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위대하신 아버지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시간 동안 정적이었던 테이블 위로 엔레이드맨의 한마디가 툭 던져졌다.
“형제들이여, 그동안 어떤 활동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널리 알렸지?”
순서라도 지키는 듯 타락한 추기경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꿈꾸는 듯 몽롱했다.
“아버지의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곧… 거대한 제단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전지전능함을 기도합시다.”
타락한 추기경은 가톨릭 신부복을 입은 사이비 교주나 다름없었다. 중동부터 시작해서 유럽 쪽에는 이미 타락한 추기경이 교주인 사이비 교단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신도가 백만 명이 넘어설 정도였다.
머리가 아프긴 해도 이쪽만큼은 재언도 건들 수가 없었다. 사이비니 뭐니 해도 사람들 본인이 선택한 종교를 어떻게 막아 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추기경이 아름다운 얼굴로 또라이 짓을 해 대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산 제물로 삼거나 신도들에게 재산을 빼내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타락한 추기경의 말이 끝나자 코루루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멍청한 나라의, 멍청한 마을의, 멍청한 놈들을 전부 얼려 죽였지요. 그리고 불을 지른 다음 그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하고 춤을 추었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코루루가 한 말은 저번 주에 해외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내용과 일치했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몰살해 폐허로 만든 마을은 사실 열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와 50대의 성인 남성의 혼인을 부추기는 곳이었다.
남자는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소녀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했고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소녀는 장기가 파열되어 숨이 멎었다.
게다가 그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꼬깃꼬깃한 종이에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코루루에게 종종 보냈던 그녀의 첫 번째 팬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코루루가 성공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된 것을 보고 자신 역시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던 아이였다.
겉으로는 아주 크게 웃으며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는 거로 보였겠지만 분명히 코루루가 쓴 가면 안은 비통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모든 사실을 전부 생략하고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평화로웠던 마을을 불태워 없앴다고 보도했다.
코루루가 웃으며 말을 끝내자 버드맨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하고 싶어요. 위대하신 아버지의 발밑에 세상을 두고 싶어요……. 너무 부조리하고, 약자들은 당하기만 하고, 결국 이기는 건 강자뿐인 세상에서 아버지께서는 유일하게 모두를 보듬어 주시는 메시아잖아요……!”
버드맨은 신재언이 허락하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세상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 같이 몸을 들썩였다.
다른 자식들은 처음부터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버드맨은 유난히 신재언의 눈에 닿고 싶어 하는 게 강했다. 세뇌당한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에 처음 봤을 때의 순수한 고등학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자식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더 아파졌다.
“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 버드맨.”
“…….”
하지만 재언도 언제까지 버드맨을 이곳에 가둘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기본적인 교육은 끝냈으면 해서 외국의 학교에 보낼 셈이었다.
마약왕에게 부탁하면 기본적인 신분세탁 정도는 껌일 테니 제발 가만히 요양하면서 진정했으면 좋겠다.
버드맨은 재언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분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토를 달지는 못했다.
만찬을 끝내고 재언은 방으로 마약왕을 은밀히 불러냈다. 마약왕이 잔뜩 상기된 부담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버드맨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수배범이야. 하지만 네 힘이라면 그 정도 조작은 쉽겠지? 저 애가 별장에서 나올 수 있게 될 때, 유학생 신분 하나만 만들어 줘. 난 그래도 버드맨이 멀쩡히 사회에 나가 평범한 일상을 보냈으면 해.”
마약왕은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네 근신도 생각해 볼 테니까.”
재언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놓치지 않은 마약왕이 눈을 크게 떴다. 몸을 부르르 떨며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그의 모습에 재언은 당장이라도 이 말을 물러야 하나 고민했다.
근신을 이유로 마약왕은 별장 출입을 금지당한 것은 물론, 자식들이 번갈아 가며 아버지의 곁을 지켜야 하는 임무에도 항상 제외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그 사실에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아버지를 감히 귀찮게 만들었던 그 분수도 모르는 남자… 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드릴 수 있습니다.”
‘…차민재만 소문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쪽도 마찬가지였군. 그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허튼짓하지 마, 마약왕.”
“…….”
재언이 시계를 확인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거칠게 발길을 돌려 문을 열고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식들을 돌아봤다.
“그러면 다들 해산해. 마약왕 너는 허튼짓 말고 바로 돌아가.”
재언이 날카롭게 말하며 모두에게 손짓했다. 그는 거대 빌런들을 동네 개구쟁이들 대하듯 가벼운 투로 해산을 명령하고는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신재언이 사라진 문을 쳐다보던 버드맨이 체어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체어맨은 자식들 중에서 형제들을 가장 존경하고 아끼는 편이었다. 그래서 막 각성한 형제들을 돌보는 것은 주로 그가 맡았다.
