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80화 (80/324)

80화

“꺄아아악!”

환호와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극장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진동에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급하게 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했다. 건물의 흔들림이 서서히 멈추자 잔뜩 겁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입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인파에 휩쓸리고 떠밀려 넘어지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위험해졌다. 모두가 이성을 잃고 앞다퉈 몰려들고 있던 때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여긴 무너지지 않을 테니 진정하시고, 천천히 두 줄로 서서 나가세요!! 부상자들부터 첫 번째로 나가고 다음에는 아이와 보호자 분들이 나가면 될 겁니다!!”

막무가내로 서로 밀치고 나가려는 사람들 앞에 선 박재원이 크게 소리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정전으로 인해 시야가 어두워진 사람들의 공포심이 그리 쉽게 진정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에 박재원이 입을 다물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은 머리 끈에서 나비 날개 하나를 떼어 냈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먹을 쥐자 환한 빛이 박재원의 손가락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활짝 펼쳐진 박재원의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나비 날개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로 인해 칠흑같이 어두웠던 극장 안이 그나마 앞뒤 분간은 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박재원은 갑작스러운 빛에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을 돌아봤다. 다행히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극장 앞쪽의 비상 출구가 폭발 때문에 출입구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어 뒤쪽밖에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두 줄로 서서 침착하게 빠져나가야 합니다!”

박재원은 하나뿐인 출구 앞에 서서 정신을 차린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지시했다. 재언은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부상자와 아이, 아이 보호자들이 차례로 줄 서는 모습을 보면서 조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무질서했던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상황에 재언도 줄을 서기 위해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때, 무대 쪽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으- 윽… 도와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무대에 있다가 관객석 쪽으로 추락한 모양인지 레드맨이 무대 앞에서 신음을 흘리며 엉거주춤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함께 공연하던 배우들은 온데간데없고 레드맨 혼자 바닥에 덩그러니 있었다.

“삼촌… 레드맨이 위험해.”

조카는 울먹이며 재언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겁에 잔뜩 질렸는지 차마 레드맨을 도와줘야 한다고 떼쓰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재언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극장 안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여섯 살밖에 안 되는 귀여운 조카 앞에서 다친 사람을 두고 외면하는 건 할 짓이 못 된다.

재언은 어쩔 수 없이 조카를 데리고 레드맨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으윽…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러 왔다는 사실에 한층 마음을 놓았는지 레드맨이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쓰고 있던 헬멧 덕분에 머리를 다치진 않았지만, 발목을 다쳐서 제대로 서지 못했다. 조금만 충격이 가도 고통을 호소하는 모양새가 발목이 부러졌거나 크게 잘못된 게 분명했다.

재언 혼자서는 환자와 아이를 데리고 제대로 탈출하기가 어려울 듯했다. 재언은 도와줄 사람이 더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박재원 씨, 박재원 씨! 여기 좀 도와주세요!”

재언이 팔을 흔들며 탈출하는 사람들의 뒤쪽에 서 있는 박재원을 큰소리로 불러 젖혔다.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간 게 눈으로도 확인될 정도이니 그가 빠져도 탈출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재언이 있는 곳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박재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빠르게 다가왔다.

“신 사백, 괜찮으십니까?”

재언은 그가 쓰는 독특한 호칭에 의문을 품는 것을 뒤로 제쳐 두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이분, 다리를 접질렸는지 제대로 서질 못해요. 부축해드리고 싶은데 너무 아파하셔서… 양쪽에서 같이 부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언의 말에 레드맨의 발목 상태를 살펴보던 박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챙기다니, 정말 정의로운 분이시군요. 왜 신 사백 같으신 분이 그런 망나니와 사귀는지!”

‘망나니가 레헬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아직 사귀는 건 아닌데…….’

재언은 한 손으로 조카의 손을 잡고 다른 쪽은 레드맨을 부축해 비상구 쪽으로 한 걸음씩 옮겼다. 그때 또다시 위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2차 폭발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보며 재언은 식겁했다. 잠시나마 침착하게 행동하던 사람들도 다시 비명을 지르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박재원이 머리끈에 달린 날개를 모두 뽑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나비 날개들이 천장으로 날아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하지만 하나뿐인 탈출구였던 비상구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2차 폭발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기둥을 차마 나비 날개가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기는 제가 버틸 테니 구조대가 올 때까지 안전한 곳을 찾도록 합시다.”

