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정의 집행!”
“와아아아-!”
빨간색 타이즈를 입고 빨간색 헬멧을 쓴 정의의 히어로가 양손을 교차하며 잔뜩 멋있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연극을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으며 기뻐했다.
성인이 즐기기에는 조금 유치하지만 요즘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많은 썬히어로맨이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다.
일본에서 만든 3D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에 상륙하면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덕에 극장판, 연극, 뮤지컬까지 범위를 넓혀 가는 중이었다.
곧 모바일 게임으로도 출시되는 썬히어로맨은 리더인 레드맨과 핑크맨을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컬러풀한 히어로들이 흉악한 빌런들을 물리치는 내용의 어린이 애니메이션이었다.
물론 재언은 이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히어로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이곳으로 연극을 보러 온 이유는 옆에서 재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할짝대는 작은 꼬마 때문이었다.
꼬마는 사촌 형의 아들로 재언에게는 하나뿐인 조카였다. 나이는 올해로 여섯 살, 신백건이라는 멋있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최근에 열린 전국 영재 대회에서 당당히 상을 받게 된 아이가 시상식을 참가하러 서울까지 온 것이었다. 사촌 형 부부가 사흘 내내 서울에서 함께할 수가 없어 재언이 잠시간 돌봐 주기로 했다.
아이가 서울에 도착해 차를 타자마자 재언에게 다짜고짜 썬히어로맨을 보고 싶다고 졸랐다.
“삼촌! 나 썬히어로맨 보고 싶어!”
“썬… 뭐?”
“썬히어로맨!”
그러고 보니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촌 조카의 옷이 심상치 않았다. 앞부분에 빨간 쫄쫄이와 헬멧을 쓴 이상한 남자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재언은 서울의 xx 백화점 안에 있는 공연장까지 와 어린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썬히어로맨 연극을 관람하게 된 것이었다.
공연장 안은 어린아이들과 보호자들로 가득했다.
이 정도로 유명할 줄 몰랐는데…….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 너희들도 빌런이 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양치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으라고!”
빌런 취급이 너무 하찮은걸…….
레드맨의 마지막 당부를 마지막으로 연극이 끝났다. 혹시라도 인파에 휩쓸려 조카를 잃어버릴까 봐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언은 새로운 위기를 맞닥뜨렸다.
공연장 출구에서 백화점 출구로 이어지는 길목에 썬히어로맨 관련 MD를 진열해 놓은 판매대가 펼쳐져 있었다. 입에서 절로 ‘헉’ 소리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모자, 티셔츠, 신발, 바지와 같은 의류부터 시작해 썬히어로맨 멤버들이 각자 차고 있는 변신 시계와 야광봉까지. MD 종류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역시나 어린아이들을 겨냥한 장난감은 가격이 매우 비쌌다. 순수한 동심을 마구잡이로 이용해 폭리를 취한다는 것을 알고도 감당해야 할 몫은 오로지 부모들이었다.
썬히어로맨 MD들을 구경하며 해맑은 얼굴을 한 조카는 이곳 공연 티켓 값이 1인당 5만 원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아이는 MD 중에서 가장 비싼 썬히어로맨 레드 손목시계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언을 쳐다봤다.
‘저런 장난감 시계가 8만 2천 5백 원…….’
재언은 안 된다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지만, 조카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으로 진열대만 힐끔거렸다.
사촌 형과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간에 교류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결혼할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촌 형의 어머니인 고모님이었다.
결국, 재언은 눈을 질끈 감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일시불로…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꼬마 히어로 님께 레드맨의 변신 손목시계를 채워드릴게요. 부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이건 미래의 꼬마 히어로 님을 위한 레드맨의 선물입니다.”
그래도 꽤 서비스가 좋았다. 재언의 눈에 이상한 제복을 입은 청년이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더니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고 레드맨이 변신하기 전 통신수단으로 이용하는 장난감 이어셋을 덤으로 주었다.
조카는 그게 무척 좋은지 빨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은 핸드폰 문자로 수신된 결제금액과 누적 금액을 확인하면서 다행히 이 정도 지출에는 다음 달 생활에 무리가 없겠다고 판단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먹고 자고 쉬는 것만으로도 돈이 물 새듯 줄줄 빠져나가는데 여유자금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다음 달에 민재 씨 생일이 있는데……. 돈을 넉넉하게 챙겨 두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차민재에게 수시로 선물 받은 것들이 워낙 고가의 물건들이라 그의 생일에는 대체 무엇을 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날에는 회사 말고 재언 씨의 시간을 제게 주세요.”
