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재언은 회사 사람을 건드는 걸 최대한 피해 왔고 망할 김 대리 밑에서조차 이를 벅벅 갈면서도 참아 왔다. 그런데 올해 들어온 신입 녀석은 선을 넘어도 아주 세게 넘었다.
이번만큼은 쉽게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아 검은 십자가가 눈물 자국처럼 그려진 피에로 가면을 쓴 재언은 김대영의 집을 찾아갔다.
서울 외곽에 있는 주택 단지에 있는 김대영이 산다는 원룸을 찾아내는 건 아주 쉬웠다. 아주 혼꾸멍을 내줄 생각으로 가득했던 재언은 텅 비어 있는 집안에 속으로 매우 당황했다.
밤 열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퇴사 기념으로 친구들과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김대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갈 동안 그는 오지 않았다.
재언은 식탁에 앉아서 하염없이 김대영의 귀가를 기다렸다. 재언을 따라온 체어맨은 지루하지도 않은지 앉지도 않고 재언의 뒤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체어맨, 너도 앉아 있지 그래.”
“아니요, 아니요……. 위대하신 아버지의 수행을 맡은 몸.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안 되지요.”
그렇게 장황하게 표현할 정도는 아닌데…….
재언이 핸드폰 화면에 뜬 시계를 확인하며 슬슬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어디에선가 진동이 울렸다. 자신의 핸드폰은 잠잠하니 다른 사람의 것이 틀림없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기울이자 식탁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식탁 아래를 살피는 재언의 눈에 희미한 빛을 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손을 뻗어서 확인하니 역시나 핸드폰이었다. 반짝이며 진동이 잠깐 울리다가 다시 꺼졌다. 배터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게 곧 방전될 것만 같았다.
“밖에 나갔는데 핸드폰을 두고 간다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현관문 앞의 작은 벽걸이에 차 키 두 개가 떡하니 걸려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집안이 묘하게 어수선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대영의 교육 담당을 맡으면서 느낀 건, 그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니 집 안은 어수선하지만, 기본적으로 물건들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재언이 화장실로 들어가 안쪽을 확인했다. 호텔에서나 볼 법하게 수건을 돌돌 말아서 예쁘게 정리해 놨고, 화장실도 물때 하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신재언은 앓는 소리를 내며 화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상 깊게 관여하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럭키 가이 능력이 발동되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재언은 빠르게 김대영을 포기했다.
“일단 돌아가자. 얼른 여기서 발 빼는 게 좋겠어. 체어맨!”
그 이후에 놀랍게도 김대영의 가족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재언에게 직접 연락이 온 건 아니었고 회사에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해 왔다.
김대영의 모친은 아들과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호소했다. 하지만 신재언은 물론 회사에 있는 그 누구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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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신재언의 집에 조카 신백건이 다시 찾아왔다. 저번에 만났을 때 입었던 충격적인 티셔츠에 레드맨 가면이 추가되었다.
좋아하는 썬히어로맨 연극의 완결판을 보러 가는 것일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온 듯했다. 재언은 문득 어린 조카에게서 남무혁의 향기를 느꼈다.
“정의 집행!”
“아야, 아야야. 사람한테 휘두르는 거 아니야.”
“난 사람한테 휘두르는 게 아니야. 빌런한테 휘두른 거지!”
분명히 역할극을 하는 건데, 조카의 말에 뼈가 아픈 건 왜일까.
결국, 빌런 왕 다크 카오스는 여섯 살짜리 어린 조카에게 K.O 패 당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빌런을 이기고 신이 난 백건이 여기저기 방방 뛰어다니다가 재언에게 제지당했다.
“밤늦게 뛰어다니면 아랫집에서 이놈! 하고 찾아온다! 그리고 빨리 양치하고 잘 준비해야지! 안 그러면 레드맨을 볼 수 없어요. 레드맨이 뭐라고 했더라? 어른들 말 안 듣고, 양치 안 하는 어린이는 빌런이 된다고 했지?”
‘이쪽은 양치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기 짝이 없는 빌런 명이 붙어 버렸지만.’
어린아이를 욕실에 붙들어 놓고 양치도 시켜 가며 함께 씻는 동안 재언은 패치로 가려진 문신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씻었다. 친가 쪽 조카인 백건은 재언과는 다르게 하피의 특징이 전혀 없었다.
재언은 하피 혼혈이어도 거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고 등의 승모근에서부터 등까지 작은 날개가 있는 게 다였다.
특이한 건 왼쪽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하얀색 날개인 데 반해 오른쪽 날개는 검은색이었다. 게다가 자극하면 날개 끝이 바르르 떨렸다.
‘이걸 민재 씨한테 말해 주니까 보고 싶다며 한참 떼를 썼지. 결국, 보여 주긴 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재언은 한숨을 푹 쉬며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을 맞으면서 욕조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조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뭐야? 레드맨이야? 색이 보라색인데.”
“얘는 퍼플맨이야!”
“얘는? 얘가 핑크맨이야?”
