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남무혁과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금요일이 성큼 다가왔다.
업무를 끝내고 그와 함께 공연장으로 향하니 벌써 기다란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번에 조카랑 왔을 땐 이 정도로 줄이 길었던 건 아니었기에 재언은 굉장히 당황했다.
젊은 성인들의 모습이 많은 걸 보면 썬히어로맨과 콜라보 하는 color’s의 팬들인 듯했다.
“떨려요. 으으으. 제가 티켓팅에 어떻게 성공한 건진 모르겠지만… 무대와 가장 가까운 VIP석이라고요, 재언 씨!”
“그래요? 멀어 보이는데…….”
“스크린도 무대도 아주 잘 보일 거라고요! 그리고 이것 좀 들어 주시겠어요?”
종이백에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왔나 봤더니 플래카드였다. 재언에게 하나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든 남무혁은 이상하게 생긴 마법봉까지 꺼내 들었다.
“이건 뭐예요? 마법봉인가?”
“무슨! 응원봉이라고요.”
“…요즘 응원봉은 엄청 예쁘게 나오네요.”
재언이 신기한 듯 건네받은 응원봉을 이리저리 살폈다. 코랄 색의 본체에 작은 버튼처럼 생긴 걸 누르니 웬걸, 응원봉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거기다가 빨강, 노랑, 초록 등등 빛의 색깔이 바뀌면서 반짝이는 게 color’s라는 그룹 이름처럼 멤버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색인 듯했다.
“가방에 넣어놓고 있다가 color’s가 퇴근할 때 꺼내서 흔들어주시면 돼요. 극장 안에서는 절대로 꺼내지 마시고요.”
남무혁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너도 잘 지켜야 한다는 등 한참 동안 뿌듯한 얼굴로 일장 연설을 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는 직전까지 기분이 좋아 보였던 그는 연극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안색이 점점 침울해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연극에 나오는 건 맞았지만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대사도 거의 없었다. 거기다가 멤버들 모두 헬멧을 쓰고 나와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color’s 멤버들은 병풍처럼 있고 배우들이 빌런을 무찌르는 장면으로 연극이 끝나 버렸다.
커튼콜 시간이 되자 남무혁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color’s 멤버들 사진을 찍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헬멧을 벗고 나와서 더 열심히 찍는 것 같았다.
오늘 공연이 커튼콜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수 있는 날이라고 말하더니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서서 손뼉만 치는 재언은 이 광경이 조금 떨떠름했다.
커튼콜까지 끝난 뒤 시간을 확인한 재언은 황당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이전에 조카와 함께 봤던 연극보다도 공연 시간이 훨씬 짧았다. 티켓은 두 배 정도 더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뒤쪽으로 가면 한 번 더 볼 수 있을 거예요.”
괜찮다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듯 중얼거리는 남무혁의 표정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졌다.
그런데 설상가상, 일명 퇴근길이라고 부르는 길목으로 나가자 연극배우들만 몇 명 남아 있고 color’s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더욱더 시무룩해진 남무혁과 color’s의 팬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플래카드와 응원봉을 든 채로 어깨가 축 처진 남무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재언이 말했다.
“무혁 씨, 이러고 있지 말고 맥주나 한잔하러 갑시다.”
공연은 끝나고 집에 가서 혼술을 즐기려고 줄곧 생각했었는데, 잔뜩 풀이 죽은 남무혁의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권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근처 치킨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의 공통된 사항이 회사뿐이었기에 대부분의 대화가 회사와 관련된 주제로 이루어졌다.
주로 대화의 물꼬는 남무혁이 먼저 트고 재언이 짧게 대답해 주는 식이었다.
“이번 신입들은 다 좋아요. 일도 빠릿빠릿하고 말도 잘 듣고 담배 피우러도 잘 안 가더라고요.”
재언이 있는 홍보팀뿐만 아니라 남무혁이 일하는 인사팀에도 신입이 대거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유난히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신입 사원 한 명이 떠올랐다.
신입사원 김대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호감 어린 눈으로 재언을 쳐다봤다면, 지금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업무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라서 물어볼 수가 없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태도 변화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재언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 남무혁은 어느새 color’s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까 연극에서 color’s 봤어요?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솔직히 재언은 헬멧 때문에 color’s 멤버들이 누구였는지 잘 몰랐지만, 무혁의 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다 남무혁의 질문으로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빠졌다.
“재언 씨는 썸 타는 사람하고 언제 사귈 거에요?”
“하하. 언젠간요? 무혁 씨는 연애할 생각 없어요?”
“저요? 하하하…….”
곤란한 이야기에는 적당히 빠져나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다음을 기약하며 이만 자리를 끝내기로 했다.
남무혁은 택시를 태워 보내고 재언은 대리 기사를 불러 조수석에 올라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단조롭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졸기를 반복하던 그때,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들리며 땅이 흔들렸다.
“뭐야!?”
“으아악!”
갑작스러운 진동에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차에 대리기사가 핸들을 틀어 봤지만 결국 가드레일에 부딪히고 말았다.
‘안 돼! 내 차!!!’
재언은 술기운이 전부 달아날 정도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멈춰 선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서 앞만 쳐다봤다.
고속도로는 순식간에 인파와 차량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가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인파 사이로 괴성을 지르며 차와 건물을 부수고 일방적으로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 기괴한 생명체가 재언의 시야에 들어왔다.