혹시라도 원하는 것이 있는지 그에게 물었을 때 차민재가 예쁘게 웃으면서 능글맞게 한 요청이었다. 왠지 시간을 비워 주면 무언가가 홀라당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연차를 쓰는 게 머뭇거려졌다.
“아, 백건아! 조심해!”
재언은 신이 난 아이가 뛰어가는 방향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부딪혀 크게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남자가 아이의 작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서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었다.
남자는 꽤 잘생긴 얼굴에 키가 크고 살짝 어두운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가 한눈에 봐도 운동으로 관리하는 몸이라는 게 티가 났다.
“조심하렴. 넘어지면 다쳐.”
“아, 고맙습니다.”
재언이 빠르게 다가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아이의 어깨를 잡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잡아 준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혹시 아는 사람인지 힐끔거리며 확인했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궁금증은 남자의 얼굴을 보던 아이가 곧이어 해결해 주었다.
“어! 레드맨이다.”
“아.”
이제 생각이 났다. 무대 위에서 레드맨 역할로 연기를 펼쳤던 사람이었다.
무대를 내려왔지만 나름대로 역할에 진지한 것인지 아이의 동심을 지켜 줄 생각인지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리자 손목에 채워진 변신 손목시계가 보였다.
“꼬마 히어로. 미래를 위해 언제나 조심하고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그리고 아빠 말도 잘 듣고.”
“…아빠 아닙니다.”
“하하하. 그럼 삼촌 말 잘 들어야 해!”
레드맨의 익숙한 대사까지 나오자 조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남자의 주변을 방방 뛰어다녔다.
재언은 얌전했던 조카의 낯선 모습에 난처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백건아! 좀 조심히… 아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좋아해 주면 제가 더 고맙죠!”
“하하하.”
그런데 이 남자,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배우라서 그런 걸까?
재언은 가까스로 조카를 챙기며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어 보인 뒤 엄지를 척 내밀더니 백화점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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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보세요, 재언 씨. 보여요?”
옆 부서의 남무혁은 요즘 많이 친근해졌다고 생각하는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재언의 자리에 놀러 와서 이것저것 수다 떨기 바빴다.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또 무언가를 한 모양이었다. 앨범은 저번 달에 나왔 댔으니 컴백은 아니겠고 옐리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건가 싶었다.
예상대로 남무혁이 건네준 팸플릿은 공연과 관련된 것이었다. 형형색색의 남자와 여자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몇몇 눈에 띄었다.
남무혁의 얼굴에 황홀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 표정을 보니 저번 주에 봤던 조카가 생각났다.
“color’s와 썬히어로맨이 콜라보 공연을 한다고요. 티켓을 어렵게 구하긴 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재언 씨, 이번 주 금요일에 저랑 같이 공연 보러 가지 않을래요? 여기 참가한 사람들의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요!”
딱히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는 재언이 조금 머뭇거렸다.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진 차민재가 의뢰 때문에 이탈리아로 파견 간 상태였던지라 약속이 없기는 했다.
최근에 웬만해서는 해외 의뢰를 받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 사안은 조금 심각하긴 했다. 이탈리아 빌런 협회에서 이탈리아 정부와 전쟁을 선포했다.
게다가 빌런 협회에 속한 능력자들이 강하지 않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힘을 손에 넣은 것처럼 빌런들이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파괴와 테러를 일삼았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 전체로 난리가 번지자 이탈리아 정부에서 레드 헬 파이어에게 직접 의뢰를 넣은 것이었다.
‘빌런 연합이라지만 우리 애들과는 관련이 없지. 여기저기서 빌런들의 능력이 대폭 향상됐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 때문에 히어로들도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재언은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며 간만에 혼자 치킨과 맥주를 즐길 생각이었기에 남무혁의 제안이 망설여졌다.
남무혁은 어떻게든 같이 가고 싶다는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며 버블티까지 뇌물로 갖다 바쳤다. 맛있는 음료를 얻어먹으며 결국 재언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조카가 좋아하는 썬히어로맨의 사인을 받아다 주면 아주 좋아할 것이다. 평소에 선물도 잘 못 주는 삼촌인데, 이런 걸로 조카한테 점수나 따자는 마음이 더 컸다.
티켓도 공짜인데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