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76화 (76/324)

76화

‘레헬이 직접 움직이고, 히어로 협회에서 눈에 불을 켜고 비밀을 유지한다고? 아주 수상한걸……. 조사하고 싶긴 한데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고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낫겠지. 명색이 히어로들인데 이런 일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할까.’

이번 일에 끼어들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빠르게 호기심을 거둔 재언은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이레일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레일은 운전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재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재언은 이레일을 못 본 체하며 말없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 선생님.”

드디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탈출한 재언은 집으로 들어와 힘겹게 씻고 지친 육체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 이후로 뉴스나 인터넷 SNS로도 도심에 나타났던 괴물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재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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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네.’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주말 내내 시달린 재언은 결국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원래도 힘든 월요일 아침, 더 힘겹게 눈을 뜨고 일어나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워 늑장 부린 바람에 아침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출근길에 올랐다.

그래도 서두른 덕분에 아침 회의 시간까지 10분 이상의 여유가 생겼다. 재언은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짐을 올려놓으며 주변 동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재언 씨… 어서 와요.”

“……?”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

재언의 인사를 받아 주는 사원들의 분위기가 뭔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게다가 묘한 표정으로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을 붙잡고 왜 그러느냐고 따져 물을 만한 것도 아니어서 재언은 그저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일시적인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로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그런 분위기는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소문에 빠른 동기였던 최윤정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매우 컸다.

결국, 참다못한 재언이 직접 나섰다. 캡슐커피를 뽑으러 탕비실로 향한 이 주임의 뒤를 재언이 재빠르게 쫓아가 말을 걸었다.

“이 주임님, 대체 아침부터 왜 그러는 겁니까? 저만 보면 사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묘하게 분위기가 술렁이던데…….”

“어머, 그랬어요? 으음… 이거 당사자한테 직접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이 주임이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역시 뭐가 있구나…….’

어째 남의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학교나 회사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강한 어투로 물었다.

“제가 모르는 것보단 낫죠. 무슨 일인데요?”

“이상한 오해 말고 들어 줘요, 재언 씨… 이거 정말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재언 씨, 게이라며?”

“…….”

“그, 이번 신입 김대영 씨 있잖아.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신입… 신입한테 추파를 그렇게 던진다고…….”

“말도 안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전혀 아니었다. 게이는 맞아도 김대영에게 추파를 던진 적은 없단 소리였다.

당사자 앞에서 말을 아끼는 이 주임의 행동을 보니 ‘추파’라는 귀여운 단어보다는 치근덕거리고 성희롱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사람들이 계속 묘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드러내고 다닐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이건 엄연한 아웃팅이었다.

레드-헬-파이어의 사무실 사람들도 레헬과 신재언이 이미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히어로 협회의 히어로들에게도 레헬이 썸 타는 상대가 자신이라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긴 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밝히는 것과 타인이 이런 식으로 소문내는 건 완전히 달랐다.

‘…이번 신입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소문의 출처는 누가 봐도 김대영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추파를 던진 적이 없다. 오히려 그가 던지는 추파를 막았더니 태도를 바꿔서 오히려 재언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었다.

이전의 신입에게는 왕따를 조장했다는 말이나 듣고 지금의 신입에게는 추파나 던지는 성희롱 사수가 되어 버렸다.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돼요. 제가 왜 대영 씨한테…….”

“아, 우리도 믿지는 않았어! 그냥… 소문이 너무 의외라서……. 그러니까 재언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알겠지?”

예전엔 ‘럭키 가이’ 능력으로 초장부터 꺼림칙한 분위기가 드는 사람은 모두 걸러 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불행이 사방에서 굴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김대영은 잘생긴 외모와 자상한 성격으로 신입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법 많단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꽤 있는 듯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았는데, 당황한 이 주임이 미주알고주알 그런 사실까지 전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급 이야기를 전하고도 신경 쓰지 말라는 이 주임의 태도가 웃기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이 사달을 낸 원흉을 찾아가서 바로잡는 게 먼저였다.

“…김대영 씨, 지금 바쁩니까? 얘기 좀 하죠.”

신재언이 김대영의 자리로 찾아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걸자 안 그런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무실 직원들의 타자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대체 무슨 소문이 어떤 식으로 나쁘게 퍼졌는지 알 것만 같아서 머리가 아파졌다.

김대영은 마치 재언이 찾아와 불러낼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흡연실까지 따라온 그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재언은 눈앞이 깜깜해질 만큼 환장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영 씨, 해명이 필요한 얘기가 있어서 따로 불렀어요.”

