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78화 (78/324)

78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어두운 뒷골목 안쪽의 쓰레기통에서 무언가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그것은 오물을 뒤집어쓴 아주 더러운 몰골로 악취를 풍겨 대고 있어 차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발을 질질 끌며 몸을 바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듯이 힘겹게 걸어가는 그것의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으- 으아아악! 괴물이다!”

술에 취해 길을 잘못 들어온 취객이 그것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의 눈길을 피할 순 없었다.

곧이어 무언가가 터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골목 안쪽 벽에 피가 가득 튀었고, 취객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끔찍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그륵… 그르륵…….”

그것은 더운 숨결을 내뱉으며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영웅이야.”

“나는… 히어로야.”

“히어로가… 될 거야…….”

@

신재언이 대경실색한 목소리로 통화 너머의 상대에게 소리쳤다.

“뭐? 형, 여기 지금 연쇄 살인으로 난리 난 거 몰라?”

그러자 핸드폰에서 쩔쩔매는 듯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 휴… 미안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위험하다고 말려도, 안 된다고 혼을 내도 누굴 닮아서 그런지 똥고집이 장난 아니야. 이번에 네가 손목시계까지 사 줬다며. 그것 때문에 더 보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다…….

“아니, 그래도…….”

재언이 할 말을 잃은 사이 그의 사촌 형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 하지만 네가 옆에 있는데 큰일이 생기겠어? 낮에는 하루 돌봄서비스 이용하면 되고, 밤에는 밖에 안 나가면 되잖아. 정말 미안한데 부탁할게.

“하지만…….”

- 며칠 내내 울고 보채는데 이러다 우리가 먼저 죽겠어. 내가 차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신재언의 사촌 조카 신백건이 좋아하는 썬히어로맨이 일본에서 완결을 맞이했다.

썬히어로맨 관련 영화와 연극도 마무리 지어지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에 맞춰 한국에서도 완결판 연극이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공연되고 있었다.

완결 이후로는 썬히어로맨의 연극 일정이 불투명했기에 조카가 좋아하는 히어로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 삼촌이 된대?! 나 가도 돼?

핸드폰 안에서 잔뜩 기대 어린 조카의 목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재언은 이마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다가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사촌 형과의 협의로 조카가 재언의 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고작 하루, 24시간이었다.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 동안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조카를 맞이하기 위해 재언은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하면서 볼 요량으로 TV를 켜자 때마침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사흘 전부터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듯했지만, 사실 피해자가 매일같이 속출하는 연쇄 살인 사건 속보였다.

서른 살의 직장인, 마흔 살 주부, 이십 대 대학생까지. 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적인 특징도 원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차별 살인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골목길이나 인적이 드문 곳을 걷다가 참변을 당했고, 너무나도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서울의 길목마다 히어로와 경찰이 배치되었고 회사들도 야근을 자제하고 회식을 금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직 미성년 피해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생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살인마가 잡히기 전까지 서울의 모든 학교에서 오후 네 시 이후로 교내에 아무도 남지 않게끔 학생들을 모두 귀가시켰다.

흉흉한 서울의 분위기에 비례하여 차민재의 짜증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갔다. 항상 신재언 앞에서는 여유롭고 나긋한 모습을 유지했던 그는 재언과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언짢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 겨우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더니 서울에서는 연쇄 살인마가 절 기다리고 있네요. 전부 다 불태워 죽여 버리고 싶어요.

어떤 히어로도 이번 연쇄 살인마의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체면이 구겨진 히어로 협회가 드디어 레드-헬-파이어를 투입했다. 레헬이 나섰으니 연쇄 살인마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재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식들에게 너희가 저지른 짓은 아닌지 두 번 정도 물었다. 자식들 모두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는 말만 두 번 반복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거짓말을 할 녀석들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버드맨이 상태가 좋아 보이네. 이전에는 정말 초조하고 힘들어 보였는데 무슨 일로 진정시킨 거지? 대체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기에…….’

만찬 날에만 해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상태가 불안정했던 아이가 오늘 별장에서 보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버드맨은 더 이상 다른 형제들처럼 일하고 싶다면서 채근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질문에도 맑은 눈빛으로 차분하게 대답하는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이제 조금만 더 안정되면 별장 밖으로 나가도 될 것만 같다.

자식들이 한 짓이 아니라면 이번 살인 사건은 신재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신재언이 이 사건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헬까지 나설 정도로 큰 사건인데 이런 시기에 조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게 걱정이었다.

