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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81화 (81/324)

81화

달그락, 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유일하게 소음으로 들릴 만큼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적막이 흘렀다. 길고 커다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 듯 보이나 하나같이 표정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 갑작스럽게 식당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으로 정장을 입은 수십 명의 남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전부 이탈리아계 백인들로 기관총을 손에 들고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에 만찬을 즐기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 지옥에서 찾아온 악마라도 마주한 것처럼 침입자들을 노려봤다. 훅하고 불어오는 혈향에 눈을 찌푸릴 새도 없이 그들의 눈에 매끈한 구두코가 보였다.

뚜벅이는 신발 소리를 내며 기관총을 든 남자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이는 며칠 잠도 못 잔 듯 잔뜩 피폐해진 몰골의 남자였다.

남자의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남자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서늘한 한기로 가득했다.

“아… 알례리! 네, 네 이놈. 가족을 이렇게 버리고…….”

“하하하. 레비아노… 가족이라는 단어를 운운하기엔 우리 사이가 너무 훈훈하지 않나?”

레비아노라고 불린, 식당 안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알례리를 쳐다봤다.

레비아노가 아는 자신의 동생은 마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명랑하고 착해빠진 놈이었다. 게다가 마피아 사업은 지긋지긋하다며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나 하고서 집을 나가 버렸다.

여러모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에게 부모님은 많은 기대를 했지만 결국 가문과 조직을 물려받은 건 레비아노, 자신이었다.

그래도 그는 항상 불안했다. 언제 알례리가 자신의 지분을 돌려받겠다며 찾으러 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했다. 결국, 집을 나간 동생의 사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동생의 가족을 죽이라고 사주했었다.

“…오해가 있었나 본데. 알례리, 일단 여기 와서 밥이나 먹으며 대화를 나누자고. 네가 좋아하는 티본 스테이크다.”

“오, 이런… 나 티본 스테이크 좋아하지 않는데?”

레비아노의 말에 알례리가 마치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식으로 놀림당한 것은 처음인 레비아노의 낯빛이 붉어졌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레비아노는 결국 알례리의 서늘한 시선에 양팔을 들어 올렸다.

“좋아. 난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어. 네가 원하는 건 보스의 자리지? 깨끗하게 물러나 줄 테니 나는 살려 줘. 우린 가족이잖아.”

알례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준 뒤에 담배꽁초를 식당 바닥에 비벼 껐다. 그에 레비아노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알례리는 원래 색으로 돌아오려는 듯한 레비아노의 안색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식당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레비아노가 그런 알례리를 향해 다가오기도 전에 식당 문이 닫혔고, 곧이어 식당 안에서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요즘 이탈리아 암흑가는 21세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피의 전쟁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듯 몰아치는 태풍을 불러일으킨 건 알례리였다.

암흑가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례리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식당 안에서 나온 알례리가 향한 곳은 저택의 가장 좋은 방이었다. 화려한 방문 앞에 선 알례리는 머리와 매무새를 허겁지겁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에는 총 네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앉거나 서 있었다. 엔레이드맨과 타락한 추기경은 각각 책상과 소파 손잡이 위에 걸터앉았고 체어맨은 방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옆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푸른색 안광을 빛내는 그의 위대한 악마가 알례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셨는지요.”

그의 위대한 악마의 이름은 신재언이었다. 재언이 만약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줄 알았다면 몸서리를 치며 싫어했겠지만 알례리는 그마저도 표현을 절제하는 중이었다.

그건 사실 재언의 자식들 모두가 알례리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알례리는 능력을 각성하고 복수를 위해 재언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날의 일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아버지, 저는… 제 아내와 아들을 죽인 놈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싶습니다. 이 힘으로 조금이라도 그 일에 가담한 놈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뒤에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그것이 못마땅하다 하시면, 당신의 손에 다시 태어난 저는 굴복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부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네가 원하는 복수라면.”