“무슨 해명이요?”

“제가 대영 씨한테 추근댔다는 소문이요.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저는 대영 씨가 일도 잘하고 업무능력도 좋아서 여기 오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소문을 정정하셔서 오해 없이 잘 지내도록 해 봅시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은데도 재언은 정말 참고 또 참고 최대한 순화해서 말을 이어 갔다.

애들 장난도, 어설프게 모인 동아리도 아니니 계속 얼굴 마주하게 될 팀원과 벌써 감정적으로 나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보살 수준 아닌가.

“…제가 왜 정정해야 합니까? 소문은 제가 낸 게 아닌데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보였나 보죠.”

“네?”

“웃으면서 추근대신 건 맞잖아요.”

‘이래서 촌놈에게는 웃어 주지도 말라는 소리가 나온 걸까.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 상황 아니었나. 내가 언제 웃으면서 꼬셨다는 거야.’

너무나도 황당한 기분에 재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의 신입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신입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신입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재언을 그대로 두고 제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듯 당당한 걸음으로 흡연실을 나갔다.

그 이후로 오후 내내 직원들의 뜨거운 눈빛을 받으며 야근까지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지쳐서 온몸이 축 늘어졌다.

거기다가 오늘 일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곱, 아니 이제 여덟 명이 된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는 만찬’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재언의 입장에서는 별 쓸모없어 보이는 모임일 뿐이었다.

지쳐서 쉬고 싶긴 한데 각자 개성 넘치고 통통 튀는 자식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재언은 ‘만찬’에 꾸준히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때 체어맨의 문으로 마약왕이 튀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

‘만찬’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출입이 금지된 마약왕이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날이었다.

마음 같아선 ‘만찬’ 때도 올 수 없게 출입금지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행동에 제약을 걸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까 봐 숨통은 틔워 주고 있었다.

한숨을 쉰 재언은 웃옷을 갈아입고 마약왕이 에스코트하는 대로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함께 들어갔다.

“호호- 호호호- 마약왕 오라버니는 오랜만이지요? 우리들의 막내, 학살자 버드맨이에요.”

귀신들의 성녀가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푸른색 깃털이 잔뜩 달린 코트를 입은 버드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가슴에 다크 카오스를 상징하는 검은 십자가가 문신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재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문신한 거야? 미성년자는 문신 금지인 거 몰라?”

“매일매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린 거예요.”

“…….”

진짜 문신을 새긴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저런 중2병 말기 환자처럼 검은 십자가를 직접 그리지는 말았으면 싶다.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미는 버드맨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재언은 식당으로 들어가 원형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문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재언과 그의 왼쪽 첫 번째 자리엔 엔레이드맨이, 오른쪽 첫 번째에는 타락한 추기경이 차례로 앉았다.

재언의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조각난 장난감은 오랜만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자리를 채웠다.

형제들이 모두 모인 덕분에 그녀의 신체도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조각난 신체를 차곡차곡 이어 붙이면 그럭저럭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말을 하진 못했는데, 연쇄살인마가 시끄럽다고 성대와 입을 난도질했던 탓이었다. 재언이 능력을 각성해 주었어도 그 부분만은 살릴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는 코루루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열정을 가득 담은 눈길로 재언을 쳐다봤다. 그녀가 거느린 광신도 팬들이 하는 눈빛과 그녀의 모습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재언과 가장 먼 자리에는 귀신들의 성녀가 새빨간 입술을 잔뜩 끌어올려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얼굴을 덮는 검은색 긴 생머리에 검은색 드레스와 대조되는 하얀 얼굴이 마치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리고 재언의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서 체어맨이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온몸을 꽁꽁 감았던 붕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 마더에게 당했던 부상은 전부 회복한 듯했다.

그런 그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마약왕이 곧은 자세로 앉아서 우아하게 냅킨을 정리했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와 마약왕과 귀신들의 성녀 사이의 남은 자리를 버드맨이 채웠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능력을 각성하자마자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죽인 혐의로 아직도 수배 중이었다.

지금이야 그가 정신적으로 너무 불안정해서 재언이 특별히 별장에 가둬 놓았지만,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수상한 집단이네. 게다가 이놈들 부담스럽게 만찬 때마다 내가 한마디 하기를 기다린단 말이야.’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수상하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재언은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일단 사고 치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고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건배!”

재언의 입이 열리는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던 타락한 추기경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의 재림이다…….”

이것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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