“삼촌… 얘는 코럴맨이야. 이런 것도 몰라?”
아동용 3d 애니메이션에 코럴이라니!
벌거벗은 채 화장실 바닥에 앉아 각기 다른 다섯 명의 썬히어로맨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재언은 물을 잠그고 신백건을 덜렁 들어 올려 수건으로 박박 문질러 댔다.
뽀송뽀송하게 변한 조카를 그대로 침대 위에 내동댕이치니 꺄르륵 웃으며 좋아하는 게 영락없는 여섯 살짜리 아이였다.
계속 침대에서 빠져나가 놀고 싶어 하는 말썽꾸러기 조카를 몸으로 누르며 재언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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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엄청 많네! 평일 오전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목요일 오전에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극장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대부분 아이와 보호자가 함께 온 모양이었지만 혼자 보러 온 어른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연차까지 내고 온 보람도 없이 꽉 찬 극장 안을 둘러보며 감탄하던 재언은 조카의 손을 단단히 잡고 당부하듯 말했다.
“좋아, 신백건. 삼촌이 뭐라고 했지?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다.”
“삼촌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다! 삼촌하고 떨어졌을 땐 주변 어른들의 도움을 받는다! 절대 혼자 저-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정말로 재언이 집으로 돌아갈까 봐 백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삼촌의 당부를 줄줄이 읊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쉽게 주변 어른을 믿어서도 안 되겠지만 재언은 조카의 곁에 타락한 추기경을 심어 두었기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재언은 조카의 손을 잡고 미리 결제해 둔 티켓을 내보이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극장 안이 유달리 형형색색이었다.
집에서 레드맨 가면, 레드맨 망토, 레드맨 손목시계, 레드맨 반소매 티를 전부 갖춰 입은 조카가 유난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무색할 만큼 극장 안 다른 아이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히어로맨 분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혼자 온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분장 퀄리티가 장난 아니게 좋았다.
“어? 당신은… 신 사백 아닙니까?”
‘사백이라니, 어느 시대 단어야?’
껄렁한 말투와는 달리 무협 소설에서나 쓸 법한 단어를 사용하며 말을 걸어온 사람은 저번에 마주친 적이 있었던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코루루의 열정적인 팬이자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는 비극의 히어로였다.
“어라? 박재원 씨,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서울 쪽은 S급 히어로들이 지역을 나눠 순찰하고 있거든요. 아이들도 많고 인파가 몰려서 이쪽으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거… 주변에 그 자식은 없죠?”
박재원이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면서 재언의 뒤쪽을 힐끔거렸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었는지 날개가 달린 머리끈으로 꽁지머리를 묶은 게 눈에 띄었다.
혹시라도 재언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 건지 경계하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박재원은 재언의 옷깃을 붙잡은 신백건을 발견했다.
사실 신백건은 사촌 형의 붕어빵이라 해도 될 만큼 닮았고, 사촌 형과 신재언도 생김새가 상당히 닮았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조카와 삼촌 사이가 아니라 부자지간이라고 자주 착각하곤 했다.
박재원도 그런 착각을 하는 듯했다.
“…설마 유부남? 맙소사, 차민재도 갈 데까지 갔구먼…….”
박재원이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재언이 헛기침했다.
“얘는 조카 신백건입니다. 백건아, 이쪽은 삼촌이랑 아는 아저씨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이가 엄청 똘똘하네요.”
그뿐이랴, 엄청난 말썽꾸러기처럼 생겼다.
심드렁한 얼굴로 신백건에 대해 평을 내린 박재원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재언 역시 백건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촌 형이 가장 좋은 좌석을 잡았다더니 아주 명당이었다. 앞에서 네 번째 줄이라 무대도 가까워서 작은 것도 잘 보일 것 같았다.
‘형형색색의 히어로들이 아니라 붉은 계열의 히어로들인가…….’
연극이 시작되고 레드맨을 비롯해 핑크맨, 퍼플맨, 코랄맨, 마지막으로 옐로우맨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왔다.
제일 좋아하는 레드맨이 등장하자 백건은 신났는지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재언도 손뼉을 치며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요즘 연극은 무대 세팅도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볼 때마다 신기했다.
“안녕? 내 이름은 김지학… 평범한 대학생이지. 그런데 내게 한 가지 비밀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저 남자는… 저번에 백건이랑 부딪혔던 배우네. 계속 레드맨 역할을 하는 거구나.’
원작과 비교했을 때 이름뿐만 아니라 연극 내용이나 대사도 한국의 정서에 맞게 각색한 듯했다. 배우가 어린아이들에게 질문하자 신백건이 크게 소리쳤다.
“레드맨!”
“맞아! 나는 히어로 레드맨이야!”
순식간에 홀로그램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재언은 자기도 모르게 힘차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오오! 굉장해!’
홀로그램이 퍼지더니 놀랍게도 배우의 옷이 순식간에 레드맨의 쫄쫄이 옷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바뀌면서 바닥이 흔들거리는 게 정말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건물이 무너져?’
재언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