다. 엔레이드맨은 섬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 차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랬던 엔레이드맨이 어두운 시선으로 자신의 피붙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겨우 가족들을 찾았을 땐, 이미 부모에게 다른 자식이 있었다.
엔레이드맨을 제외한 세 가족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 그 자체였다. 그의 어머니는 S급 히어로였고 아버지는 히어로 계열 회사에서 아내를 내조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엔레이드맨은 능력을 각성하고 섬의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한 빌런이 되었다.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거대 빌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은 데다가 레드-헬-파이어와 싸우다가 얼굴이 알려진 상태였다.
“저긴 이미 행복한 가족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더 이상 그들을 찾지 않겠어요. 박주현이란 사람은 죽었어요, 아버지. 이제 저는 아버지를 섬기는 엔레이드맨일 뿐입니다.”
“엔레이드맨. 다시 생각해……. 그들은 계속 널 찾고 있었어. 분명 너를 보고 싶어 할 거야.”
“조각난 장난감은 하나뿐인 친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서 나서셨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이제 저곳에 제가 끼어들어 봤자 파국이에요. 그리고… 벌써 20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 제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 아버지.”
조각난 장난감은 자신의 참혹한 모습을 하나뿐인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이런 모습을 계속 숨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딸의 죽음이 자신과 연관되었다는 걸 알게 된 부친이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언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엔레이드맨의 가족은 달랐다. 그들은 슬픔을 딛고 살아가려 하고 있었다.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부. 단란한 세 가족을 쳐다보던 엔레이드맨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하지만 재언은 그의 뒷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엔레이드맨!”
“저긴 제가 없는 게 더 행복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