그렇게 많았던 인원 중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은 대략 열 명정도였다. 박재원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평소에 보여 주었던 날티는 온데간데없고 S급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백건아. 삼촌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딱 붙어 있어야 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언이 조카의 손을 고쳐 잡으며 속삭였다. 무서운 상황일 텐데도 전혀 칭얼거리지 않는 조카가 신기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모르는 걸까, 여섯 살 난 조카의 담이 센 걸까.

눈으로 주변을 살핀 후 재언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박재원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비상 출구는 다 막혔고 무대 뒤쪽의 입구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저쪽 보이십니까?”

재언이 손가락질한 곳은 무대의 정중앙이었다. 무너지는 천장과 거리도 있고 기둥이 쓰러져 벽에 박히면서 그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는데, 그 사이로 공간이 생겼다.

저곳이라면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도 두꺼운 기둥이 막아 줄지도 모른다.

“저쪽으로 가서 일단 사람들을 돌봅시다. 박재원 씨 능력이면 여기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까?”

“길게 잡아 세 시간…….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구조대가 올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레드맨이 고개 숙인 채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괜찮습니다.”

재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를 부축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가까스로 도착한 무대 위에 주저앉은 레드맨은 답답했는지 헬멧을 벗고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저번에 마주쳤던 그 배우였다.

땀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곁으로 탈출하지 못했던 한 아이가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 다가왔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법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레드맨 구해 줘요… 레드맨은 완전 세잖아요…….”

어린 친구가 아는 레드맨은 위험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고 빌런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레드맨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팬의 간절한 부탁에도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아이를 달래며 데리고 간 뒤로 분위기는 더욱더 침체되었다. 그래도 모두가 나름 침착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S급 히어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재언은 레드맨의 옆에 조카를 앉히고 자신은 뒤에 서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엔레이드맨을 불렀다.

건물이 무너질 때 자신과 신백건의 머리 위로 엔레이드맨의 둠(doom)이 떠오른 것을 느꼈다. 지금쯤이면 이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엔레이드맨, 어떻게 된 거야?”

- 아버지. 위층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타이머로 작동하는 것이라 범인은 건물 내에 없었고 샅샅이 뒤져 본 결과 더 남아 있는 폭탄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보다 럭키 가이 능력 상태가 정말로 좋지 않은걸……. 굿이라도 해야 하나?’

더 이상의 폭발은 없을 것이란 소리에 재언은 마음을 놓으며 조카를 품 안에 안고 레드맨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침울한 목소리로 레드맨이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땐, 저도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가족 중 한 명이 능력자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능력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자랐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재언에게 마음의 벽을 허물었는지 그가 넋두리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었죠. 연기라도 히어로가 되고 싶어서 배우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런 상황에선 도저히 히어로를 연기할 수가 없네요.”

땀에 잔뜩 젖어서 자조적인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잘생겼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재언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배우라서 그런가? 하지만 TV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이 사람이 나오는 공연을 본 적이 있었나?’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가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기억 속에서도 그와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아서 재언은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 능력도 ‘럭키 가이’인데 이런 상황에 놓인 걸 보면 그렇게 힘이 강하진 않은가 봐요. 히어로로 활약할 정도의 힘을 가진 능력자는 적으니까요. 하지만 제 조카에게 당신은 아주 멋진 히어로잖아요? 힘이 없다고 풀 죽으면 안 됩니다, 히어로.”

신재언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레드맨을 바라보고 있는 조카의 어깨를 잡고 크게 웃었다.

레드맨의 가면, 망토, 손목시계까지 야무지게 찬 신백건을 본 레드맨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재언은 또다시 아까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정말 익숙한 얼굴인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게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제 형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형은 어엿한 히어로였죠. 에스트리아 박재원과 마찬가지로 S급 히어로였지만……. 지금은 실종되었어요. 그래도 전 분명 어딘가에서는 형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어? …설마, 이 사람.’

레드맨의 말에 재언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서 흠칫했다. S급 히어로에 실종 상태라고 하면, 2년 전 갑작스럽게 해외에서 실종된 ‘정의의 집행관’뿐이었다.

“설마… 히어로 명이 ‘정의의 집행관’ 맞습니까?”

그의 질문에 레드맨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해외에서 실종되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히어로.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던 그가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는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려 아직도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남동생이었다니.

갑작스럽게 실종된 S급 히어로 ‘정의의 집행관’의 이야기에 재언은 마음속으로 잔뜩 동요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의 동생이었을 줄이야…….’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레드맨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재언은 과거를 떠올렸다.

정확히 2년 전의 이맘때쯤이었다. 마약왕 알례리가 아내와 첫째 아들을 잃고, 증오로 각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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