푸른색 피부에 새하얀 머리카락, 언뜻 보면 사람의 모습인 것 같은데 흘러내리는 듯한 피부에 등에서는 촉수가 꿈틀거렸다. 자세히 보니 온몸의 구멍에서 애벌레들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너무나도 소름 끼치고 흉측해 사람들의 공포심이 극에 달할 만한 모습이었다.
“도, 도망쳐요. 도망쳐!”
대리 기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치며 운전석 문을 열고 허겁지겁 괴물의 반대쪽으로 달렸다.
재언은 천천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보름달이 뜬 날 늑대인간이라도 나타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 있는 것들을 너무나도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저게 대체 뭐야? 타락한 추기경!”
주변에 사람들이 전부 도망치고 없는 것을 확인한 재언이 오늘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던 타락한 추기경을 불렀다.
바티칸의 새하얀 신부복을 입고 나타난 타락한 추기경은 우아하고 단정한 자세로 지팡이를 든 채 나타났다. 그의 백금발 머리카락 위로 떠 오른 동그란 빛의 테두리는 그를 더욱 신성한 사람처럼 만들었다.
반면에 그의 곁에서 백금색의 장검을 든 성기사는 불길한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베어졌다.
단단한 아스팔트 기둥과 자동차들, 가로등 할 것 없이 그의 날카로운 검에 두 동강이 나 스러졌다.
“전지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 위대하신 부름에 저, 타락한 추기경이 왔습니다.”
‘그런 말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인데도 그 말을 직접 내뱉은 타락한 추기경의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타락한 추기경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괴물의 앞에 가까이 선 성기사의 머리 위로 타락한 추기경과 똑같은 동그란 테두리의 빛이 떠올랐다.
괴물의 피부는 철근처럼 단단했고, 등 뒤에 나 있는 촉수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매섭게 움직이는 성기사의 검에 베인 괴물의 피부에서 푸른색의 피가 흘러내렸다.
괴물과 대치하는 성기사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빠르고 예리해졌다. 뒤쪽에서 타락한 추기경이 축복하며 기도하는 덕분이었다.
결국, 괴물이 두 다리가 잘리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런데 이제 움직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괴물이 갑자기 30층 높이의 고층 빌딩 벽에 튀어 올라붙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방심한 사이에 표적을 놓친 성기사가 타락한 추기경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성기사의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꾸짖듯이 중얼거렸다.
“방심했군요…….”
찜찜하지만 사건은 해결된 셈이니 타락한 추기경을 물리자 그는 재언에게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린 뒤 사라졌다. 곧,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 히어로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재언은 아직 새 차나 다름없었던 자신의 자동차를 살피며 눈물을 머금었다. 앞쪽 범퍼가 모두 갈려 있었다.
“내 차가…….”
재언은 진심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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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일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 선생님이 가는 곳엔 항상 사고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게요, 하하…….”
신재언은 정말 너무나도 억울했다. 럭키 가이라는 능력이 무색하게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째 인생이 바람 잘 날이 없다.
“일단 사건 경위서 좀 써 주시고…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 주세요.”
이레일이 내미는 새하얀 종이 위로 연필을 든 재언의 손이 움직였다. 그림 실력이 어디 내세울 정도는 아니라서 귀가 화끈거렸지만, 재언의 그림을 이레일은 아주 진지하게 쳐다봤다.
“일단… 팔이 길었고, 피부는 파란색이었어요. 등에는 이렇게 촉수가 달려 있고 피부는 일그러져서……. 아무튼, 굉장히 흉측하고 무서웠어요.”
신재언이 완성한 그림엔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레일은 의심하는 기색 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림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괴물인지 안다는 듯 굉장히 익숙해하는 모습에 재언은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물었다.
“혹시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닙니까?”
“아… 역시 신 선생님… 알려 주셨던 모습이 다른 목격자들과 거의 일치해서요. 푸른색 피부에 등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는 괴물이라고…….”
뉴스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의아한 눈으로 이레일을 쳐다보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제가 설명해 드릴 수가 없어요. 그냥… 신 선생님께서도 이 일은 최대한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때, 신재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걸었는지 차민재였다.
덩달아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이레일이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어서 전화를 받으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 괜찮습니까? 습격이 있었다면서요.
“아, 다행히… 괴물이 도망쳐서 무사했습니다.”
재언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이레일을 애써 무시하고 다친 데 없이 무사하다고 차민재를 안심시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 …다행이에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재언 씨. 절대 재언 씨를 건드릴 수 없게 손쓸 테니까요.
‘…대체 뭘?’
통화를 끝낸 재언의 앞에 조심스럽게 이레일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종이를 받아들고 쓰인 글을 읽은 재언은 짧은 생각에 잠겼다.
‘비밀 유지 서약서’라는 제목의 서류였다. 그 괴물에 대해 어디서든 말하고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방적인 서약서였다.
고개를 들어 이레일을 쳐다보자 그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드-헬-파이어와 아는 사이만 아니었다면 반강제로라도 서류에 사인하게 했을 거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재언은 서약서에 순순히 사인을 마쳤다. 그 괴물과 히어로 협회 사이에 무언가가 있고, 협회는 그걸 필사적으로 숨기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