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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73화 (73/324)

73화

보육원을 차리고 여러 아이와 부모들을 만나 왔을 마더와 박주연이 승민이의 몸에 새겨진 학대의 흔적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놀다가 넘어지거나 일상생활에서 생길 법한 가벼운 멍이 아니라는 것만은 일반인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마더는 쪼그려 앉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흉터와 멍으로 얼룩진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재언은 그 모습을 뒤에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지금까지 히어로 같지 않은 히어로들을 너무 많이 겪어 왔다.

제대로 된, 정의감 넘치는 히어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마더가 눈앞의 가여운 아이를 모른 척하는 히어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진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승민아! 너 어디 있었어!?”

나주희가 승민이를 발견하고 달려오다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의 승민이와 그런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마더를 본 탓이었다.

“나주희 씨, 이 멍들은 뭐죠?”

박주연이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물었다. 나주희는 5년 이상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해 온 덕에 나름대로 모녀와 친분이 깊었다.

모녀가 아는 나주희는 아동학대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학대를 겪고 들어온 아이들을 돌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선한 사람이었다.

충격에 빠진 박주연과 마더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주희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이웃에 민폐를 끼칠 정도로 울어 젖혀요. 거의 매일같이 이웃집에 선물을 들고 찾아가서 사과해야 할 정도라고요. 며칠 전엔 저도 모르게 팔을 올렸는데, 정말 툭 친 것뿐이에요. 그랬는데 애가 자지러지게 놀라더니 혼자 넘어지면서 서랍 모서리에 부딪힌 거예요.”

‘…그래서 이웃들이 나주희 편을 들었던 거군…….’

조각난 장난감이 보여 준 영상을 통해 재언이 파악한 나주희는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좋은 엄마, 아내, 이웃이 되는 것에 집착했다. 그래서 아들인 승민이가 밖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굉장히 견딜 수 없어 했다.

게다가 현재 남편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승민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까지 합쳐져 화풀이처럼 아이의 몸에 손을 올렸고 날이 갈수록 수위가 심해졌다.

마더는 한기가 들 만큼 서늘한 눈빛으로 나주희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그런 멍이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나주희 씨… 오늘부터 이 아이는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히어로 협회와 아동보호센터에서 전화가 갈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다시 데려가고 싶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오세요.”

마더의 말에 나주희의 얼굴이 잔뜩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제, 제가 정신병자라는 소리예요?! 마더! 그 아이는 제 아이예요. 제 자식이라고요! 그런데 엄마 허락도 없이 애를 데려가겠다고요? 그러면 저도 마더를 고소하겠어요. 제가 학대를 저질렀단 증거가 있습니까? 전 아이를 때리지 않았어요, 절대로 학대하지 않았다고요!”

그런 그녀의 말이 마냥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회에서 아이의 첫 번째 보호자는 부모이고 나주희는 승민의 친모였다. 그녀가 지금 학대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정황이 밝혀질 때까지 승민이의 보호자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더의 중후하고 냉정한 얼굴에 힘줄이 잔뜩 돋았다. 눈빛이 사람 한 명 정도는 찢어 죽일 정도로 매서웠다.

어찌나 기세가 무섭던지 자신이 그녀와 직접 대치한 것도 아닌데 재언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칠 뻔했다.

“증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주희 씨, 당신이 정말 아이를 학대하지 않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면 제 검에 베일 일은 없겠죠. 하지만… 그게 거짓이라면, 검은 당신의 심장을 뚫을 겁니다.”

“뭐, 뭐예요? 꺄아아악! 살인마!”

박주연에게 승민이를 맡긴 마더는 가슴 부근에 손을 얹어 빛나는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띠는 검은 그녀의 심장에 기생하고 있는 ‘성역’이자 ‘심판’의 검, 저지먼트였다.

심판의 검에 베이거나 찔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빌런으로 만약 그녀가 정말로 무고하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훈육을 위해 승민이를 때린 것이 맞으며 진심으로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심판의 검은 그녀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더가 검을 뽑아 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 모양새를 보니 그녀 또한 자신이 한 짓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걸 잘 아는 듯했다.

마더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능력자도 아닌 일반인에게도 거리낌 없이 공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재언은 살짝 놀랐다. 마더가 생각보다 훨씬 터프하며 앞뒤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간접적으로 접했던 S급 히어로들이 각기 개성이 강한 편이긴 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온화하고 냉정해 보였던 마더가 누구보다도 불도저 같은 성격을 가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자리에서 앞뒤 잴 겨를도 없이 행동하는 마더를 말릴 수 있는 건 레헬뿐이지만 재언이 봤을 때 그가 이런 일에 나설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심판의 검은 일반인을 베지 않습니다. 그녀가 정말 무고하다면 무서워할 필요는 없겠죠.’

이런 말이나 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릴 게 눈에 훤했다.

나주희의 심장을 향해 심판의 검이 가까워지는 순간 박주연에게 안겨 있던 아이가 별안간 울음을 터트리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으아, 으아앙!”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엄마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만 같았다. 그 소란에 마더의 검이 나주희의 가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나주희는 혼절할 듯이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승민이는 결국 박주연의 품에서 벗어나 모친에게 달려갔다.