이전에도 그랬지만 재언은 복수는 피해자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피해자들의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에는 깊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무고한 사람이 다치는 것만은 금지시켰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피의 복수는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마약왕은 각성한 능력으로 곳곳의 CCTV와 통신수단을 무력화시켜 정부나 이탈리아 히어로들의 개입을 막았다.

그리고 피가 이어진 자신의 형제들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함정을 팠다. 그렇게 미친 듯이 움직이고 나니 이제 복수도 점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화려하던걸요, 마약왕… 아주 통쾌한 복수였나 봅니다. 그들의 비명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짜릿하지요.”

“맞습니다, 넷째 형님.”

따지고 보면 분명히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신임에도 알례리는 꼬박꼬박 다른 형제들에게 윗사람 대하듯 예의를 갖추었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로 엔레이드맨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복수도 다 끝난 건가?”

그에 알례리는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아내에게 총을 쏜 놈만 남았습니다. 빈민촌에서 마약이나 하던 놈으로… 조직원이 아니라서 잡는 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침대 옆에 굴러다니는 이탈리아 패션 잡지를 보면서 자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재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리는 총성에 영 적응이 되지 않는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끝나는구나. 총소리가 들릴 때마다 정말 무서웠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총소리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평범한 소시민인 신재언에겐 이곳의 모든 상황이 전부 공포였다.

만약에 마약왕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 총을 쏜 남자를 끝으로 복수를 끝냈다면 아주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알례리가 남자를 찾았을 때는 이미 그는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하던 중이었다.

재언와 함께 이탈리아 시내로 향하던 알례리는 남자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어느 동네의 골목에 차를 세워 두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가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슴에 여섯 발의 총을 쏴 주겠다고 다짐하며 소음기가 달린 총을 들었다.

알례리의 부하들이 남자를 끈질기게 뒤쫓았다. 짐승을 사냥하듯 사방에서 몰아서 골목길 안쪽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알례리는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사냥을 즐겼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남자는 벌벌 떨면서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는 추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세요…….”

남자가 알례리의 아내와 아들을 총으로 쏴 죽인 뒤 받은 대가는 고작 마약 5g이었다. 그 때문에 알례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총알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겨 그의 복수에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 순간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정의 집행!”

갑자기 나타나 남자와 알례리 사이를 가로막은 건 알례리에 비해 체구가 작은 동양인 남자였다. 열정적인 빛으로 커다란 눈동자에 웃는 듯한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갑옷처럼 몸을 감싼 황금색 빛은 알례리가 쏜 총알을 튕겨낼 정도로 단단했다.

“이런 대낮에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정의의 집행관으로서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알례리와 부하들이 열혈 청년의 등장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정신이 든 알례리가 헛웃음을 지으며 청년에게 말했다.

“네가 끼어들 곳이 아니야. 이번엔 봐줄 테니 그 남자는 두고 꺼져. 아니면 제발 살려 달라고 빌어도 죽여 버릴 테니까.”

“많은 악당이 처음에는 그렇게 말들 하지. 하지만 그런 협박으로 물러난다면 히어로라는 이름이 울지. 있을 수 없는 일!”

드디어 아내와 아들의 복수를 끝낼 수 있었건만 갑자기 헛소리나 내뱉는 놈에게 방해를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알례리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고, 결과는 참패였다.

얼간이 같은 남자는 생각보다 강했다. 전투 쪽으로는 특화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알례리는 눈앞의 청년에게 저지당하는 바람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순간을 허망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수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정의로운 청년의 등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무고한 시민인 줄 아는 건가? 뜨내기 히어로……. 그 남자는 고작 마약 때문에 죄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였어. 그리고 난 녀석이 죽인 사람들의 남편이고 아버지지. 그런데도 날 말리겠다는 건가?”

알례리의 힘없는 목소리에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어도 적의를 상실하고 도망가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됩니다! 제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이 남자는 제가 경찰에 넘길 테니, 부디 무의미한 복수는 멈추십시오!”

그때였다.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 방울씩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닥쳤다.

정의로운 청년은 남자를 데리고 골목길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리고 알례리는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것은 알례리의 역린이었다.

그리고 청년은 알례리의 역린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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