그러니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줄곧 보아온 체어맨이 막내 버드맨에게는 가장 친근한 형제였다. 그리고 얼굴은 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었던 마약왕이 형제 중에서 가장 어색했다.
“체어맨 형님, 저 형님은 누구이기에… 아버지께 벌을 받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곁에 있을 수도 없고 이 별장에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 그건 버드맨이 생각했을 때 지나치게 끔찍한 형벌이었다.
조심히 물어 오는 버드맨의 질문에 체어맨이 면사포를 정리해 쓰면서 빙긋 웃었다.
“아아… 마약왕 말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께서 건들지 말고 놓아주라고 했던 남자를 붙잡았습니다. 남자는 아버지를 캐고 있던 히어로였는데 마약왕은 그 남자에게 생체실험을 강행했습니다. 약을 먹이고 흉측한 빌런으로 만들어 버렸죠. 아버지의 말을 거역했으니 버림받아 마땅한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아버지는 마약왕에게 근신이란 처벌만 내리신 뒤에 그 일을 묻으셨습니다.”
“…….”
체어맨과의 대화를 들은 것인지 마약왕이 고개를 돌려 버드맨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빙긋 웃었다. 그에 엔레이드맨이 벌떡 일어나 한 걸음 다가가 엄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마약왕, 아버지 말씀 못 들으신 거냐. 어서 이곳에서 나가.”
“…첫째 형님, 부디 그런 말씀 마시길. 저도 막내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제 나이로만 따지면 마약왕이 그들 중에 가장 많은 편이나 형제들은 신재언 덕에 각성한 날을 기점으로 서열을 정리했다. 각성 후 다시 태어난 날부터 나이를 세겠다는 의미였다.
재언은 그들의 서열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딱히 말리진 않았다.
“막내야. 너와 나는 정말 비슷하구나…….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지. 이것을 들고 있다가 혼자가 되면 버튼을 누르렴. 그러면 좀 더 자세히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버드맨에게 다가가 포옹을 하며 나직하게 속삭인 후 뒤로 물러난 마약왕은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형제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뒤돌아 체어맨의 문을 지나가는 마약왕의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마약왕의 사라진 뒷모습을 쳐다보는 버드맨에게 난로에 불을 지피던 엔레이드맨이 몇 마디 염려 섞인 충고를 건넸다.
“버드맨. 마약왕과 가까이 지내지 마라. 아버지께서도 그를 멀리하시는 이유가 있어. 그는 좋은 형제이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일에 지나친 점이 있어 아버지께서도 늘 걱정하시는 놈이다.”
“…네.”
버드맨은 힘을 각성한 직후에 존경해 왔던 볼프강을 공격했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자신은 이제 힘이 있었고, 이 힘으로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직도 별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 싶은데 아직 불안정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평화로운 별장의 생활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한 걸음씩 나서고 있는데 자신만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 게 불안했다.
나도, 어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발자취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까득, 까득…….
버드맨은 무의식적으로 깃털을 강제로 하나씩 뽑았다. 뽑힌 살갗에서 피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시간에 잠드는 막내를 형제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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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이 떠오르고 한참 뒤에 눈을 뜬 버드맨은 바깥의 기척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무런 소리도 없고 조용한 것을 보니 별장을 떠났거나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막내야, 너와 나는 정말 비슷하구나…….”
뭐가 비슷하다는 걸까? 난… 아버지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깃털을 단단하게 만들고 마약왕이 몰래 건네준 물건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눈앞에 안개처럼 뿌연 것이 올라오더니 홀로그램으로 사람의 얼굴이 띄워졌다.
“헉?!”
버드맨이 깜짝 놀라서 침대 위에 나뒹굴었다. 허공에 나타난 홀로그램은 마약왕의 얼굴이었다. 마약왕이 버드맨의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혹시나 막내 네가 이걸 켜지 않을까 봐 아주 걱정했단다.
“…마약왕 형님, 하실 이야기가 무엇이죠?”
- 그렇게 급하게 굴지 말아라. 우리 형제들은 모두 사이가 좋으니까. 단지 내가 말썽을 피워 아버지께서 벌을 주고 계실 뿐이야……. 하지만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건 모두 아버지를 위한 것이니까.
“…….”
- 너도 그렇지? 버드맨… 만약, 감히 아버지를 모욕한 놈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자를 가만히 두라고 하신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그놈을 그냥 둘 것이냐? 감히!
만약,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건 분명히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래. 너와는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자아, 막내야… 우리 함께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놈을 없애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함께 손을 잡도록 하자.
쿠르릉.
밖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버드맨은 희미하게 웃으며 내밀어진 마약왕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홀로그램일 뿐인 마약왕의 손과 버드맨의 손은 엇갈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