마더는 심판의 검을 갈무리하여 다시 자신의 심장으로 돌려놓은 뒤 나주희를 끌어안고 펑펑 울어 젖히는 아이를 떼어 내고 품에 안았다.

“…재언 씨, 못 볼 꼴 보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 보육원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치료를 완전히 끝낸 다음, 아들을 데려갈 자격이 생겼을 때… 그때 승민이가 선택할 수 있게 보호하고 알려 줄 예정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 자신이 당한 것이 학대였고 부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요. 인연의 끈을 먼저 놓는 게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몫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지킬 생각입니다.”

마더의 보육원 시설은 자신이 보기에도 훌륭하고 시스템도 좋았다. 그러니 승민이는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차별 없이, 폭력 없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구급대가 도착하고 차민재가 재언의 곁으로 왔을 땐 이미 사건은 모두 해결된 다음이었다.

그리고 재언은 처음으로 마더를 찾아온 히어로 협회의 ‘높으신 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한국 히어로 협회의 회장, 김의장 회장이었다. 그는 고급 외제 차를 타고 A급 히어로 두 명을 호위로 대동한 채였다.

아무래도 마더가 일반인을 공격하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온 듯했다.

그는 짙은 갈색 머리에 눈매가 매우 사납고 얇은 입술을 가진 외모를 외모였는데, 얼굴만 봐도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더는 승민이를 박주연에게 맡기고 김 회장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했다.

“김 회장님.”

김 회장이 가늘게 벌어진 입술 끝을 잔뜩 끌어올렸다.

“히어로가 일반인을 공격하다니,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우리 협회가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대중에게는 다크 카오스인 자신과 그가 대립하는 모양새로 알려졌지만, 재언은 사실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도 얼굴이나 능력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그렇다고 마냥 얕잡아 봐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알려진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 협회장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말이다.

“제 검은 무고한 사람은 베지 않습니다. 만약 제 검에 비었다면, 상대는 악독한 빌런이었다는 것이겠죠.”

“이 세상에 청렴결백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며 살아가는 게 사람이지. 그걸 절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고 빌런과 일반인이 나뉘는데……. 비능력자인 그녀가 죽었으면 어쩌려고?”

“심판의 검은 단지 악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무작정 베지는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듯 행동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베거나 베지 못하는 건 제 검도 마찬가지입니다.”

“S급 히어로란 것들은 아무튼 한마디도 안 지지.”

김 회장은 신재언의 옆에서 느긋하게 서서 구경하는 레드-헬-파이어를 한 번 노려보고는 일반인에게 능력을 쓰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충고하더니 돌아갔다.

그런 회장의 뒷모습을 보던 차민재가 턱을 쓰다듬으며 뭐라 중얼거렸는데, 워낙 작아서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음험하게 빛나는 예쁜 두 눈이 마치 저놈을 사고사로 죽일까 아니면 폭파시켜서 은밀하게 매장할까 정도로 고민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번 봉사는 쫑 났으니 우리 저녁이나 먹고 들어갑시다.”

그래도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려서 기분이 한결 좋아진 재언이 민재에게 제안했다. 방금까지 위험하게 눈을 번뜩이던 차민재가 고개를 돌려 꽃처럼 수줍게 웃었다.

갑자기 저녁 데이트를 잡게 된 셈이지만, 차민재의 얼굴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꽃망울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미소에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박주연이 승민이를 껴안고 재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 오늘 일은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나중에 연락해 주시면 우리 사무실에서 사례할 테니 꼭 연락해 주세요.”

울다 지친 승민이를 껴안은 채로 명함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이는 그녀의 움직임은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러다 명함을 꺼내면서 품 안에 있던 낡은 장난감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소중한 물건인지 박주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아이를 안고 있어서 몸을 숙여 줍지 못한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재언이 허리를 숙여 장난감을 주워 들었다. 전체적으로 도색이 까진 아이 손바닥만 한 조립식 로봇 장난감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오래 탔는지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박주연이 머쓱하게 웃으며 재언에게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품 안에 넣었다.

“오빠의 유품이에요……. 부모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빠에게 많은 걸 보여 주고 싶어 하셨대요……. 그런데 여행을 떠나던 도중 차에 있던 오빠를 누군가가 납치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만 거죠. 그때 남은 유일한 물건이 이 로봇이었고요. 그래서 부적처럼 꼭 가지고 다녀요. 언젠간 오빠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제야 재언은 박주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이 눈 안에 포도 알갱이처럼 방울방울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재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얼굴도 모르는 오빠를 20년이나 기다렸다고요? 가족으로서의 유대감도 뭣도 없었을 텐데……. 지금쯤이면 전부 잊을 만하지 않나요?”

“뭐라고요?”

엄청나게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알지만, 재언은 확신을 얻고 싶었다. 재언의 말에 박주연이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재언을 노려봤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얼굴을 몰라도, 같이 지낸 적이 없다 해도……. 부모님 마음속엔 아직도 오빠가 살아 있어요. 그러니 저도 오빠를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우린 가족이니까요!”

얼굴은 잘생겼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눈앞의 남자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며 박주연은 명함을 재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고 보육원 건물 안으로 빠르게 향했다.

아마 속으로 신재언의 욕을 마흔아홉 번 정도 하면서 저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언은 후련한 얼굴로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때, 타락한 추기경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위대하신 우리의 전지전능한 아버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그들에게 희망이 보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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