‘…아이 돌보기로 이용해서 미안하지만 타락한 추기경에게 백건이를 뒤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재언은 신입 사원인 김대영이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심지어 무단결근이었다. 멋대로 아웃팅하더니 말없이 사라져 버린 모습이 웃기지도 않았다.

물론 재언이 게이라는 사실을 회사 사람들이 믿었을지 믿지 않았을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았기 때문이다.

재언과 한 번이라도 일해 보았던 사람들은 그가 남자 신입에게 치근덕댔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에 터무니없는 소문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읽어요. 정말 무단결근이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정말 왜 이러는지. 요즘 분위기도 흉흉한데.”

재언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민 과장이 땀을 닦으며 말을 걸었다. 다한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그는 재언이 야근할 때마다 자리에 앉아 뒤통수를 자주 보여 주는 야근 동료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근처에 앉아 있으니 나름 내적으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김대영이란 사람의 인품은 모르겠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재언도 인정할 만큼 열심히 했다. 말없이 퇴사하거나 무단으로 결근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민 과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편으로 의심이 생겼지만, 마약왕에겐 몇 번이고 주의를 줬으니 나쁜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쯤, 박 팀장이 재언의 자리로 찾아오더니 검지와 중지를 흔들어 보였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담배나 피우러 가자는 신호였다.

업무적인 내용은 아니고 남들이 듣기에 민감한 사내 이야기를 할 때 주로 하는 암묵적인 손짓이었다. 재언은 박 팀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민 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민 과장님, 저 밖에서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재언이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민 과장과 함께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땐 가능하면 서로 보고하면서 다니고 있었다.

옆에서 박 팀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잠시 재언 씨 좀 데려갈게.”

“네.”

옥상에 있는 흡연실의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 자리 잡은 둘은 거의 동시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재언이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박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 이번 우리 팀 신입, 김대영 씨인가? 그분 말이야, 재언 씨. 이번에 재언 씨하고 트러블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잘못이 크고 부끄러워서 회사에 못 나오겠다며 퇴사한다고 하더라고.”

‘저번에 흡연실에서 이야기했을 땐 무척이나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금 이상한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재언의 기색을 살피던 박 팀장은 말을 이어 갔다.

“회사가 뭐 학교도, 어린애 장난도 아닌 데 참 웃기지? 나도 소문은 다 들어서 대충 무슨 일인진 알고 있는데, 재언 씨한테 경위를 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어.”

박 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재언은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원래 골초가 아닌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저절로 담배를 찾게 된다. 한 개비를 다 피우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뒤, 주머니에서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웃으면서 업무를 알려 준 제 태도가 꼬신 게 맞다면, 뭐… 제가 처신을 잘못한 게 맞겠죠. 그러면 회사 사람들 절반 이상이 신입에게 치근덕댄다는 겁니까?”

“아니, 재언 씨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이런 씨발! 이미 그런 식으로 얘기했으면서 오해하지 말라고? 그게 더 열 받는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박 팀장에게는 죄가 없었다. 재언은 지금까지 박 팀장이 보여 주었던 친절한 모습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는 팀원을 생각하는 팀장이었고, 여태까지 쓸데없는 일로 트집을 잡거나 직급을 남용한 적도 없었다. 인사평가도 좋아서 재언의 사수 김 대리보다도 후배지만 곧 부장으로 승진한다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김대영이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 퇴사한다 했다고? 내가 사람을 정말 단단히 잘못 봤구나.’

“사람들한텐 내가 잘 말해 둘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 하려고 나온 거야……. 재언 씨한테는 이번이 중요한 시기잖아.”

“네.”

신재언은 이번 인사고과에서 승진의 갈림길에 있었다. 입사 3년 차, 나이는 서른 하나. 제법 승진이 빠른 편이긴 했지만 그만큼 평가가 좋다는 소리였다.

위쪽의 줄을 잘 탄 건 아니어도 밉보인 것도 없어서 이번 프로젝트만 잘 성공하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연달아 안 좋은 소문에 휩싸였다. 사내 왕따로 신고당하고 성희롱으로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승진이 미끄러지지나 않을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재언은 회사고 뭐고 폭파해 버리고 싶은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커다란 엿을 먹게 생겼다.

‘김대영 이 또라이 새끼를 어떻게 족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